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골로 간 28세 셰프… 세계 1위 눈앞 식당 대신 이곳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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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 셰프죠. 신문기자 출신이자 식당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장준우 셰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너머에서 묵묵히 요리 철학을 지키고 있는 셰프들을 만납니다.
이곳의 주방을 책임지는 정예진 셰프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거나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지 않는다.
정 셰프와 요리의 인연은 열네 살 때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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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예미헌' 정예진 셰프
편집자주
음식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 셰프죠. 신문기자 출신이자 식당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장준우 셰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너머에서 묵묵히 요리 철학을 지키고 있는 셰프들을 만납니다. 한국 미식계의 최신 이슈와 셰프들의 특별 레시피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외식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미식의 자본과 시선은 대도시 중심부로 쏠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식 문화가 단단한 나라들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일부러 발걸음을 옮겨야만 갈 수 있는 지방의 외진 곳에 이른바 '목적지형 레스토랑'이 굳건히 서 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이 그랬고, 자연주의 미식을 꽃피운 북유럽의 숲과 해안이 그랬다. 고유한 떼루아를 품은 식당 하나가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면, 땅을 일구는 주변의 농부와 어부, 소박한 골목 식당들까지 함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으며 거대한 미식 생태계를 형성한다.
먼 나라 이야기 같았던 풍경이 한국에서도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강원 평창군 진부역에서 차로 굽이진 산길을 한참 올라야 닿는 해발 870m 고지대. 라이나전성기재단이 운영하는 한옥 스테이 '바랑재'에 한식 다이닝 '예미헌'이 자리 잡고 있다. 정식 오픈한 지 불과 두 달이 채 안 됐지만,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변변한 시장 하나 없고 한겨울 눈보라가 치면 차량 진입조차 통제되는 이 척박한 고립의 공간에서, 한 젊은 셰프가 놀라운 한식을 선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예미헌을 찾았다.


스페인 유학과 정관 스님 사사로 배운 손맛
이곳의 주방을 책임지는 정예진 셰프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거나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의 음식에는 억지로 멋을 부리거나 유행하는 셰프들의 흥행 공식을 흉내 낸 흔적이 전혀 없다. 직업상 수많은 다이닝을 접해 왔지만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음 방문이 이토록 애타게 기다려지는 경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원숙하고 깊이 있는 맛을 보여주는 그의 요리를 맛보고 나니, 그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정 셰프와 요리의 인연은 열네 살 때부터 시작됐다. 외식업에 종사하던 부모님 덕분에 주방과 친숙했던 그는 중학생 때 우연히 참가한 지역 떡볶이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요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해 요리의 기본기를 다진 그는 졸업 후 돌연 스페인으로 향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스페인의 미식 문화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스페인 미식의 심장으로 불리는 바스크컬리너리센터(BCC)에서 요리뿐만 아니라 외식 경영과 식문화 전반을 4년간 두루 배운 그는, 음식을 하면 할수록 한국적인 맛과 마주하게 됐다. 마드리드 아토차역에 내려 처음 맛본 구운 돼지 목살 요리에서 한국의 갈비찜 맛을 느꼈고, 숯불에 새까맣게 태워 구운 칼솟을 로메스코 소스에 찍어 먹는 장면을 보며 격식 없는 직관적인 요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복잡한 기교를 부리기보다 재료의 뉘앙스를 거침없이 끌어내는 스페인 요리의 문법은 그가 한식과 양식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식재료 본연에 집중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유럽에 정착하려던 그의 계획은 팬데믹으로 잠시 좌절됐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넷플릭스의 미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한 정관 스님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용기를 내 연락을 취했고, 기적처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정관 스님이 기거하는 백양사 천진암에 2년여 동안 머물며 식재료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부터 다시 배워나갔다. 스님을 따라 세계 곳곳의 행사를 다니며 보고 느낀 것은 요리사의 진정한 자질이었다.
"스님에게는 고정된 레시피가 없었어요. 해외에 나가서도 꼭 필요한 양념만 챙기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구해 요리하셨죠. 간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감각, 낯선 시장에서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최적의 재료를 사는 법, 그리고 매일 변하는 자연의 조건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법을 스님께 온전히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7살에 파인다이닝 총괄셰프… 맛으로 자격 증명

