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대전환기…'실업 없는 성장' 그리는 싱가포르[동남아시아 TODAY]

2026. 8. 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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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일명 '인공지능(AI) 전환과 실업 없는 성장'(AI Transition with No Jobless Growth) 실천으로 향후 진행될 AI 대전환과 노동 기회 재구성에 대한 싱가포르 사회의 최소한의 합의 사항 및 향후 전개 방향을 큰 틀에서 설정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싱가포르 특유의 계획국가적 성격과 노동시장 관리 체계가 AI 전환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구조상 이러한 급진적 재분배 모델이 현실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제 싱가포르 같은 대표적 친기업 시장 중심 국가조차 AI 시대의 핵심 문제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과 초과이익의 사회적 분배 문제(직접 분배냐 역량 강화를 위한 기반 마련이냐)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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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싱가포르 시내 전경. (뉴스1DB) ⓒ 로이터=뉴스1

지난 5월 5~6일 싱가포르 의회는 디지털 전환기 싱가포르의 미래를 결정지을 매우 중요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 정부 관계 부처인 인력부 장관, 국가 노동조합인 NTUC 사무총장, 여당인 인민행동당 의원들, 야당인 노동자당 의원들이 모두 모여 양 일간에 걸쳐 오랫동안 토론한 끝에 도출한 결의안이다. 일명 '인공지능(AI) 전환과 실업 없는 성장'(AI Transition with No Jobless Growth) 실천으로 향후 진행될 AI 대전환과 노동 기회 재구성에 대한 싱가포르 사회의 최소한의 합의 사항 및 향후 전개 방향을 큰 틀에서 설정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의가 단순히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 정책 차원에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싱가포르 정치 엘리트들은 AI를 국가 생존과 사회 안정, 그리고 중산층 유지라는 구조적 문제와 연결해서 접근하고 있었다. 즉 AI가 가져올 생산성 혁신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대규모 구조적 실업과 중산층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 역시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싱가포르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결국 '실업 없는 성장'이었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일자리는 사라지고, 생산성은 향상하지만 사회적 안정성은 약화하는 상황을 국가적으로 용인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해당 실천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결의된 내용은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AI와 디지털 기술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국가적 흐름이기에 싱가포르의 미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AI 전환 과정에서 경제 성장의 혜택은 특정 기업과 자본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자와 기업이 함께 전환의 과실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AI 시대에도 양질의 일자리 유지와 노동 이동을 국가가 적극 관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넷째, AI 도입의 궁극적 방향은 인간 노동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자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 방안 역시 상당히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특히 AI 시대에 필요한 직무 자체를 국가가 지속해서 모니터링하고, 산업별로 노동력을 재배치하겠다는 방향성이 강하게 드러났다. 싱가포르 특유의 계획국가적 성격과 노동시장 관리 체계가 AI 전환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번 토론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 축은 정부 및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의 입장과 야당인 노동자당(WP)의 입장 차이였는데, 이는 흔히 AI 전환과 노동 시장의 재구성을 논의할 때 드러나는 양극단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로 보였다.

정부, 여당, NTUC 측은 AI를 필수적 국가 전략으로 규정하면서도 핵심은 노동자 개인의 역량 강화(empowerment)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력부 장관 탄 씨렁(Tan See Leng)은 싱가포르 노동자는 기술 변화에 따라 없어질 피해자가 아니라 적응할 수 있는 존재이며, 중요한 것은 보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량 강화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NTUC의 응 치멍(Ng Chee Meng) 역시 "근로자를 대체하는 AI(AI instead of workers)가 아니라 근로자를 위해 일하는 AI(AI working for workers)"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AI와 노동의 공존을 강조했다.

이들 논리의 핵심은 결국 싱가포르 국가 모델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 경쟁은 피할 수 없고, AI 역시 피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국가와 노동자 모두 끊임없이 적응하고 재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자당의 논의는 훨씬 구조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안드레 로우(Andre Low)는 AI 시대 핵심 문제를 기술 변화보다 자동화(automation)로의 갈림길로 설명한다. 즉 AI가 인간 노동을 보조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기업 중심의 시장 논리는 결국 인간 노동 자체를 제거하는 자동화 방향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 입장에서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것보다 AI로 대체하는 편이 비용적으로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현재 글로벌 기업 환경에서 생성형 AI는 단순 반복 노동뿐 아니라 문서 작성, 분석, 고객 대응, 행정 업무 등 기존 화이트칼라 업무 자체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당의 다른 연사인 제럴드 지암(Gerald Giam)의 주장은 더 급진적이었다. 그는 AI 시대의 핵심 문제를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 따른 분배 문제로 접근한다. 특히 AI로 인해 발생하는 초과 이익(super gains)을 사회적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를 위해 대기업 법인세 추가 인상(2% 인상), 국가 AI 형평성 기금(National AI Equity Fund) 설립, 사회배당금(social dividend) 지급, 재교육 기간 중 임금 지원 등을 제안했다.

