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히로시마 원폭 투하

조범자 2026. 8. 1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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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들과 놀려고 대문을 여는 순간, 번쩍하는 붉은 섬광과 굉음으로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떠보니 어머니 품에 안겨 있었는데 어머니의 흰색 저고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아들을 몸을 던져 붙잡아 가슴에 품어 안다가 날아온 파편 조각들이 어머니 등에 박혀서 생긴 핏자국이었다. 내가 조금만 일찍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른 아침에 학생 근로 동원에 나섰던 큰 누나 점자는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온몸에 화상을 입고 며칠을 앓아누운 끝에 숨을 거뒀다. 우리 가족은 누나의 죽음에 통곡했다."

"제20항공군 제509혼성부대는 1945년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조속히 아래에 제시하는 목표 지역들 가운데 한 곳에 특수 폭탄을 투하할 것.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이가타,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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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피폭자 재일교포 출신 장훈 씨. ‘안타 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그는 일본 프로야구계의 전설적 인물이다. [게티이미지]

피로 물든 어머니의 흰 저고리

“나는 친구들과 놀려고 대문을 여는 순간, 번쩍하는 붉은 섬광과 굉음으로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떠보니 어머니 품에 안겨 있었는데 어머니의 흰색 저고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아들을 몸을 던져 붙잡아 가슴에 품어 안다가 날아온 파편 조각들이 어머니 등에 박혀서 생긴 핏자국이었다. 내가 조금만 일찍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른 아침에 학생 근로 동원에 나섰던 큰 누나 점자는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온몸에 화상을 입고 며칠을 앓아누운 끝에 숨을 거뒀다. 우리 가족은 누나의 죽음에 통곡했다.”

일본 프로야구계의 전설, 재일교포 출신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씨의 증언이다. 그는 “그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8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제 일처럼 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원폭병 환자와 접촉하면 전염된다’라는 소문이 나돌아 피폭자와의 접촉을 피하거나 심지어 결혼을 앞두고 파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피폭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분위기에 그는 60세 무렵이 되어서 비로소 자기가 피폭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 모습.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일본군 심장부 히로시마가 원폭의 첫 번째 타깃

“제20항공군 제509혼성부대는 1945년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조속히 아래에 제시하는 목표 지역들 가운데 한 곳에 특수 폭탄을 투하할 것.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이가타, 나가사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옥쇄작전’으로 버티는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키기 위해 1945년 7월 25일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극비 지령을 내렸다. 미국이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지 10일 만의 일이었다.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폴 티베츠 주니어 대령은 폭격기 에놀라 게이호를 몰고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7초,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해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했다. 이 원자폭탄 한 발로 히로시마 인구의 40%에 달하는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극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하필 히로시마를 원폭 투하의 첫 번째 장소로 선정했는가. 히로시마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 ‘히로시마 대본영’이 설치되어 전시 임시수도 기능을 떠맡았으면서 군사도시로 발전했다. 히로시마 우지나항에는 1000척 이상의 거대한 수송 선단을 보유하며 병력 및 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육군선박사령부가 있었다.

사령부 주변에는 독가스 생산공장, 미국 본토를 공격하는 풍선 폭탄 제조공장 등 무기 생산공장들이 즐비했고 이곳에는 약 30만 명의 인력이 전쟁 물자 조달과 수송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히 일본군의 심장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미군은 히로시마를 원폭 투하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1945년 2월 4일, 크리미아반도 얄타에 모인 연합국 세 정상.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 이 회담에서 소련군의 대일 참전 밀약이 이뤄졌다. [게티이미지]

미국, 소련의 대일참전 대가로 사할린과 쿠릴열도 영유를 인정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승기를 잡고 일본 본토 점령에 나선 미국은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다. 궁지에 내몰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 최후까지 항전하라는 ‘옥쇄작전’을 독려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이 진행되면 미군 전사자는 약 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본을 항복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 방안의 하나가 소련의 대일참전이었다. 소련군이 만주 일대에 진입해서 일본 관동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관동군의 일본 본토 이동을 저지할 수 있다고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루즈벨트와 소련 스탈린은 1945년 2월 4일 크리미아반도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2~3개월 안에 대일참전을 하고, 그 대가로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소련에 양도한다”라는 내용의 비밀 협약을 맺는다(‘미·소 얄타 밀약’). 이 밀약은 루즈벨트가 급서한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에게 승계되었다.

소련군은 이 협약에 따라 독일이 항복한 지 3개월만인 8월 9일 새벽, 만주 국경을 넘어왔다. 그리고 몇 시간 후인 오전 11시 무렵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파국을 직감한 일본은 다음날인 10일 연합군 측에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

히로시마 원폭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모세의 지팡이’였나?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미군은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반도는 전화에 휘말려 막대한 희생을 치렀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련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만주 및 한반도 일대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더라면 한반도는 오늘날과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관점에서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지만, 한편 이는 역설적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모세의 지팡이’였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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