절에서 나올 무렵, 그의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세계 1위 자리를 눈앞에 둔 스페인의 유명 레스토랑에서의 제안, 조건과 미래가 보장된 국내 대형 식품기업의 스카우트, 그리고 이 인적 드문 강원도 산속이었다.
"앞의 두 곳은 요리사 개인의 이익이나 세속적인 욕망이 큰 곳이었어요. 그런데 바랑재는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요리를 할 거라면 이왕이면 가치 있는 일을 하자 싶었죠."
애초에 이곳에 파인다이닝은 계획에도 없었다. 소외계층과 돌봄 노동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이 주목적이었던 바랑재 공간을 둘러보던 중, 찻집으로 쓰려던 위층을 두고 재단 측에서 음식을 해보라고 권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주방의 기틀을 새로 다지고 시스템을 구축한 그는 지난해 스물일곱의 나이에 파인다이닝의 총괄셰프 직함을 달았다.
"저조차도 이 나이에 이 직함이 맞나 싶었어요. 응원해 주시는 분도 많지만,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거 아니냐고 보시는 분도 많으니까요." 자신의 자격을 끊임없이 묻고 타인의 의심을 견뎌야 했지만, 그는 묵묵히 접시 위에서 스스로를 증명해 냈다.
강원 지역 특색 담은 재료 본연의 맛 강조


강원도의 것으로 식탁을 채우는 걸 목표로 한 예미헌의 다이닝 코스는 고정돼 있지 않다. 정 셰프는 매주 진부, 봉평, 주문진의 5일장을 직접 누비며 그날그날 수급된 최상의 식재료로 메뉴를 정한다. 극심한 일교차를 묵묵히 견뎌낸 고랭지 채소들은 평지의 것과 달리 조직이 매우 치밀하고 그 향이 짙게 응축돼 있다. 정 셰프는 "이 재료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를 가장 먼저 살피고 조리법의 가지를 쳐 나간다"며, 화려한 분자 테크닉이나 불필요한 장식 대신 강원도 특유의 삼삼한 간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직관적으로 살려내는 데 집중한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혹독한 겨울 탓에 발효와 저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강원도 고유의 식문화는 정 셰프에겐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만이 가진 무기다. 극한의 배고픔 속에서 배추를 숯불에 구워 먹던 화전민의 역사 등 점점 사라져 가는 강원도 식문화의 오랜 서사를 다이닝으로 풀어내는 것도 그에겐 즐거운 숙제다.
그가 바랑재에 합류한 직후 직접 빚어 2년 가까이 평창의 햇빛과 바람에 숙성시킨 장은 예미헌 요리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뼈대다. 이 장을 활용해 된장에 무친 곤달비나물, 간장에 눅진하게 재운 문어, 고추장으로 맛을 낸 주악이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는 깊은 감칠맛을 낸다. 스페인의 식문화를 재해석한 총알오징어 순대나, 평창 한우 떡갈비 아래 곁들인 숯불 배추 구이는 직관적인 불의 사용과 친숙한 발효 조미료가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다. 분명히 한식이지만 스페인적 요소들이 위트로 새어나온다.


정 셰프는 자신의 역할을 "생산자의 삶을 접시 위에 표현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새벽 시장 노인의 굽은 등과 척박한 밭에서 구슬땀을 흘린 농부의 노고를 잊지 않고 지역의 떼루아를 오롯이 전달하려는 그의 진정성 있는 태도는 접시마다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지만 그는 벌써부터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눈이 겹겹이 쌓이고 고립이 일상이 될 이 척박한 산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요리를 펼쳐 나갈지 지금부터 치열하게 고민 중이다. 스물여덟 살 젊은 셰프가 묵묵히 차려낼 다음 계절 접시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레시피] 비단조개죽
<재료> *3~4인분 기준
강릉 비단조개 500g, 정수물 1L, 영양부추 50g, 철원 오대산 유기농 쌀 100g, 다진 파 1/2T, 집간장 1/2t, 식용유 1t
<만드는 법>
1. 쌀은 깨끗이 맑은 물이 나오도록 씻어준 뒤, 물에 한 시간가량 불려준다.
2. 불린 멥쌀은 입자 있게 칼로 다져준 뒤, 물에 씻어 체에 밭쳐 물기를 빼준다.
3. 비단조개는 해감을 한 뒤 씻어주고 냄비에 넣어준다. 정수물 1L를 넣고 낮은 온도에서 익혀준다.
4. 조개들이 익으며 입이 벌어지면 꺼내서 조갯살을 발라주고, 알맹이만 남도록 손질해 육수에 부어둔다.
5. 영양부추는 1㎝ 길이로 썰어준 뒤, 약불에서 끓는 육수에서 살짝만 익혀 꺼내둔다.
6.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대파를 넣고 향이 솔솔 올라오도록 중불에서 볶아준다.
7. 파향이 올라오면 체에 밭쳐 준비한 쌀을 넣고 쌀알이 투명해지도록 볶아준다.
8. 쌀알이 다 볶아지면 비단조개 육수를 쌀 대비 5배 양을 넣고 끓여준다.
9. 쌀알이 다 퍼지고 죽이 끓여지면 간을 보고 집간장을 넣어 감칠맛을 올려준다.
10. 그릇에 죽을 담고 준비한 영양부추와 비단조갯살을 올려 마무리해 준다.
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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