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AI 에이전트가 결제하는 시대, 그리고 부산
AI, '대화형 도구'에서 '에이전트'로
목표를 세우고 작업도 스스로 척척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체제 필요
부산, 이미 국경 넘는 결제 일상화
새 시스템 실증, 도시 내에서 가능
금융 지형 변화에 부산도 뒤따라야

지난 3년 사이 인공지능(AI)은 실험실을 벗어나 일상과 산업 전반에 스며들었다. 챗GPT나 클로드 같은 대화형 AI가 문서를 요약하고 코드를 짜 주는 것은 이미 익숙하다. AI가 병원에서 영상 판독을 돕고, 법률·회계 사무소에서는 판례와 문서를 검토하며, 공장에서는 설비 이상 징후를 미리 잡아낸다. 최근 1~2년 새 AI 산업 무게 중심은 다시 한 번 이동하고 있다. 사람 질문에 답만 하는 도구형 AI에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일련의 작업을 스스로 수행하는 ‘AI 에이전트’(AI Agent)로 진화하고 있다.
AI 에이전트란 “이걸 해 줘”라고 지시하면, 정보를 찾고, 도구를 골라 쓰고, 다른 서비스와 통신하며 결과물을 만들어 낼 때까지 일련의 판단과 행동을 스스로 이어가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기존 AI는 “도쿄 여행 3박 4일 일정을 짜 줘”라고 하면 텍스트로 일정표를 만들어 준다. AI 에이전트는 여기에 더해 항공권을 검색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현지 교통 패스를 구매하며, 예약 상황이 바뀌면 대안도 찾아 낸다. 사람이 하던 여러 결정을 AI가 수행하는 것이다. 오픈AI, 구글, 아마존, 앤트로픽 같은 세계적 AI 기업들이 지난해부터 이 방향으로 자원을 집중하고 있고, 국내 통신사와 대형 IT 기업들도 에이전트형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AI 에이전트가 사람을 대신해 항공권을 예약하고 호텔 값을 치른다면, 그 결제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사람은 지갑을 열고 카드를 꺼내 번호를 입력하고, 문자로 온 인증번호를 다시 입력하며, ‘동의’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AI 에이전트에게는 지갑이 없다. 인증번호를 받을 휴대폰도 없고, 버튼을 누를 손가락도 없다. AI 에이전트끼리 데이터를 주고받거나, 잠깐 기능을 빌려 쓸 때는 소액을 순식간에 주고받아야 한다. 이런 결제는 현 결제 시스템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원화 같은 돈의 가치와 1 대 1로 연동되고, 인터넷에서 즉시 오가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다. 계좌 개설이나 별도 인증 없이도 프로그램이 스스로 주고받고, 아주 작은 금액도 부담 없이 이동시킨다. 24시간 국경과 상관없이 정산도 이뤄진다. AI 에이전트 결제 시대에는, 결제 문법 자체가 새로 쓰여질 수밖에 없다. 기존 카드망을 없애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옆에, AI 에이전트가 사용할 새 결제 인프라가 하나 더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흐름은 먼 미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미국 코인베이스가 AI 에이전트가 서로 결제할 수 있는 새 규격을 공개한 이래, 아마존은 자사 AI 개발 플랫폼에 이 결제망을 기본으로 얹었고, 비자와 구글은 표준을 다듬는 협력체에 참여하고 있다. 요컨대 AI 시대 결제 인프라의 세계적 표준이 골격을 잡아 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큰 흐름 속에 부산은 어디에 서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AI 에이전트 결제 인프라가, 사실은 부산이 가진 자산과 매우 잘 맞는다는 점이다. 부산은 국경을 넘나드는 결제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곳이다. 항만에선 국제 물류 대금이 매일 오가고, 남포동과 서면에는 외국인 관광객의 소액 결제가 이어지며, 조선·해운 산업의 국제 정산은 일상이다. 여기에 AI 에이전트가 얹혔을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방한 관광객의 AI 여행 도우미가 소액 결제를 자동으로 처리하고, 물류 회사 AI 에이전트가 항만 이용료와 창고료를 스스로 정산하며, 선박의 IoT 센서가 유류비와 도선료를 실시간 지불하는 풍경이다.
이 그림이 다른 도시보다 부산에 더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부산은 2019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새로운 금융 실증을 시도할 수 있는 제도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 둘째, 해양수산부와 HMM의 부산 이전으로 해양 금융 도시로의 무게 이동이 진행되고 있고, 그 위에 얹힐 디지털 결제 인프라 자리가 지금 비어 있다. 셋째, 부산은 관광, 항만, 조선, 물류라는 서로 다른 산업이 겹쳐 있는 드문 도시다. AI 에이전트 결제가 실증되려면 서로 다른 성격의 결제 유스케이스가 한 도시에서 동시에 검증돼야 하는데, 부산은 그 조건을 자연스럽게 갖추고 있다. 세계에 이런 조합을 한꺼번에 가진 도시는 많지 않다.
AI가 결제 주체가 되고,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기본 수단이 되며, 블록체인이 정산의 마지막 계층이 되는 새로운 금융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어느 통화로 결제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이, 국가와 도시 모두에 던져졌다. 그 흐름이 실물 경제와 만나는 첫 도시, 부산이 어떤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한국을 넘어 부산 미래도 크게 좌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