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부터 걸어 오라니” “안전위해 어쩔수 없어” 아파트 단지 배달 갈등
라이더에 연락처 요구하고 “화물용 엘베 타라”
주민들은 “오토바이 사고 등 피하려면 불가피”

12일 낮 12시 서울 강남구의 A 아파트 정문.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차량 차단기 앞에 멈춰 섰다. 이 아파트는 단지 안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것을 제한한다. 배달 기사 최모(47)씨는 정문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주문자 집까지 걸어서 음식을 배달했다. 15분 만에 배달을 끝내고 오토바이로 돌아온 최씨 티셔츠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최씨는 “15분이면 다른 곳 두 군데는 더 배달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곧장 다음 배달지로 향했다.
배달 라이더들 사이에선 A 아파트처럼 오토바이 진입이 어려운 아파트를 수십곳을 표시한 지도도 공유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이 10곳으로 가장 많고, 서초구 서초동이 9곳으로 뒤를 잇는다.
배달 기사들은 이런 아파트에 배달할 때는 최씨처럼 오토바이를 단지 밖에 세우고 주문자가 사는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한다. 출입할 때 개인 정보를 요구하거나 입주민과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게 하는 곳도 있다. 지난 11일 밤 서초구의 B 아파트에 배달을 마치고 나온 이현빈(42)씨는 “경비원이 갑자기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해 당황했지만 배달 시간이 급해 따질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서초구 C 아파트는 배달 기사들에게 화물용 엘리베이터만 이용하게 한다. 배달 기사들이 여러 층을 누르는 경우가 많아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이유다.
이런 아파트에서 주문이 들어와도 배달 기사들은 “거부할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배달 플랫폼을 통해 들어오는 주문을 자주 거절하면 수입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배달의민족’은 배달 기사가 주문을 얼마나 많이 받아들이는지 등을 따져 5단계로 등급을 매긴다. 주문을 많이 수락해 상위 등급에 오르면 기본 운임에 최대 55%를 더 받을 수 있다. 안정적으로 주문을 배정받는 대신 들어오는 주문 10건 중 8건가량을 무조건 수락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배달 기사 진입 문턱을 높인 아파트 측도 할 말은 있다. 주민 사생활 보호 등 보안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오토바이 출입을 막는 A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은 “4년 전 오토바이가 아파트 경내에서 속도를 내다 주민과 접촉 사고를 낸 후로 진입을 전면 금지했다”고 했다. 신축 아파트의 경우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다니는 지상 통로가 드물기도 하다. 배달 기사 연락처를 받는 B아파트 관계자는 “배달 기사에게 공동 현관 출입 키를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했다.
아파트 주민의 안전과 배송 기사의 노동권이 충돌한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21년 서울 강동구에 있는 5000가구 규모의 한 아파트는 택배 차량 출입을 막으면서 ‘택배 대란’이 벌어진 일이 있다. 택배 기사들은 가구별 배송을 중단했고, 단지 입구에는 택배 상자 수백 개가 쌓였다. 지상에 주차장이나 도로 대신 산책로 등을 조성한 신축 아파트에서 이런 갈등이 자주 벌어진다.
반면 주민과 배송 기사가 비용과 불편을 나눠 갈등을 줄인 사례가 있다. 경기 남양주시 자연앤롯데캐슬은 택배 기사는 단지 입구까지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 단지 내 배송은 별도 인력을 고용해 맡겼다. 택배 기사가 받는 배송비 중 일부를 단지 내부 배송 인력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세종시 호려울마을의 한 아파트는 주민이 비용을 부담해 단지 배송용 전동 카트를 마련했다.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는 노인 일자리와 연계한 ‘실버 택배’를 도입했다. 택배 기사가 정해진 장소에 물건을 내려놓으면 노인 배송원이 각 가구까지 배달하도록 했다. 택배 기사들과 주민들이 협의해 택배 차량이 지상으로 다닐 수 있는 시간대를 운영하는 아파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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