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하려면 집에 돈 많아야 하나요?”···프랑스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예술이 노동이 되기 위해]

노정연 기자 2026. 8. 12.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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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프랑스 예술인 사회보장 현장을 가다
배고파야 예술가? 프랑스선 ‘창작 노동자’
프랑스 현지 예술가들이 말하는 ‘사회보장’
화가 등 ‘아르티스트 오퇴르’ 편입
건강보험·병가·육아수당 등 혜택
공연예술인은 ‘앵테르미탕’ 적용
1년 507시간 유급활동 증명하면
일 없는 시기에 실업급여 지급

“예술가도 노동자인가.”

한국에서는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다수 예술가들이 불규칙한 소득과 단기 계약, 무급·저임금 노동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이 때문에 무대나 작품 사이 소득이 끊기고 창작 활동이 멈추면 생계마저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예술인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창작 준비금 등 여러 지원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까다로운 증빙 절차와 높은 행정적 문턱 탓에 제도의 혜택에 다가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임세병 작가와, 첼리스트 유고 로사노, 피아니스트 이수진씨. 세 사람은 프랑스의 예술인 사회보장 제도가 예술인을 풍족하게 하지는 않지만 창작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노정연 기자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다른 길을 걸어왔다. 예술인의 작업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보편적 사회보장 시스템 안으로 편입해왔다. 공연예술인은 일정한 노동시간을 충족하면 공연이 없는 기간에도 실업보험의 보호를 받는 ‘앵테르미탕(intermittent du spectacle·공연예술 간헐적 근로자 제도)’이 적용된다. 회화와 문학, 사진 등 시각예술 창작자는 ‘아르티스트 오퇴르(artiste-auteur·독립 창작자)’로 등록해 사회보장 체계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 1930년대부터 구축돼 온 프랑스의 예술인 사회보장제도는 유럽에서도 주요한 모델로 꼽힌다.

경향신문은 예술인의 노동과 생계를 보편적 사회안전망 안에 어떻게 포괄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프랑스를 찾았다. 현장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같은 시스템이 예술가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창작 활동을 지탱하는지 들여다봤다.

결과보다 ‘연속성’으로 평가받는 예술인 자격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임세병 작가가 프랑스의 예술인 사회보장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정연 기자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가 세 명을 만났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회화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임세병 작가(39)는 시각예술가들을 위한 아르티스트 오퇴르 체계에 속해 있다. 피아니스트 이수진씨(39)와 프랑스인 첼리스트 유고 로사노(31) 부부는 공연예술인에게 적용되는 앵테르미탕 제도를 경험해 왔다.

2011년 프랑스로 유학 온 임 작가는 베르사유 미술학교에서 회화와 판화를 전공한 뒤 한국에서 4년간 작가 활동을 했다. 이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현재는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문화교류 회사에서 일하며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아르티스트 오퇴르(독립 창작가)”라고 소개했다. 공연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산정할 수 있는 공연예술인과 달리, 화가·작가·일러스트레이터·사진가 등 작품을 창작해 소득을 얻는 이들은 별도의 독립 창작자 체계에 속한다.

한국과 프랑스의 제도를 모두 경험한 임 작가는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로 예술인의 지위를 인정하고 유지하는 방식을 꼽았다. 한국이 활동 경력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프랑스는 창작 활동과 소득을 지속적으로 ‘신고’하는 데 무게를 둔다.

“한국에서는 예술인활동증명을 위해 일정 기간의 전시 경력이나 계약서, 포스터, 수입 증빙 등을 제출해야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사회보험료 징수 기관인 ‘유르사프’(URSSAF)에 등록한 뒤 소득과 활동을 신고해요. 한국에서는 ‘내가 예술가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감각이 강하다면, 프랑스에서는 ‘예술가로 활동하고 소득을 신고하며 그에 따른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는 감각이 강합니다.”

