[윤민아의 책 사이, 삶 한 장] 책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

[한국독서교육신문 윤민아 기자]
얼마 전 도서관에서 마음이 오래 머무는 장면을 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가 도서관에 들어와 천천히 책을 골랐다. 각자 고른 책을 들고 내가 앉아 있던 자리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책을 펼쳤다.
잠시 후 아내분이 책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테이블 위 스탠드 조명을 켰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편분이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키더니 스탠드를 아내의 책 가까이로 끌어다 놓았다. 책장이 더 잘 보이도록 조명의 방향도 조용히 맞추어 주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책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어쩌면 저런 것이 아닐까.
거창한 말도, 특별한 선물도 아닌 것.
당신이 읽는 책이 조금 더 잘 보이도록 말없이 불빛을 옮겨 주는 것.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나도 저런 여생을 살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함께 도서관에 가고,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나란히 앉아 읽는 삶. 굳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상대의 책이 잘 보이지 않을까 조용히 불빛을 옮겨 줄 수 있는 관계.
그날 이후 '책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오래도록 책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젊은 시절의 독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읽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읽는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책을 찾기도 하고 답을 얻기 위해 문장을 붙잡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의 독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잃지 않기 위해 읽는 것. 하루를 조금 더 깊게 살아가기 위해 책을 펼치는 것.
그런 독서를 상상하면 나이 듦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늙는다는 말을 종종 잃어 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젊음도, 체력도,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깊어지는 것도 있다.
경험이 그렇고, 생각이 그렇고,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렇다.
책은 그 시간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준다.
스무 살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이 마흔에는 마음으로 들어오고, 마흔에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예순에는 비로소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많이 읽는 사람보다 오래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흔이 되어도 서점의 신간 코너가 궁금하고, 여든이 되어도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사람.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이건 무엇일까?"라고 묻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곁에 함께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다.
한 사람은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은 역사를 읽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일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독서는 혼자 하는 일이지만, 책이 있는 삶은 꼭 혼자일 필요가 없다.
함께 도서관에 가고, 서로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
그런 시간들이 쌓여 한 사람의 노년을 만들고 한 부부의 여생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잘 늙어간다는 것은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궁금해하며, 곁에 있는 사람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르쳐 준다.
세상을 향해서는 계속 질문하게 하고, 사람을 향해서는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게 한다.
언젠가 아이들이 모두 자라고 지금보다 훨씬 조용한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창가에 앉아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여전히 연필로 밑줄을 긋고, 노트 한편에 생각을 적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옆에는 각자의 책을 읽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이 잘 보이지 않는 날이면 스탠드를 조금 가까이 옮겨 주고, 먼저 책을 덮는 날이면 상대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는 사이.
얼마 전 도서관에서 만난 두 사람처럼 말이다.
책은 젊음을 붙잡아 주지 않는다.
시간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조금씩 바꾸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펼친다.
더 많이 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오래도록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오래도록 곁에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언젠가 머리가 희어지고 책장을 넘기는 손이 지금보다 느려지는 날이 오더라도 내 곁에는 읽다 만 책 한 권과 함께 읽어 온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평범한 오후, 다시 도서관으로 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자 읽고 싶은 책 한 권씩을 골라 나란히 앉아서.
많이 읽는 사람보다 오래도록 읽는 사람으로,
혼자 잘 살아온 사람보다 함께 잘 늙어가는 사람으로.
그렇게 책과 함께 천천히 나이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