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으로부터 제국 지키려… 젊은 왕은 선대의 죄를 기꺼이 짊어졌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플라톤 이전 3,000년 인류사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한국고대근동학회 창립 멤버인 김구원 유성환 윤성덕 주원준 박사가 도발적 질문과 함께 인간이 기록한 최초의 역사 시대, 고대 근동 세계를 소개합니다.
'말라(유프라테스)' 강 제사를 슬그머니 중단한 죄, 신들 앞에 충성 서약까지 받았던 정당한 후계자 투드할리야를 죽이고 왕좌를 훔친 죄, 이집트와 맺은 쿠루스타마 조약을 깨고 암카를 두 차례 친 죄.
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죄상을 조목조목 기도문에 새겨 왕실 문서고에 보관하고 거듭 낭독하게 했다.
행하고 신에게 올리는 죄 고백 문서에 기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병이 그냥 제풀에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이후 무르실리는 히타이트 제국을 다시 강력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8> 재난을 마주하는 지도자의 자세
편집자주
"플라톤 이전 3,000년 인류사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한국고대근동학회 창립 멤버인 김구원 유성환 윤성덕 주원준 박사가 도발적 질문과 함께 인간이 기록한 최초의 역사 시대, 고대 근동 세계를 소개합니다. 고대 그리스에 갇힌 우리의 세계사 시야가 확 트일 겁니다.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는 국운의 절정에 있었다. 정복 군주 수필룰리우마 1세 아래 히타이트 신왕국은 강대국 미탄니를 무너뜨리고 이집트, 아시리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동 최강국으로 올라섰다. 무적의 전차 군단을 앞세운 이 제국 앞에 거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제국의 심장을 겨눈 것은 적의 칼이 아니었다. 칼도 갑옷도 없이 성문을 통과한 적, 바로 '역병'이었다. 이집트령 암카를 치고 끌고 온 포로들에게서 옮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병은 궁전까지 스며들어 수필룰리우마 1세의 숨통을 끊었다. 왕관을 물려받은 장남 아르누완다 2세마저 1년 반 만에 같은 병으로 쓰러졌다. 왕좌는 저주받은 자리 같았다.
조롱 속 히타이트 왕좌 오른 '풋내기', 무르실리 2세
제국의 운명은 수필룰리우마 1세의 막내아들, 무르실리 2세(기원전 1321~1295)의 여린 어깨 위에 통째로 쏟아져 내렸다. 스무 살 남짓,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부고를 들은 적들은 예의조차 차리지 않았다. "아버지도 형도 위대한 전사였지만 다 신이 됐다. 이제 막 그 자리에 앉은 저 애송이가 대체 뭘 안단 말인가?" 조롱은 곧 창칼로 바뀌었다. 사방에서 반란의 깃발이 오르고 속국들이 앞다퉈 등을 돌렸다. 무르실리에게 길을 일러줄 수 있는 아버지와 든든한 형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어린 왕은 모두의 예상을 보란 듯 뒤엎었다. 무르실리는 먼저 북방의 카스카를 응징해 국경을 다잡고, 창끝을 서쪽 아르자와로 돌렸다. 당시 아르자와의 우하지티 왕은 히타이트에서 도망친 백성들의 송환을 거부하고, 에게해 건너 그리스인들과 손잡고 히타이트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르실리는 직접 출정해 아르자와의 수도 아파사(에페소스)를 정복함으로써, 즉위 4년 만에 아버지조차 못 이룬 서쪽 지방 평정에 성공한다. 그때 본토로 끌려온 포로만 6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재위 9년에는 시리아를 지키던 두 형이 잇달아 죽었다. 부고가 퍼지자 속국이 반기를 들고 이집트가 북상했으며 아시리아가 카르케미시를 넘봤지만, 그는 장례를 치르자마자 남하해 제국의 남쪽 절반을 성공적으로 되찾았다.