한국에 비해 예술인 자격을 인정받는 문턱은 낮다. 처음 등록할 때 작품성이나 경력을 평가하기보다 해당 예술 활동이 독립 창작자 영역에 속하는지 확인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이후 독립 창작자 지위를 얻으면 프랑스 사회보장 체계로 편입된다. 일반 직장인 수준의 보편 건강보험(Sécurité Sociale)과 유급 병가, 출산·육아 수당, 가족 수당 신청 자격도 생긴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회화작업과 글쓰기을 병행하고 있는 임세병 작가. 노정연 기자

임 작가는 2022년 프랑스에 재입국한 직후 급성 편도염으로 응급수술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 저는 정규직 회사원이 아니었고 독립 창작자로 프랑스 사회보장 체계에 연결돼 있었어요. 당시 기도가 심하게 부어올라 사설 구급차까지 이용했지만, 의료비 대부분이 보장됐고 제 실제 부담액은 20유로가 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해요. 갑작스러운 질병에 걸렸을 때 최소한 제도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다가왔죠. 예술인으로서 이 사회의 안전망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어요.”

창작 활동을 뒷받침하는 혜택도 있다. MDA(Maison des Artistes·예술가의 집) 회원 자격 등을 통해 미술 재료를 할인받고 문화시설을 이용할 때에도 혜택을 받는다.

“재료비를 덜어주는 것도 결국 창작을 계속하라는 의미잖아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내가 이 사회에서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구나’라는 안정감을 느끼죠.”

임 작가는 프랑스에서는 예술인 자격 취득의 장벽이 낮은 대신 ‘연속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작품이 팔리지 않은 기간에도 어떤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꾸준히 신고해야 자격이 유지된다. 예술인 지위를 오래 유지할수록 공공 작업실(아틀리에)이나 주거 지원을 신청할 때 우선순위가 높아지고 사회보험과 연금도 쌓인다.

물론 제도만으로 생계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각예술가에게는 공연예술인에게 적용되는 ‘앵테르미탕’처럼 매달 최소 소득을 보전해 주는 제도가 없다. 임 작가가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회사에 취업한 이유다. 임 작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꾸준한 신고를 통해 독립 창작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예술가로서의 경력과 사회보장 권리는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예술가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창작을 이어가게 하는 밑받침이 되어주죠.”

공연예술 생존 공백 메우는 ‘앵테르미탕’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이수진씨가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노정연 기자

시각예술가에게 아르티스트 오퇴르가 창작자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는 장치라면, 공연예술인에게는 앵테르미탕 제도가 있다. 프랑스는 음악가와 연주자, 배우, 무용수처럼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공연예술인의 고용 형태를 일반적인 상용직과 다르게 본다. 작품이 끝나면 계약이 종료되고 몇 달씩 공연이 없는 시기도 반복된다. 앵테르미탕은 고용과 실업을 오가는 공연예술 노동의 특성을 실업보험 체계 안에서 보완하는 제도다.

파리 근교 베르사유에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는 이수진씨는 “많은 사람들이 앵테르미탕을 프랑스의 예술인 복지제도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업보험 제도의 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공연이 없다고 해서 예술가의 노동이 멈추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는 시간은 계속되죠. 앵테르미탕은 공연이 없어 소득이 끊기는 기간을 사회보험 안에서 보호해주는 제도예요.”

앵테르미탕 자격을 얻으려면 최근 12개월 동안 507시간의 유급 공연예술 노동을 증명해야 한다. 기준을 충족한 뒤 프랑스 고용청인 ‘프랑스 트라바이’(France Travail)의 심사를 거쳐 자격이 인정되면 계약 사이 일을 하지 못하는 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지급액은 기존 임금과 근로 상황 등에 따라 개인별로 달라지는데, 일을 많이 한 기간에는 지원금이 줄고, 적게 한 기간에는 늘어나는 방식이다. 지원 금액은 개인별로 상이하나 월평균 1400유로(약 23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연주자들이 끊임없이 다음 무대를 찾아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공연이 없는 시기에도 소득이 완전히 끊기지 않는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했다. 당장의 생계 때문에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다음 무대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첼리스트 유고 로사노는 “앵테르미탕은 국가가 예술가에게 그냥 주는 공짜 돈이 아니라, 우리가 일했을 때 적립한 가치를 비시즌에 나누어 받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일종의 반(半)실업 상태에서 예술가가 길거리로 나앉거나 노숙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는 것이다.

