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여행, 살아내는 이야기…‘경주기행’ [한현정의 직구리뷰]

한현정 스타투데이 기자(kiki2022@mk.co.kr) 2026. 8. 1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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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을 죽인, '그놈'을 죽이러 간다. 남은 세 딸과 함께.

세 딸을 누구보다 사랑함에도 죽은 막내를 향한 상실감이 모성의 정중앙을 비틀어 놓은 탓이다.

더 튈 수 있는 무기를 필요한 만큼만 꺼내 쓰고, 인물의 마음을 한 발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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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함보다 깊은 여운, 반가운 신예의 품격
사진 I 롯데엔터테인먼트
내 딸을 죽인, ‘그놈’을 죽이러 간다. 남은 세 딸과 함께.

이 가족의 일상은 8년 전 그날 완전히 무너졌다. 엄마(이정은)의 삶에는 오로지 복수라는 목표만 남았다. 남은 딸들이 잠시라도 연락되지 않으면 병적으로 불안해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세 딸을 누구보다 사랑함에도 죽은 막내를 향한 상실감이 모성의 정중앙을 비틀어 놓은 탓이다.

남겨진 딸들의 시간은 엄마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멈춘 듯 흐르고, 흐르는 듯 멈춰 있다. 동생을 잃은 슬픔도, 그놈을 향한 분노도, 무너진 엄마를 향한 연민도 진심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 역시 중요하다. 잊을 수 없지만 지우고 싶고, 영원히 그날에 갇혀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부모가 자식을 잃는 것과 자매가 자매를 잃는 건 결코 같은 무게의 상실일 수 없다. 엄마의 고통은 가장 깊지만, 딸들에게도 저마다 싸워야 할 복잡한 숙제와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경주기행’은 어느 한쪽을 이기적이라 몰아세우지 않은 채 이 복잡한 결을 세밀하고도 덤덤하게 그려낸다.

무너진 엄마를 대신해 가정을 지탱해온 맏이(공효진), 무모한 복수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끝내 한 발을 담그는 시크하고 현실적인 둘째(박소담), 그리고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았을까’라는 셋째(이연)의 마음까지. 이들의 얼굴과 말에는 사랑과 질투, 죄책감과 상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영화는 같은 이를 잃고도 저마다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견뎌내는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사진 I 롯데엔터테인먼트
흥미로운 건 이 영화의 현실감이 사건이 아닌 ‘인물’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엄마와 세 딸이 사적 복수에 나선다는 설정 자체는 비현실적이지만, 그 거친 사건을 통과하는 인물들은 놀랍도록 현실적이다.

누군가는 복수에 매달리고, 누군가는 가족을 떠받친다. 누군가는 냉정하게 현실을 계산하면서도 놓질 못하고, 또 누군가는 죽은 사람에게 품었던 미움 때문에 자신의 슬픔마저 의심한다. 그 어지러운 속내 안에 희로애락이 깊고 진하게 스며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는 것과, 그 사람 없이 다시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그렇다고 무거운 이야기로만 가득한 건 아니다. 영화는 적재적소에 블랙코미디를 끼워 넣어 숨통을 틔운다. 네 여성 캐릭터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웃음에는 억지스러운 활력 대신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 특유의 생활감이 진하게 묻어난다. 프로들의 앙상블답다.

실제로 네 딸 중 막내로 자란 김미조 감독의 경험이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자신이 지켜본 엄마와 언니들의 관계와 감정을 영화에 가져온 만큼 모녀와 자매 사이의 묘사가 기가 막히게 세밀하다. 가족이기에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잔인하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관계의 디테일이 살아 숨 쉰다.

여기에 로드무비의 외피를 입히고 반전의 스릴도 놓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장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도 놓치지 않는 본질은 ‘가족’이다. 첫 상업영화에서 이 어려운 균형을 밀고 간 감독의 뚝심이 돋보인다.

물론 바로 그 선택은 대중성 측면에서 물음표가 될 수 있다. 사적 복수극이라는 설정이 약속하는 통쾌한 응징의 쾌감은 사실 약하다. 직선적인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심심하게 느낄 여지도 있다. 상대적으로 남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역시 투박하고 평면적이다.

사진 I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럼에도 곱씹을수록 이 ‘심심함’은 어쩐지 소중하다. ‘죽이는 여행’이라는 도발적인 설정에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그리고 변요한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연기파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았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훨씬 요란하고 화끈한 복수극을 만들 수도 있었다. 웃음을 더 키울 수도, 응징의 쾌감을 더 세게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김미조 감독은 그 많은 카드를 쥐고도 과시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자리, 엄마와 언니들을 바라보며 길어 올린 관계와 감정으로 돌아간다. 더 튈 수 있는 무기를 필요한 만큼만 꺼내 쓰고, 인물의 마음을 한 발 앞에 세운다.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답답하고 지난한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온기를 품은 채 묵묵히 걸어간다.

어쩌면 ‘경주기행’의 가장 대담한 모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꼭 요란하고 화려하고 화끈해야 모험인 것은 아니다. 더 쉬운 길과 더 잘 팔릴 법한 길이 보이는데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지키는 것. 얼핏 무난해 보이지만 실은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길이다.

그 절제에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를 응징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무너진 일상이 마법처럼 복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기행’이 주목하는 것은 복수를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는 일이다.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을 향한 위로와 진심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진다.

영화는 그 잔인한 간극을 웃음과 슬픔 사이에 가만히 펼쳐놓는다. 이 복수극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다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통쾌하지만은 않아서, 오히려 오래 먹먹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품격이 있다.

오는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1분. 손익분기점은 약 120만(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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