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노’보다 더 무서운 것

안종기 2026. 8. 12.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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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 청년들의 삶에는 이중의 황무지가 존재한다.

청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사회가 먼저 진심을 보여줘야 한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기득권을 일부 내려놓고, 청년에게 더 많은 기회와 안전망을 제공하며, 불평등한 노동시장과 자산구조를 실제로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

청년들이 "이 사회가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 살고자 한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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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안종기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오늘날 한국 사회 청년들의 삶에는 이중의 황무지가 존재한다. 한쪽은 부모의 자산과 사회적 배경에 따라 출발선이 결정적으로 갈리면서 노력만으로는 좀처럼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불평등의 황무지다. 다른 한쪽으로는 혐오와 조롱, 폄하와 배제의 언어가 별다른 여과 없이 일상과 놀이문화 속으로 스며든 소통의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최근 이 지면에서 걸그룹 리센느를 통해 첫 번째 현실을 이야기했다.<본지 2026년 7월3일자 16면 "'리센느' 열풍과 노동시장의 한국 청년" 참조> 대형 기획사의 자본이나 든든한 배경 없이 오랜 무명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들의 소탈함과 개성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의 모습에서 많은 청년이 작은 희망과 대리적 자기효능감을 발견하고 있다고 썼다.

그런 리센느의 리더 원이가 최근 뜻하지 않은 논란의 한가운데 섰다. 영상에서 사용한 "무섭노"라는 표현이 경상도 방언인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일부 극단적 온라인 문화의 말투인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한쪽에서는 혐오와 조롱의 언어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고, 다른 쪽에서는 거제 출신 청년의 자연스러운 사투리까지 정치적 잣대로 재단하고 낙인찍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이 사안을 놓고 현실 정치인들이 직접 참전할 만한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한다. 다만 내가 현실 정치인이었다면 단연코 그런 방식의 접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시간과 함께 거의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최근에 충주맨(김선태씨)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논란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이 글을 쓴다.

일상 된 혐오와 조롱의 언어, 기성세대 책임은 없는가

혐오의 역사와 결합된 표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책임이다. 특히 그것이 공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소통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논란을 한 젊은 연예인이 특정 표현을 알고 썼는지 몰랐는지를 심문하는 데서 끝낸다면,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그래서 더 먼저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왜 혐오와 조롱의 언어가 청소년과 청년들의 일상 속으로 이토록 깊이 들어왔는가? 유령처럼 떠도는 조롱의 밈과 극단적 배제의 언어는 때로는 세대를 관통하며 정확한 기원이나 의미조차 모른 채 재미있는 말투와 놀이처럼 반복된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희화화한 표현이 맥락을 잃은 채 복제되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은 '드립'이나 '밈'이라는 이름으로 가벼워진다.

이런 현상을 단지 요즘 청년들의 윤리의식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만 무책임하다. 혐오의 언어는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불평등과 좌절,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정,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자라난다. 누군가를 낮추고 조롱함으로써 잠시나마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고 느끼거나, 현실의 고통을 잊고 집단 안에서 소속감을 얻으려는 정서도 그 안에 작동한다.

특히 많은 청년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삶을 진정으로 걱정한다고 믿지 않는 것 같다. 청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일자리와 자산, 안정된 지위는 이미 가진 사람들이 놓지 않는다. 어떻게든 더 이어 나가려고 애를 쓴다. 공정과 정의,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지만 정작 비용과 희생을 감당해야 할 순간에는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대화하자면서도 결코 자신들의 몫은 양보하지 않으며 청년들에게 인내와 도덕을 요구한다. 청년들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고 해도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닌 것이 현실이다.

청년의 절망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나

"혐오하지 마라" "약자를 배려하라" "공동체를 생각하라"는 훈계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그들은 그것을 공동체의 진심 어린 요청이 아니라, 기성세대는 안전한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자신들만 붙잡아 두려는 또 하나의 도덕적 굴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청년들을 쉽게 꾸짖지 못하겠다. 혐오와 조롱의 언어를 철벽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런 언어가 자라날 토양을 함께 만들어 온 앞 세대로서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 공감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절망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그 점에서 일단 우리 교육은 무거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더 높은 점수와 더 좋은 대학, 더 유리한 직업을 얻는 방법을 집요하게 가르쳐 왔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법,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 갈등 속에서도 상대의 존엄을 지키는 법은 얼마나 가르쳤는가. 공감과 배려, 포용과 연대, 공공의 책임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생활 속에서 익히는 교육내용의 대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됐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고, 약자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성찰하는 '공존의 문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단언컨대 아무리 훌륭한 교육이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청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사회가 먼저 진심을 보여줘야 한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기득권을 일부 내려놓고, 청년에게 더 많은 기회와 안전망을 제공하며, 불평등한 노동시장과 자산구조를 실제로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와 주거, 교육과 사회보장의 부담을 다음 세대에 떠넘기지 않고, 필요하다면 더 가진 세대가 더 양보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청년들이 "이 사회가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 살고자 한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주고 나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진심으로 애쓰고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 사람은 비로소 공동체 전체를 생각할 여유를 얻는다. 배려를 받아본 사람이 배려할 가능성이 커지고, 존중받아본 사람이 타인의 존엄을 지키려 한다.

불평등한 현실 바꾸기, 어른이 책임져야

리센느를 향한 사람들의 응원에는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진 것 없는 작은 기획사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길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세상이 아직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청년들에게 우리가 돌려줘야 할 것은 낙인과 조리돌림도, 공허한 도덕적 훈계도 아니다. 잘못된 말에는 그 의미와 상처를 차분히 알려주고, 배울 기회를 줘야 한다. 동시에 청년들이 혐오와 조롱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도록,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는 데 어른들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무섭노"라는 한마디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실수를 찾아내 처벌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바로잡으며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청년들에게 공감과 배려를 요구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사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몫을 내어놓는 어른들의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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