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거계곡에 또 '갈 거' 같다 [흠뻑 특집_물 진안 갈거계곡 르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운장산과 복두봉이 두 팔 벌려 안은 곳에선 갈거계곡이 태어나 흐른다.
복두봉에서 갈거계곡 끝 휴양림까지는 완만한 임도길이다. 운장산 동쪽의 갈거계곡부터 복두봉 거쳐 북쪽의 운일암반일암 계곡까지 꼬불꼬불 임도가 이어진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전북 진안 복두봉(1,017m) 깊은 산골에는 천황사라는 절이 있다. 지금은 전각 대여섯 채 남짓한 작은 절이지만, 한때는 스님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대찰이었다. 천황사 스님들은 진안에서 콩을 사오다 무거워서 '무거마을'에서 쉬고, '갈거마을'에서 맷돌에 갈고, '조포마을'에서 고운 베에 싸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지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알려진 이름이 '갈거'다. 갈거마을에서 2km 정도 올라가면 아는 사람만 안다는 '갈거계곡'이 있어서다. 인제 방태산 아침가리계곡처럼 첨벙첨벙 물길을 거닐 수 있으면서도 인적은 드문 곳, 물살에 둥글어진 자갈들로 물수제비를 뜨고 1급수 버들치가 발등을 스쳐 가는 곳. 갈거계곡으로 떠난다.
그러나 물놀이만 하기엔 먼 길 달려 온 보람이 적다. 언제 또 이곳에 와볼 수 있을까. 5년 후? 10년 후? 어쩌면 다시는 못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려 본다. 산길을 따라 복두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시원한 물길을 따라 원점으로 내려오기로. 땀 뻘뻘 흘린 뒤 온몸으로 맞이하는 계곡물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우리라. 건국대산악부OB 김윤정씨가 함께한다.

복두봉은 진안고원에서 가장 높은 운장산(1,126m)과 아홉 개의 기암으로 이뤄진 구봉산(1,002m) 사이에 있다. 이름난 두 명산의 그늘에 가려 '봉'으로 격하되어 불리지만, 찾는 이가 적은 덕분에 국립공원이 아님에도 21세기까지 개발되지 않은 채 청정 계곡을 간직할 수 있었다. 관광명소로 개발된 운장산 북쪽의 운일암반일암 계곡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2026년 8월 기준 운일암반일암 계곡의 네이버지도 리뷰는 757개인 반면 갈거계곡은 5개뿐이다. 두 계곡 간 직선거리는 10km도 채 되지 않는다.
답은 이미 알려줬다. '등산로 아님. 통행금지'
갈거계곡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본 것은 운장산자연휴양림이다. 휴양림은 갈거계곡 하류를 끼고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휴양림 직원에게 복두봉 정상까지 다녀오겠다고 하자, "길이 희미하니 조심하라"고 일러 준다. 인터넷을 뒤져도 참고할 만한 정보는 6년 전 산행기가 전부다. 거기에도 "이용하는 등산객이 적어 길이 자꾸만 묵어간다"고 나와 있다. 그만큼 휴양림~복두봉 구간 산길은 사람이 길을 내는 속도보다 풀이 덮는 속도가 빠른 곳이다.

