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욱 칼럼] 문근영과 하영, 진영주의 결합한 ‘연좌제 야만’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과연 근대에 어울리는 문명사회인가, 아니면 아직도 중세의 광기가 지배하는 야만의 광장인가. 누군가의 가족 내력, 혹은 누군가의 친분 관계 하나만을 꼬투리 잡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매도하고 매장하려는 '연좌제의 유령'이 21세기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조선 시대 삼족을 멸하던 연좌제는 국가의 법적 정통성을 강화하기는커녕, 정적을 제거하고 사회 전체를 공포로 억누르는 폭정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자유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저서 '자유론'을 통해 사회적 다수의 침묵하는 광기와 여론의 폭력은 국가의 법적 압제보다 더 무섭다고 지적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과연 근대에 어울리는 문명사회인가, 아니면 아직도 중세의 광기가 지배하는 야만의 광장인가. 누군가의 가족 내력, 혹은 누군가의 친분 관계 하나만을 꼬투리 잡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매도하고 매장하려는 ‘연좌제의 유령’이 21세기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이 괴물 뒤에는 망국적 진영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20년 전 배우 문근영의 사례를 돌이켜보면 이 야만적 폭력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알 수 있다. 수십억 원을 기부하며 사회적 귀감이 되었던 청년 배우에게 일부 세력은 외조부의 빨치산 행적과 이념적 궤적을 들먹이며 낙인을 찍었다. 외할아버지가 비전향 장기수였으니 그 기부금마저 불순하다는 식의 가혹한 마녀사냥이 자행됐다. 한 개인의 순수한 선의와 인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핏줄’이라는 굴레만 남아 개인을 죄인으로 몰아세웠다.
최근 배우 하영을 둘러싼 논란도 문근영과 판박이다. 가문이 대대로 의료계에 종사해 온 이력을 밝히는 것 자체는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가만히 있었으면 문제가 아닌데 자랑을 하다가 증조부의 과거 행적이 드러났으니 죄라는 논리는 괴이하기 짝이 없다. 후손이 100년 전 증조부의 구체적인 행적이나 친일 단체 가입 여부까지 미리 다 파악하고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증조부의 일로 증손주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경술국치’라 하지 않고 ‘한일합방’이라 표현했다며 말꼬투리를 잡아 조리돌림을 하고 있다.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자신들은 대체 얼마나 엄격한 삶을 살아가길래 타인에게 이리도 엄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그 삶이 궁금할 지경이다. 이완용을 진료했다는 사실을 갖고도 공격을 한다. 의사가 사람 가려가면서 치료해야 하나? 변호사가 사람 가려가면서 변호해야 하나?
이러한 폭력의 뿌리에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비열한 진영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민족반역자이든 ‘빨갱이’이든 사기꾼이든, 내가 속한 진영의 허물은 철저히 덮어주고 상대 진영은 핏줄의 뿌리까지 파헤쳐 부수는 이 이중잣대야말로 가장 비열한 야만 행위다.
역사와 수많은 사상가들은 연좌제와 진영논리가 초래한 비극을 지속해서 증언하고 매섭게 경고해 왔다.
조선 시대 삼족을 멸하던 연좌제는 국가의 법적 정통성을 강화하기는커녕, 정적을 제거하고 사회 전체를 공포로 억누르는 폭정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연좌제로 사형당한 수많은 무고한 가족들의 피는 조선 정치를 끊임없는 복수의 순환으로 몰아넣었다.
자유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저서 ‘자유론’을 통해 사회적 다수의 침묵하는 광기와 여론의 폭력은 국가의 법적 압제보다 더 무섭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인격을 집단의 이념이나 연고로 판단하는 순간, 사회적 다수의 폭력이 개인의 자유를 짓밟게 된다는 경고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 역시 파벌과 진영의 광기는 정의를 마비시키고, 개인이 가진 본연의 가치 대신 선동의 구호를 따라 사람을 평가하게 만든다며 진영논리가 가져올 공화정의 파멸을 경고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행위로만 평가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인류 문명이 오랜 시간에 걸쳐 확립해 온 이성적 선언이다.
우리 역사는 이미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친족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지우는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1898년 독립협회 역시 ‘법이란 마땅히 죄를 지은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며, 무고한 처자식에게 죄를 넘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의 근본’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로부터 무려 130년이 지난 지금, 증손주뻘 후손에게 “네 증조부가 친일파냐, 빨갱이냐”라며 손가락질하고 미안해하라고 압박하는 모습은 야만 그 자체다.
“후손이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사과하는 건 연좌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치사한 변명은 집단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우리 헌법 제13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법조문이 아니라, 인류가 피 흘려 쟁취한 문명사회의 최소한 약속이자 가치다. 헌법은 그냥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은 선언문이 아니다. 지키며 살라고 만든 공동체의 약속이다.
권순욱 부국장 겸 정치부장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식당·섬유공장…일 잘하는 北여성 대기중” 러시아 인력업체 광고 등장
- 엄마 내려줬는데…마트 옥상 주차장서 12m 아래로 추락, ‘무면허’ 20대 숨져
- “멋진 삶 잘 살았어”…노숙인과 어르신 돌보던 50대 미용사, 장기 기증 후 떠나
- 빌라 2곳서 대마 ‘4600명분’ 키워 판 30대 사촌지간 구속
- “10% 생각 했는데”…모차르트 조각상 230점 중 210점 털렸다
- 만취승객 구토 위기에 “택시 불렀어요” 대로변 두고 떠난 Z세대 택시기사
- “정차하라” 경찰에 불응, 오토바이 도주 고교생…차량 들이받고 사망
- 대마초 피운 기장…145명 태우고 이륙 항공기 91m 상공서 ‘곤두박질’
- 성추행 폭로 후 삼촌 폭행에 흉기 든 조카…대법원 “정당행위”
- 러에 구금된 30대 美남성 풀려나…푸틴의 “트럼프 달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