가시지 않는 '신들의 분노', 제국을 흔들다

그러나 무르실리에게 전장의 승리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했다. 진짜 적은 검을 들지 않았다. 아 버지가 끌고 온 역병이 20년 가까이 본토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백성을 하나씩 삼켰다. 급기야 신전에는 제사를 올릴 사제조차 남지 않아 신을 향한 예배마저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아리나의 태양 여신에게 올린 기도문에는 왕의 절규가 그대로 박혀 있다. "신들이여,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 땅에 역병을 풀어놓으시다니요! 온 히타이트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의 밭을 갈던 농부들도 다 죽었습니다." 웅장한 전차 부대도, 난공불락의 성벽도, 이 보이지 않는 적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백신도 바이러스도 모르던 시대에 역병은 곧 '신들의 분노'였다. 무르실리는 신관과 점술사를 총동원해 신탁을 구하고, 왕실 문서고의 낡은 점토판까지 뒤져 재앙의 뿌리를 캤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은 칼보다 아팠다. 원인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우러르던 아버지의 죄였던 것이다. '말라(유프라테스)' 강 제사를 슬그머니 중단한 죄, 신들 앞에 충성 서약까지 받았던 정당한 후계자 투드할리야를 죽이고 왕좌를 훔친 죄, 이집트와 맺은 쿠루스타마 조약을 깨고 암카를 두 차례 친 죄. 아들은 평생 우러러 온 영웅을 제 입으로 신들 앞에 고발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보통의 권력자라면 등을 돌렸을 것이다. 변명거리도 넉넉했다. 아버지가 암카를 선제 공격해 이집트와의 조약을 어긴 것은 맞지만, 그 후 이집트 왕비가 "아들 하나를 보내주면 남편으로 삼겠다"고 청해 왔고, 이를 믿고 보낸 히타이트 왕자 잔난자가 이집트 땅에서 살해당한 일이 발생했다. 무르실리의 아버지가 다시 군대를 보낸 것은 아들 잃은 아비의 보복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무르실리는 달랐다. 그는 변명하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였다. 집안의 치부를 덮는 대신 무릎 꿇어 사죄하고, 중단됐던 말라 강 제사를 되살리고 정화 의식을 올렸다. 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죄상을 조목조목 기도문에 새겨 왕실 문서고에 보관하고 거듭 낭독하게 했다. 신들에게 올린 문서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선왕의 수치를 제 손으로 3,000년짜리 기록으로 만든 셈이다. 오늘 우리가 수필룰리우마의 쿠데타를 아는 것도 아들 무르실리의 이 고백 덕분이다.
몸 바쳐 아버지의 죄 갚은 아들… 재건에 성공하다

이 모든 사건들의 압박은 왕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무르실리의 실어증'이라 불리는 점토판에는 왕이 겪은 증세가 1인칭으로 적혀 있다. 쿤누로 가는 길에 폭풍의 신이 무섭게 천둥을 울리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입안의 말이 작아졌다." 말은 조금씩 돌아왔지만, 몇 해 뒤 그 일이 자꾸 꿈에 나타나더니 꿈속에서 신의 손이 그를 덮쳤고, 그 뒤 "내 입이 옆으로 돌아갔다"고 왕은 적었다. 구안와사를 묘사한 대목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가벼운 뇌졸중, 또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몸으로 터져 나온 전환장애로 추정한다. 무리도 아니다. 스무 살에 즉위해 20년간 역병, 반란과 국경을 동시에 감당했고, 아내 가슐라위야를 병으로 잃었으며, 그 죽음의 책임을 두고 계모 타와난나와 오래 싸웠다.
그럼에도 그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수행했다. 결국, 그의 재위 중반 무렵에 지난 20년간 창궐하던 역병이 물러갔다. 그것이 아버지 죄를 정화하는 의식을 행하고 신에게 올리는 죄 고백 문서에 기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병이 그냥 제풀에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이후 무르실리는 히타이트 제국을 다시 강력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무너진 인구와 신전 경제를 복구하고 시리아 국경 지대도 안정시켰다. 아들 무와탈리 2세가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와 맞붙을 수 있었던 국력은 상당 부분 이때 다시 쌓인 것이다.
전차 부대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초강대국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인구 붕괴와 국가 마비의 벼랑에 몰렸다. 이 풍경은 최근 전 세계가 통과한 코로나19 팬데믹과 소름 돋도록 겹친다. 정치인들은 국가적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이 미칠 정치적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한다. 무르실리에게도 역병을 이집트 탓으로, 배신한 속국 탓으로, 신을 소홀히 한 백성 탓으로 돌릴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인을 끝까지 캐물었고, 답이 제 집안을 가리키자 그대로 인정했다.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 소재가 자신에게 있으면 회피하지 않으며, 확인된 원인에 실질적 조치를 취하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3,300년 전 이 역사는 오늘날 국가적 재난 앞에서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김구원 전주대 선교신학대학원 교수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대로면 총선도 어렵다"… 종부세 '전면 재검토' 주장까지 나온 민주당-정치ㅣ한국일보
- 윤상현 "선거 조작은 과유불급" 말했다가…친장동혁계 당원들이 윤리위 제소-정치ㅣ한국일보
- 셀프 감금 후 나체 사진으로 성착취물까지… 67억 뜯은 보이스피싱 조직 검거-사회ㅣ한국일보
- '유시민 누나' 유시춘 전 EBS 이사장, 1960만 원 '법카 사적 유용 혐의' 1심서 무죄-사회ㅣ한국일보
- 친일 논란 하영 증조부 안상호가 독립운동가?... 안양시, 게시물 삭제-사회ㅣ한국일보
- 이진숙 '5·18 재조명' 강행, 현장은 아수라장… 국힘 원내지도부도 말렸다-정치ㅣ한국일보
- 광복절 연휴 내내 전국에 비… 끝나면 폭염 다시 온다-사회ㅣ한국일보
- 장동혁 "사퇴" 2.2만 서명하자 "지지" 2.3만 맞불... 당원까지 번진 野 당권 다툼-정치ㅣ한국일보
- 李 "집 지을 땅 부족하면 법 바꿔서라도"... 부동산 '시한폭탄' 막기 총력-정치ㅣ한국일보
- '국가유공자 후손' 이주승, 李 대통령 만났다... "할아버지 덕분에 청와대"-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