직원의 예언은 시작부터 적중했다. 앞장서 당당하게 걷던 발걸음은 턱밑까지 무성하게 자란 산죽 앞에서 한순간 얼음이 되었다. 짐승 길이라도 나 있으면 좋으련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이 지나간 흔적 따위는 없다. 무자비하게 자란 산죽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선 우리를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다. 앞으로 가라고 마음은 시키는데 몸은 요지부동이다.
산죽 자체가 껄끄러운 건 아니다. 산죽이 제한하는 시야와 그것이 일으키는 헛된 상상력이 두려움을 키울 뿐이다. 빛이 들지 않는 심해를 바라볼 때의 공포처럼, 산죽 사이로 벌어진 틈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른 아침, 습기와 어둠을 머금은 산죽은 께름칙했다.
과연 누가 '퍼스트펭귄'이 되어 이 거친 숲을 헤쳐 나갈 것인가.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숨넘어가기 직전의 환자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내듯, 사라지기 직전의 길을 찾아낸 사람은 등산 30년차 사진기자였다.
산죽지대를 통과해 능선에 올라타자 '등산로 아님. 통행금지'라고 쓴 이정표가 우리가 가려는 복두봉 방향을 가리킨다. 산림청 및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따르면 합법 등산로다. 다만 휴양림 측에서 안전 차원에서 이정표를 세운 듯하다. 그래도 한동안은 희미한 선을 그리며 등산로가 이어진다. 인위적인 등산로라기보다는 들짐승도 함께 이용하는 오솔길에 가깝다. 짐승들의 고속도로라도 되는 듯, 스틱으로 콕콕 찌르면 자국이 남을 만큼 신선한 똥들이 100~200m마다 나타난다. 흙바닥의 현란한 발자국을 보아하니 멧돼지 가족이 한바탕 놀고 간 모양이다.
짐승의 흔적만큼이나 사람 무덤도 자주 나타난다. 누가 이 높은 곳까지 조상을 모셨을까. 정성이 갸륵한 건지, 지나치게 오지에 방치한 건 아닌지 분간이 안 선다. 봉긋해야 할 봉분들은 하나같이 파묘된 채 움집처럼 땅이 푹 꺼져 있다. 밤중에 혼자 이 길을 걸었거나, 텐트를 쳤는데 알고 보니 그 자리가 묫자리였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말았을 것이다.

사라질 듯 말 듯, 끊어질 듯 말 듯, 희미한 산길이 도깨비불처럼 멀리 달아난다. 엄마 손 놓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가 되어 허둥지둥 뒤를 쫓는다. 그런데 묘한 재미가 있다. 섬세한 감각이 판단을 내리는 대로 길을 찾는 과정 말이다. 온종일 노출된 전자파와 정보의 홍수에서 벗어나, 평소에도 이런 감각 훈련을 한다면 치매 예방에도 좋을 것 같다. 평소 도심 근교 산을 다니다가 오랜만에 오지를 찾으니, 세포 속 잠들어 있던 야생의 감각과 조우한다.
칼바위와 1대3 대치, 결국 우리가 이겼다
바위가 앞길을 막아섰다. 바위 왼쪽에 얇은 로프가 매달려 있다. 바위를 넘으려면 왼쪽으로 우회하는 수밖에 없다. 발아래는 낭떠러지. 디딜 곳은 마땅치 않고, 힘주면 파스스 부서지는 암질이라 어느 한 곳에 체중을 싣기 조심스럽다. 움직일 때마다 무거운 배낭이 원심력을 더해 몸을 통제하기 어렵다. 스틱을 접어 배낭 옆주머니에 꽂고, 스파이더맨 자세로 바위에 달라붙는다.
"우르르쾅!"
뒤따라오던 김윤정씨가 갑자기 사라졌다. 붙잡고 있던 바위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엉덩방아에 그쳐 천만다행이다. 자칫하면 저 아래 갈거계곡까지 굴러갈 뻔했다. "여행자보험 가입하라"던 선배의 말이 귓전을 스쳤다. 골절 시 최대 10만 원까지만 보장되는 '기본형'으로 가입한 걸 후회했다. "길이 희미하다"던 휴양림 직원의 말과 '등산로 아님. 통행금지'라는 이정표도 떠올랐다.