사실 노동자당의 이러한 주장은 싱가포르 정치 및 사회, 경제 구조에서는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제안이기는 하다. 싱가포르는 기본적으로 외자 기업과 글로벌 자본의 유입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이고, 극단적으로 낮은 세율과 기업 친화 정책을 통해 국가 생존 전략을 짜 온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회 토론 과정에서도 정부 측은 이러한 접근이 지나친 비관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기업 투자 환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실 지암 의원 등이 주장한 방식은 싱가포르 국가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싱가포르는 외국계 기업과 글로벌 자본이 빠져나가는 순간 국가 경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도시국가이기에 AI 시대라고 해서 급격한 재분배 정책으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싱가포르 내부에서도 그런 식이면 외국 기업들이 떠난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정부 및 여당 측 논의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력부 장관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처럼 이것이 단순히 노동자 개인의 역량 강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현재 싱가포르 정부가 리스킬링, 업스킬링 등을 강조하며 노동자 개인의 역량 강화만을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인 듯하지만, 모든 부담을 노동자 개개인에게 부과하는 정책은 아닐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재교육과 기술 적응은 중요하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변화는 단순 자동화 이상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특히 사무직과 전문직 업무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산업 전환과는 결이 다를 가능성이 크다. 싱가포르 정부 역시 이 점을 알기에 '실업 없는 성장'을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뉴스1 윤주희 디자이너

결국 핵심 문제는 구조적 실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의 문제다. 특정 개인이 게으르거나 기술이 부족해서 실업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가 인간 노동 수요를 줄이는 상황이 올 경우 기존의 재교육 모델만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특히 이번 논의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AI 시대 가장 위협받는 계층으로 PMET(전문가·관리자·임원·기술자)가 반복적으로 언급됐다는 점이다. 이전 산업혁명에서 기계의 등장과 자동화의 영향으로 블루칼라 노동자의 대체가 핵심 이슈였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중산층 화이트칼라 노동이 직접적인 위험군으로 지목됐다.

이는 싱가포르 사회 구조상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싱가포르는 20% 정도의 제조업 기반에 금융, 행정, 물류, 서비스, 기술, 전문직이 중산계층으로 자리 잡은 도시국가이기에 PMET 계층은 국가 경제와 사회 안정의 핵심 축이다. 실제 논의에서 싱가포르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 노동 인력 가운데 60%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고 나왔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바로 이 PMET 영역의 반복적이고 분석적인 업무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문서 작성, 보고서 정리, 데이터 분석, 고객 대응, 법률 검토, 행정 처리 등 기존의 초급 및 중간 화이트칼라 업무 상당수가 이미 AI와 경쟁 관계에 들어간 상태다. 노동자당이 청년층이 첫 커리어 사다리 자체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초급 사무직을 거치며 경험을 축적하고 중간관리층으로 성장하는 경로가 존재했지만, AI 시대에는 그 시작점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싱가포르 의회의 AI 논쟁은 단순한 기술 정책 논의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AI 시대 싱가포르 국가 모델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생존 전략 논의에 가까웠다. AI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AI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경우 사회 안정과 중산층 구조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딜레마 속에서 싱가포르 사회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또한 여야 모두 공통의 근본 전제는 바로 AI 전환이 진행될수록 특정 거대 기술기업과 자본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초과이익을 가져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성형 AI 발전의 방향성은 소수 글로벌 기업으로 자본과 영향력이 급속히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싱가포르 의회 역시 이러한 흐름 자체는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이는 그 이후인데,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초과이익 구조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기보다 글로벌 자본과 기업을 계속 싱가포르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국가 생존 전략 속에서 노동자 개인의 재교육과 역량 강화, AI와 인간 노동의 공존을 통해 문제를 완화하려 했다.

반면 노동자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생산된 막대한 부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제럴드 지암 등이 제기한 사회배당금, 형평성 기금 등의 논리는 결국 AI 시대에는 기존의 임금 노동 중심 분배 구조만으로 사회 안정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사실 싱가포르라는 국가의 구조상 이러한 급진적 재분배 모델이 현실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제 싱가포르 같은 대표적 친기업 시장 중심 국가조차 AI 시대의 핵심 문제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과 초과이익의 사회적 분배 문제(직접 분배냐 역량 강화를 위한 기반 마련이냐)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싱가포르 정치 엘리트들의 핵심사고는 생존이다. 다만 그 생존의 방식이 이제는 글로벌화나 외자 유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은 향후 싱가포르 사회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이를 지켜보는 주변 국가들의 중요한 참고 케이스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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