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통치 흔적, 용산공원에 여전히 묻혀…“지표조사 서둘러야”

노형석 기자 2026. 8. 1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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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 통치 중추이자 강제징용 군사동원 본거지였던 서울 용산 조선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의 실체를 왜 찾으려 하지 않는가. 광복 81돌을 맞아 역사학계에서 일제 군사기지 흔적을 덮고 추진 중인 용산공원의 역사적 실체를 찾는 데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제는 조선군 사령부 1청사를 1908년 7월 여기 용산에 설립하고 조선 식민통치의 본격적인 기반을 세웁니다. 지금 보신 2청사 벙커 너머 바로 저 자리입니다." 김 교수의 말에 눈을 돌려보니 2청사 뒤쪽으로 용산 센트럴파크 고층 아파트 단지가 배후처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조선군 사령부 1청사 터와 2청사가 있는 주차장 권역 뒤쪽 언덕을 넘어가면 나오는 용산어린이정원 서남쪽의 총독 관저 터는 울창한 플라타너스 숲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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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81돌 용산공원 땅속 근대사 찾기
(상) 곳곳에 남은 야만의 일본
해방 직후 미군이 공중 촬영한 흑백사진(위)에 서울 용산 조선군 사령부 1청사와 벙커 모양새의 2청사가 보인다. 두 청사 건물 뒤로 조선총독 관저와 한강이 보인다. 아래 작은 사진은 2청사의 현재 모습. 철조망 담에 둘러싸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김천수 연구자 제공, 노형석 기자
일제의 식민 통치 중추이자 강제징용 군사동원 본거지였던 서울 용산 조선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의 실체를 왜 찾으려 하지 않는가. 광복 81돌을 맞아 역사학계에서 일제 군사기지 흔적을 덮고 추진 중인 용산공원의 역사적 실체를 찾는 데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겨레는 2회에 걸쳐 용산어린이정원 내 유적지 현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문제점 등도 짚어본다.
“여기에 아파트를 짓네 마네 한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건물만 사라졌지 땅속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인 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의 흔적이 살아 있어요.”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 권위자인 김종헌 배재대 건축학과 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일 낮 서울 용산동5가 옛 미8군 기지 터인 용산어린이정원 들머리에서 만난 직후였다. 김 교수는 정원 숲속 한구석의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철조망 친 담벽 너머 잡풀 속에 방치된 건물이었다.

“일제의 조선군 사령부 2청사가 있던 곳입니다. 1941~42년 태평양전쟁 때 지었어요. 미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벙커 건물인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 용산어린이정원 들머리 진입로 한쪽 구석에 있는 일제의 옛 조선군 사령부 2청사. 80여년 전 지은 콘크리트 벙커 구조물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철조망 담에 둘러싸여 출입이 통제된다. 뒤켠으로 용산 센트럴파크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서 우러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일본군은 이 육중한 건물에 정보실, 작전실, 통신실, 경보실, 방송실 등을 설치하고, 정보작전을 심의하고 작전 지휘소로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패전 뒤 관련 자료를 대부분 불태우고 철수하는 바람에 상세한 내용은 알 길 없지만, 역사학자들은 이곳에서 일본군 지휘부가 조선 청년들의 징병과 징용 등 강제동원 계획,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할 경우를 대비한 결전 작전 계획 등도 논의했을 것으로 본다.

이날 답사에 함께한 용산기지 연구자 김천수(‘용산기지의 역사를 찾아서’ 저자)씨가 이어 말했다. “해방 뒤에는 미군 7사단이 용산기지에 진주하면서 이 건물을 본거지로 썼어요. 미군정이 1949년 6월 철수한 뒤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기지로 옮겨와 한국전쟁 직전까지 육군본부 벙커로 썼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에 연루돼 전역당한 뒤 구명돼 문관으로 일했던 곳이고, 한국전쟁 때 한강다리를 폭파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결정을 내렸던 공간도 여기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지요.”