얼마 못 가 이번엔 더 거대한 칼바위가 나타난다. 선택지는 3개. 바위를 타고 넘거나, 왼쪽으로 우회하거나, 오른쪽으로 우회하거나. 조금 전의 아찔한 상황 때문에 바위를 뜯기가 겁이 난다. 사진기자가 먼저 칼바위 위로 올라가 앞길을 살피지만, 그 끝에 길이 이어져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막다른 절벽이 나타난다면 바위 위에 고립될 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슬부슬 비까지 내린다.
오른쪽 우회로는 절벽이라 포기하고 왼쪽 우회로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러나 길은 능선과 영원히 멀어지며 끝도 없이 계곡으로 내려간다. 결국 바위를 올라타는 것만이 정답이다. 가랑이 사이에 바윗등을 끼우다시피 하며 조심조심 오른다. 다행히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허비한 시간은 가치 있었다.
구봉산에서 복두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합류하면 산길은 한층 편해진다. 끝없는 잡목과 된비알과의 사투에 지친 나머지, 복두봉에 닿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까톡, 까톡" 알림도 울린다. 주능선에 진입하고 나서야 휴대폰 통신이 희미하게 터진다. 아침에 먹은 고열량 김밥과 컵라면은 소화된 지 오래,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는다. 김윤정씨가 손목에 찬 워치를 보여 준다. 1,000칼로리를 소모했다고 나온다.
복두봉까지 3시간을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6시간이 걸렸다. 주변 지형을 알리는 표지판은 번개를 맞은 듯 녹슬어 있고, 운장산 방향으로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그곳에 앉아 바라본 운장산은 위압적이지 않다. 지리산, 덕유산처럼 흔히 말하는 '어머니의 품' 같다. 운장산과 복두봉이 두 팔 벌려 안은 곳에선 갈거계곡이 태어나 흐른다. 두 산에 내린 비는 모두 갈거계곡으로 모일 것이다.
복두봉은 '두건 복'에 '머리 두'자를 쓴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두건을 쓰고 구봉산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상석이 있는 바위에 올라서자, 뒤편에 숨어 있던 구봉산과 함께 예년에 비해 강수량이 적어 하얀 속살을 드러낸 용담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갈거계곡을 비롯해 운장산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들은 대부분 이 용담호로 모여든다. 2001년 완공된 용담호는 진안군의 1개 읍 5개 면을 수몰시켜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호수는 운장산 밑을 관통하는 도수터널을 거쳐 완주군 고산면 만경강 상류로 흘러든다. 전주권역의 생활용수 해결을 위해서다. 어쩌면 갈거계곡의 물도 운장산 너머 만경강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물안경·스노클·오리발 다 챙겨 왔는데…
복두봉에서 갈거계곡 끝 휴양림까지는 완만한 임도길이다. 운장산 동쪽의 갈거계곡부터 복두봉 거쳐 북쪽의 운일암반일암 계곡까지 꼬불꼬불 임도가 이어진다. 하산길을 단축하고자 복두봉에서 지름길로 빠져 임도 중간에 바로 내려서기로 한다.

길은 어느새 끊기더니 하얀 자작나무숲이 나타난다. 바닥에는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 나무들의 자연사인가 싶어 놀랄 뻔 했는데, 매끈한 단면을 보니 벌목된 듯하다. 이어 사람 다니는 길이라곤 보이지 않는 풀숲이 앞길을 막는다. 개척 산행이다. 풀숲을 헤치던 김윤정씨가 말한다.
"허브향이 나요!"
정말로 풀숲을 헤치면 시원하고 알싸한 허브향이 번졌다. 몸은 풀숲에 잠겼다. 보이지 않는 돌과 나무를 헛디뎌 발목이 꺾이기 일쑤다. 휴대폰 GPS도 먹통이 돼 방향만 가늠하고 전진한다. 200m, 100m, 50m… 마침내 햇살이 쏟아지며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 옆으로는 물이 흐른다. 최상류인데도 졸졸졸 물소리가 난다. 갈거계곡에는 스님들이 콩을 갈던 맷돌도, 갈거葛巨의 한자표기처럼 칡덩굴도 없다. 두 바퀴 자국 따라서 임도만 나 있을 뿐이다. 물이 가득 담긴 해기소沼에 이르러 등산화를 벗고 아쿠아샌들로 갈아 신는다. 크기는 생각보다 작았으나 깊이는 으스스할 정도다.


