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아야' 구제되는 피해자들… 형소법 유감, 부디 행운을 빕니다 [기자의 눈]

이유지 2026. 8. 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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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8월, 기자에게 '세종시 여중생 집단성학대 사건' 피해자 정연수(가명)씨가 던진 의문이다. 연수씨는 중학생 때 잔혹한 성범죄를 겪고 수년 뒤 용기 내 고소했지만, 경찰에선 '운 나쁘게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 불송치로 사건이 묻힐 뻔했으나, '운 좋게도' 검사 재수사로 1년 5개월 만에 기소돼 결국 가해자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몇 사건들이 전체적인 수사와 기소 분리 원칙을 흐트러뜨릴 명분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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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 진단 늘 같지만 처방 항상 빗나가
피해자 "운 좋아야 구제되는 제도 정상이냐"
"그런 몇 사건 때문에" 개혁 주도 인사의 말
'그런 몇 사건' 억울함 없게 하는 게 검찰 일
文 '수사지휘권', 李 '보완수사권' 폐지 반복
'정치검찰' 사라졌나… 범죄 피해자들 '울분'
국회 본회의에서 지난달 31일 이뤄진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표결 결과. 국회 영상회의록 캡처

"피해자 운이 좋아야 문제가 해결되는 이 제도 자체가 정말 잘못된 것 아닌가요?"

1년 전 8월, 기자에게 '세종시 여중생 집단성학대 사건' 피해자 정연수(가명)씨가 던진 의문이다. 연수씨는 중학생 때 잔혹한 성범죄를 겪고 수년 뒤 용기 내 고소했지만, 경찰에선 '운 나쁘게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 불송치로 사건이 묻힐 뻔했으나, '운 좋게도' 검사 재수사로 1년 5개월 만에 기소돼 결국 가해자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연수씨는 총 8번이나 조사를 반복해 받으며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런 몇 사건들이 전체적인 수사와 기소 분리 원칙을 흐트러뜨릴 명분이 되는가."

올해 2월, 기자가 '검찰개혁'에 앞장선 한 여권 국회의원에게 성폭력 등 민생범죄에서의 초동 수사 오류 피해 등 검사 직접 보완수사 폐지 부작용 우려를 표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당시 그는 "그런 예외적인 사건들은 잘할 수 있게 다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검사의 보완수사, 불송치 재수사를 대신해 만들어진 장치는 '경찰 1개월 내 보완수사' '보완수사 요구 횟수 무제한' '제대로 안 될 시 다른 기관에 요구' '법정 증거로 쓸 수 없는 사실관계 확인' 등이다.


'국민을 위한 검찰개혁'에 울분하는 피해자들

범죄 피해자 및 관계자들이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피해자 없는 검찰개혁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기자회견에서 손피켓을 들고 피해자 권리강화를 위한 검찰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연수씨 건을 비롯해 부산 돌려차기, 광주 여고생 살해 등은 '그런 몇 사건'이다. 당초 검찰 제도는 '그런 몇 사건'을 법률가가 한 번 더 제대로 꼼꼼하게 들여다보라고 만들어졌다. 1차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고문,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 공정성 훼손 등에 제동을 걸도록 한 것이다. 꾸며진 기록만 보고 사건 실체를 파악하거나, 수사관이 스스로 내린 결론을 바꾸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직접 수사권이 주어졌다.

'그런 몇 사건' 피해자들은 개정 형사소송법이 결국 1차 수사기관 통제를 약화해 국민 보호를 강화하지 못하는 건 물론, 사건 핑퐁에 끼어들 기관만 더 늘어날 것이라고 호소한다. '다른 장치'로 추가한 '7대 범죄 전건송치'도 범위가 제한돼 총체적으로 살필 수 없고, 기록만 보고 판단해야 하는 문제점은 매한가지다. 개정 법 195조 2항엔 '검사는 국민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라는 선언이 삽입됐지만, 정작 이를 구현할 196조가 통째로 지워져버렸다.


진단 같은데, 처방 늘 엉뚱한 '검찰개혁'

문무일(맨 오른쪽) 전 검찰총장이 2018년 1월 서울 동작구 현충원을 찾아 검찰 수뇌부와 참배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이듬해인 2019년 6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차기 검찰총장 후보자로 윤석열 전 대통령(왼쪽 끝·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내정하게 된다. 연합뉴스

시민을 위해 부여된 검사의 권한이 왜곡돼 쓰이는 건 분명한 병폐다. 문제는 검찰개혁 의제만 등장하면 진단과 다른 처방이 나온다는 데 있다. 진단은 바뀐 적이 없다. '정치검찰'.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재임 시절 기자간담회에서 관련 질의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손에 잡고 흔들며 물었다. "무엇이 흔들리나. 옷이 흔들린다. 흔드는 것은 어디인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총장 인사를 하기도 전에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히며 검찰에 메시지를 던졌다.

권력 입맛에 따라 수사·기소하거나, 권력이 되길 자처하는 검사들을 도려낼 필요성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나 처방은 늘 엉뚱했다. 2021년 문재인 정권은 '수사지휘권'을 없애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탄생시켰다. 2022년 윤석열 정권은 시행령으로 '검사 직접수사 개시 범죄'를 되레 확대했다. 2026년 이재명 정권은 '검사 보완수사권'을 폐지하고, 곧 '중대범죄수사청'을 출범시킨다. '수사·기소 일원화' 특별검사는 6개째로 역대 정권 중 가장 많고,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산하다. 손엔 검찰 대신 새 옷이 쥐어졌다. 이 옷은 흔들리지 않을까.


노무현의 숙제? 제물이 된 건 무엇인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들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은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진에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씨가 2일 "지옥에나 가세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김 의원 인스타그램 캡처

개혁의 명분으로 호명된 것들은 연일 신문을 도배한 '대장동 개발비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등 정치권력 관련 특별수사들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재명 대통령 등에 대한 몇 사건. 그러나 99%의 형사사건은 이름을 가진 적이 없다. 기관 간 책임 떠넘기기와 사건 지연 일상화를 부른 수사지휘권 폐지, 1차 수사기관의 미비·오류 또는 조작·은폐 교차 검증을 약화하는 보완수사권 삭제로 삶이 달라지는 쪽은 후자다.

여당 일부는 "내주신 숙제를 끝냈다"며 개정 형소법을 노 전 대통령 묘에 바쳤다. 정작 그의 유족인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인의 뜻과 다르다, 국민의 고통이 눈에 보인다"며 반대했다. 약자의 편에 섰던 노 전 대통령 앞에 바쳐진 제물은 무엇인가. 도려내야 하는 환부는 이름을 바꿨고, 피해자는 제도 그 자체로 보호받지 못하고 수사관과 검사 등 각 주체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개정 형소법을 읽어보지 않았다"는 이 대통령이 지금은 법을 완독했을까.

연수씨의 1년 전 질문에 대해 '걱정 말라'는 답을 해주지 못한 채, 새로운 제도에 적응해야 할 피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7일 "안타깝지만 저처럼 혼자 수사기관에 찾아가지 말고, 돈을 모아서 꼭 변호사를 선임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 제도를 둘러싼 모든 우려가 정녕 기우이길, 설계자들의 뜻대로 잘 운영되길 바란다. 아울러 억울함을 풀어나가야 하는 범죄 피해자들에게도 부디 행운이 따르길 빈다.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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