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도 못받은 ‘칼날 위 어린 왕’… 어쩌면 죽음은 필연이었을 수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6. 8. 14. 09:2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조선에서는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해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48) 왕의 인성과 사생활 - 단종 편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 정사는 의정부·육조서 도맡아
인사는 ‘황표정사’로… 신하가 황색점 찍으면 그 위 낙점
수양의 ‘계유정난’ 이후 김종서 등 죽자 상왕 물러나
복위사건 휩쓸려 노산군 강봉… 영월 유배뒤 사망
실록선 ‘장인 송현수 교수형되자, 스스로 목매어 卒’
야사엔 ‘害 당해 강물 던져져… 엄흥도가 장사’ 민심 담겨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어린 왕, 단종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조선에서는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도 귀인 홍씨, 사칙 양씨 두 사람뿐이었다. 비록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 양씨가 있기는 했지만 늦게 입궁한 데다 후궁인 탓으로 정치적인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개인적인 일을 돕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따라서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 것이었다.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 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 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해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에 유배됐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해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됐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 자살이냐, 타살이냐? 단종 죽음의 진실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 ‘세조실록’은 1457년 10월 21일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하여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화의군)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실록의 이 기록에 따르면 단종은 장인 송현수가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또 ‘해동야언’에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단종은 자살했다는 것인데, 과연 이 기록들은 사실일까.

그런데 다른 야사인 ‘아성잡설’은 단종의 죽음을 타살로 기록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노산이 해를 당하자, 명하여 강물에 던졌다.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가는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성잡설’은 분명히 ‘노산이 해를 당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고 했다. 실록이나 여러 야사의 기록처럼 단종이 단순히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고 있다.

어쨌든 단종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숙부 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실록은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쓰고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은 아니었다.

사실, 단종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른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에 대해 ‘아성잡설’은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전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뒀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육체를 거둬 염하여 장사 지냈는데, 얼마 안 되어 소릉(현덕왕후의 능)의 변이 있어 또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아전이 차마 파지 못하고 거짓 파는 것같이 하고 도로 묻었다.”

‘아성잡설’은 아전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영남야언’은 그 아전의 이름을 밝히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호장 엄흥도가 옥거리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을 갖춰 이튿날에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이때 흥도의 혈족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다 하였다.”

당시 야사들이 이와 같은 기록들을 남긴 것으로 봐서 당대의 백성들은 수양의 즉위를 불법적인 왕위 찬탈로 보았고, 수양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인 행위를 반역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숙종대인 1698년에 단종을 복위하여 영월에 있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추존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볼 때, ‘세조실록’이 단종을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예에 따라 장례를 치러줬다고 기록한 것은 세조와 그 일당들이 단종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물에 던져 없앤 것을 숨기기 위한 역사 왜곡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

■ 인물 설명 - 송현수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아버지다. 원래 세조가 왕자 시절에 막역하게 지내던 친구 사이였다고 하는데, 풍저창 부사로 있던 1454년에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동지돈녕부사 및 여랑군에 봉해졌다. 이후 단종이 상왕이 되고 세조가 즉위한 후, 단종 복위사건이 발생하면서 하옥됐고, 다시 금성대군 사건이 발발하면서 처형됐다.

한편, 그의 딸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의 유배와 함께 강등돼 궁궐에서 내쫓겼다. 이후 아버지 송현수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후, 그녀는 동대문 밖 청룡사라는 절 부근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근근이 생을 이어갔다. 그러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소복 차림으로 산봉우리 거북바위에 올라가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곡을 하던 봉우리를 ‘동쪽을 바라보던 봉우리’라는 뜻의 ‘동망봉(東望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