"퐁당"
물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다. 지하수가 유입돼 물이 차다. 지하수 평균 온도는 15℃ 안팎. 36.5℃인 체온과 20℃ 이상 차이가 나니까 체감 온도는 얼음물인 셈이다. 땀 쏟으며 복두봉을 오를 때만 해도 당장에 온몸을 던지고 싶었으나 막상 입수하려니 주저된다. 잠수를 위해 준비해 온 스노클은 꺼낼 엄두가 안 난다. 연약한 온혈동물인 인간은 결국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만 담구는 것으로 만족하고,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서 자맥질하기로 한다.

휴양림에 가까워지자 계곡은 좀 더 친절해진다. 수심이 얕아진다. 햇살도 비춘다. 자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손가락만 한 버들치들이 커브를 도는 스포츠카처럼 빠르게 쏘다닌다. 잘그락잘그락. 스틱으로 균형을 잡고 자갈의 감촉을 음미하며 걷는다. 아, 언제 또 이런 감촉을 느껴볼 수 있으려나. 일 년이나 더 기다려야겠지.
계곡은 여름을 통과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갈거계곡, 아무래도 여름에 또 '갈 거' 같다.
안전하게 계곡 즐기기· 자갈에 살갗 쓸릴 수 있으니, 샌들 안에 양말 착용
·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으니, 등산스틱 이용해 사족보행
· 넘어지면 쫄딱 젖으니, 휴대폰과 귀중품은 가방 안쪽에
깨끗하게 계곡 즐기기· 어차피 지워질 화장과 썬크림… 하루쯤은 '생얼'로
· 자갈 들쑤시거나 흙탕물 일으키지 않기
· 코 풀고 침 뱉지 않기
개구지게 계곡 즐기기· 물안경·스노클·튜브·물총과 함께 동심 챙기기
· 자두·복숭아·토마토 등 과일을 씻어 먹기
· 아무리 차가워도 용기 내 가슴까지 풍덩 담그기. 심장마비 주의!

산행길잡이
결론부터 말하면 휴양림에서 복두봉 구간 등산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길은 희미하고 수풀이 우거져 있다. 암릉 구간은 위험하며, 휴대폰 통신이 터지지 않는다. 반면 조망은 거의 없다.
네이버지도와 카카오지도 상의 출발점이 아닌, 산림문화휴양관이 들머리다. 작은 목교를 지나 산죽 숲을 헤치고 능선에 합류하면 '등산로 아님. 통행금지'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칼바위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중간에 로프를 잡고 건너야 하는 바위 구간이 있다. 칼바위 왼쪽으로 우회로가 있지만 얼마 못 가 끊기므로, 칼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
주능선과 합류하면 길은 한층 편해져서 복두봉까지 속도가 붙는다. 복두봉에서 임도를 따라 갈거계곡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중간에 지름길로 빠질 수도 있다. 지름길로 빠지면 묘를 지나서부터 우거진 수풀을 개척해야 하는데, 상당히 피곤하다. 그냥 임도를 타고 내려오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복두봉부터 휴양림까지는 갈거계곡을 따라 쭉 임도가 이어진다. 임도에서 계곡으로 내려가기엔 꽤 깊다. 중간의 해기소 구간이나 휴양림 근처 하류 부분에서 계곡 트레킹을 하기 좋다.
교통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고속버스가 1일 2회(10시, 15시) 운행한다. 진안읍내에서 운장산자연휴양림까지 택시로 약 20분 소요된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고, 계곡 트레킹까지 겸할 경우 짐이 많으므로 자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서울에서 진안까지 차로 약 3시간 소요된다.
숙박
운장산자연휴양림에서 갈거계곡을 즐기기에도 충분하다. 계곡에 발 담그며 휴양할 수 있다. 샴푸와 수건이 없는 등 환경 보호 차원에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지만, 다양한 형태의 숙박동과 야영장이 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