혜택과 의무를 함께 나누는 ‘연대’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인 첼리스트 유고 로사노가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노정연 기자

앵테르미탕을 지탱하는 핵심은 ‘사회보험’과 ‘연대’다. 공연예술인을 고용하는 기획자나 단체는 임금 외에도 적지 않은 비용의 사회보험료를 부담하고 예술가들 역시 수입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낸다. 이렇게 모인 재원은 사회보험 체계 안에서 위험을 분담하는 데 쓰인다.

유고는 자신이 앵테르미탕 수급 요건을 채우지 못하는 시기에도 공연 계약은 반드시 정식으로 체결해 달라고 고용주에게 요구한다. 자신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더라도 고용주가 납부한 사회보험료가 다른 예술인의 사회보장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고는 “예술노동자 전체가 서로를 지탱하는 공동체적 조합에 가깝다”며 “이같은 구조가 예술가들로 하여금 혜택을 누리는 것만이 아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심어준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예술인 사회보장 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507시간’의 문턱과 복잡한 행정 절차, 정규직 고용을 회피하려는 고용주들의 편법, 줄어드는 문화예산, 공공 작업실 공급 부족 등 한계와 그늘이 존재한다. 임 작가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촘촘해 보이는 프랑스의 예술인 사회보장제도가 정작 그 안에 들어온 예술가에게는 상당한 ‘행정 문해력’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예술인으로 등록했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회보험과 세금, 건강보험, 연금, 직업훈련 등을 담당하는 기관과 제도를 이해하고 각각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해요. 좋은 제도이지만 이에 접근하려면 예술가 스스로 ‘준행정가’가 돼야 합니다.”

앵테르미탕 역시 공연예술가의 삶을 완전히 보장하지는 않는다. 매년 다시 507시간을 채워야 하는 만큼 프리랜서 음악가들은 다음 해에도 자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상당수 음악가는 음악원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연주를 병행한다. 이수진과 유고 부부도 마찬가지다.

유고는 “앵테르미탕이 공연예술가들에게 완전한 보호막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면서도 “프랑스 정부가 오케스트라에 지원하는 돈을 점점 줄이고 있기 때문에 앵테르미탕이 없다면 프랑스 음악 생태계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임세병 작가와, 첼리스트 유고 로사노, 피아니스트 이수진씨가 인터뷰가 끝난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노정연 기자

세 사람 모두 “프랑스에서도 예술가의 삶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예술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인식과 보장 체계가 예술가로서 자존감과 직업적 정체성을 지탱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예술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돈은 어떻게 버세요?’ 아니면 ‘집에 돈이 많으신가 봐요’라고 물어요. 예술가를 부유한 사람 아니면 가난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많죠. 프랑스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대신 ‘무슨 그림을 그리세요?’ ‘무슨 주제로 작업하세요?’라고 묻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질문들이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지켜줍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창작을 이어가는 원동력에 대해 유고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꼽았다.

“앵테르미탕이나 사회보장 제도도 영향을 주죠. 당장 빵 사 먹을 돈조차 없다면 누군들 예술을 계속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예술가로 살아가기는 열정 없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 예술가가 말한 프랑스의 ‘안전망’은 창작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예술가를 공동체가 보호한다는 사회적 약속에 가까웠다. 생존을 열정에만 맡기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가들이 프랑스를 떠나지 않은 이유였다.

파리 |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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