전후에는 미8군에 인도돼 정보작전실로 쓰였고, 2010년대 이후 한국으로 소유권이 넘어온 뒤에는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 출입도 전면 차단돼 학계에서도 실체를 모르는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정보센터로, 해방 뒤에는 국방부와 육군본부로 쓰였음을 기술한 푯말이 망가진 채 구석에 서 있을 뿐이다.

서울 용산어린이정원 들머리 진입로변 주차장 구역에 있는 일제의 옛 조선군 사령부 1청사 건물 터. 한국전쟁 때 포화를 맞고 건물은 소실됐다. 뒤켠으로 용산 센트럴파크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이 건물만이 아니다. “일제는 조선군 사령부 1청사를 1908년 7월 여기 용산에 설립하고 조선 식민통치의 본격적인 기반을 세웁니다. 지금 보신 2청사 벙커 너머 바로 저 자리입니다.” 김 교수의 말에 눈을 돌려보니 2청사 뒤쪽으로 용산 센트럴파크 고층 아파트 단지가 배후처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곁에는 과거 미군 관사로 쓰였던 작은 사택 건물들이 보였고, 바닥엔 미니버스와 승용차 두대만 덜렁 놓여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도블록을 박아 포장한 바닥 곳곳에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김 교수와 김천수씨가 짚어준 주차장 터의 내력은 예사롭지 않다. 1908년 7월31일 이 자리에 들어선 조선군 사령부 청사는 슬레이트 기와지붕의 간략화된 서양식 르네상스풍 목조 2층 건물로, 연면적이 1415㎡에 달했다. 공사비만 20만6655원(지금 시가로는 2천억원대)이 든 이 청사는 한국 식민통치를 준비하고 수행한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일본군 기지의 심장이자 두뇌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 사라진 뒤 미군은 이 일대를 ‘사우스 포스트’라 불렀다. 이곳 어디에도 조선군 사령부를 알려주는 표시나 기념물은 없다. 사령부 터는 해방 뒤 육군본부와 미8군 시설로 쓰이면서도 지하의 유구나 유적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발굴하면 막대한 일제강점기 시설 운용 흔적이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껏 발굴 조사는 물론 지표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용산 조선총독 관저를 미군이 공중 촬영한 전경. 호화로운 네오바로크풍의 양관으로 연회장으로 활용됐다. 김천수 연구자 제공

이런 상황은 인근 조선총독 관저 터도 마찬가지다. 조선군 사령부 1청사 터와 2청사가 있는 주차장 권역 뒤쪽 언덕을 넘어가면 나오는 용산어린이정원 서남쪽의 총독 관저 터는 울창한 플라타너스 숲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이 굳게 잠겨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용산의 아방궁으로 불렸던 네오바로크 스타일의 초호화 관저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돼 1950년대에 철거됐다. 터는 2010년대까지 미군병원으로 쓰이다 한국 정부가 소유권을 이전받았다. 하지만 이곳 또한 내부 권역의 발굴, 지표 조사는 전무한 실정이다. 김천수씨는 “총독 관저이자 연회장으로서 식민통치와 관련한 역사적 공간인데, 소유권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는데도 역사적 실상을 밝히는 발굴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용산공원의 추진 경위는 복잡다단하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확정되면서 용산공원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토교통부 주관으로 공원조성추진기획단이 결성됐다. 그 뒤로 4차례나 종합기본계획이 변경 고시됐고, 6차례 시설물 및 공간 타당성 연구 조사가 있었다. 용산기지 약 243만㎡ 중 58.4만㎡를 돌려받았고,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한 30만㎡가 2023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공간의 역사성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계속 뒷전이었다. 2023년 5월 공원 개방의 첫걸음으로 윤석열 당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용산어린이정원이 개장했지만, 역사 유산을 정비하고 자연 역사가 어우러진 시민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기존 정비계획에는 없던 내용이어서 전문가들은 의아해했다. 지금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용산어린이정원이 어떻게 입안되고 추진됐는지 알지 못한다.

김 교수는 “용산 조선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 터 발굴은 우리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실타래를 푸는 선결적인 작업”이라며 “용산어린이정원에 일부 정부 부처가 홍보관을 세우는가 하면, 아파트 건립을 검토하는 등 지금 정부 정책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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