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해서라도 공부하고 싶었던 그때 [언니야 보고싶다]

주성희 기자 2026. 8. 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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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보도 '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는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서 일하고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을 찾고 그들의 10대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한일여자고등학교는 건실하게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지만, 8만 9000여 평을 채웠던 한일합섬은 이제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여실고와 한일합섬을 다니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고, 성숙언니야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울었다. ※이 시절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언니야들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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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 (5) 박성숙 언니야
한일여실고 불합격했는데 부모에게 거짓말
“공부 더 열심히 할 걸 하면서 울며 지냈다”
학교 생활 시작하고선 내 세상인 듯 즐겁게
60대에도 여전히 열정을 갖고 지내고 있어
중학생 손주에게 할머니 살아온 여정 들려주고파
한일여실고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 고등학생인 박성숙 언니야. /박성숙

기획 보도 '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는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서 일하고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을 찾고 그들의 10대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한일여자고등학교는 건실하게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지만, 8만 9000여 평을 채웠던 한일합섬은 이제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일하고 울고 웃었던 이들의 기억이라면 지역사, 노동사, 산업사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풍부한 자원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이번 편은 남해에서 온 박성숙(62) 언니야 이야기를 풀었다. 성숙 언니야는 한일여실고를 다니기까지 우여곡절을 꽤 겪었다. 언니야는 자기 얘기를 손주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공부하고 싶어 울고, 공부할 수 없어 울고

남해군 서면 출신인 박성숙 언니야는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 박성숙 언니야에게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가슴찌르는 얘기를 했다. 입학 원서를 써주지 않으려 그랬던 건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얼굴을 본다"고 했다. 키도 크고 힘도 세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위축됐고 상처받았다.

성숙 언니야는 하교도 않고 교실에 남아서 울었다. 담임 선생님은 성숙 언니야가 한일여실고 시험에 무조건 떨어질거라면서 원서를 써줬다. 실제로 학교에서 10명이 지원했는데 2명만 붙었다. 시험에 떨어졌는데도 한일여실고에 가고 싶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가정에서 허락받는 일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공부를 그만하라고 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일하고 있으니 가서 살림을 살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부산에 가기 싫다고 실랑이하는 중에 우체부가 편지 한 통을 갖고 왔다. 한일여실고에는 불합격했지만,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엄마, 나 한일여실고에 붙었어요." 어머니는 한글을 읽을 줄 모르셨다. 학교에 붙었다고 하니 어쩌겠나. 그렇게 거짓말을 조금 보태 남해에서 마산으로 갔다.

남해 친구랑 같이 1979년 2월 13일에 입사했다. 마음 비빌 곳은 있었지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한일합섬에만 다녀야 했던 1년 동안 '진작 공부 열심히 할 걸' 하면서 울었다. 성숙언니야만 울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는 언제나 눈물바다였다. 한일여실고와 한일합섬을 다니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고, 성숙언니야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울었다. 그럴 때 하모니카를 불면서 자기를 달랬다.

거짓말이 들통날 뻔한 적도 있었다. 11월쯤 다음 해 입학 원서를 내야 했다. 그때는 한일합섬에 다니고 있으니 다시 시험을 치르진 않았다. 다만 부모님 동의가 필요했다. 동의서가 고향으로 배송됐다. 봉투를 먼저 열어 본 아버지는 "뭐 이런 게 날아왔노? 입학을 이미 했는데?"라고 말했다. 성숙언니야는 자기를 위한 거짓말을 한 번 더 했다. 어쩌다가 퇴학처리가 돼서 다시 입학하게 됐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성숙언니야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겠다 싶다. 그만큼 공부가 하고 싶었는가보다하면서 눈감아준 게 아닐까.

그때는 어머니가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 것 같아 힘들었는데, 요즘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시울만 붉어진다.

입학하니 내 세상이네
박성숙 언니야가 친구들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 언니야는 흥이 많았단다. /박성숙

묵직한 인상에선 유추할 수 없지만, 언니야는 흥이 많단다. 소풍을 가면 모두 앞에 서서 장기자랑을 했다. 합창부 활동도 하고 반 대표로 오락부장을 맡았다. 3학년 때 장기자랑에서 민요 '옹헤야'를 부를 때 담임선생님을 주제로 개사해서 노래했더니 교사도 학생도 웃느라고 난리가 났었단다. 활동적이고 활발해서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많았고, 교사들에게는 이쁨을 받았다.

교사에게는 큰 신뢰를 얻었던지, 학생들에게 주는 상장,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게 됐다. 글씨가 고왔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성숙언니야가 잘 한다면서 곽에 든 우유를 챙겨주곤 했다.

그토록 바라던 학교에 가서 그런지 성숙언니야는 뭐든 열심히 했다. 한일여실고 교정을 가꿨다는 자부심이 있다. 전국 팔도에서 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팔도 잔디'가 대표적이다. 논두렁이나 야산에서 야생 잔디를 채취해서 언 땅을 깨서 심었다. 또 화단관리위원회에 속해서 꽃 씨앗을 파종하고 물 주는 일을 했다.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에 팔도잔디가 시들기 직전이었다. 교대 근무가 끝나고 등교하기 전인 오전 6시에 짬을 내서 팔도잔디에 물을 주고 되살아나게 했다. 참 기분이 좋았다. 일찍 학교로 와서 화단을 가꾸고 있으면 등교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성숙이 수고한다. 고생한다"면서 한 마디 씩 칭찬했다. 칭찬에 인색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학교에 와서 칭찬다운 칭찬을 들어봤다. 성숙언니야 내면에 있던 열정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수석 졸업 꿈꾼 야무진 언니야
용마산 공원에서 현충일 기념식 때 한일여실고 합창부가 가서 노래를 불렀다. 이 안에 박성숙 언니야도 있다. /박성숙

공장에서 하는 일은 쉬웠다. 방적과에서 일했는데 양털이나 면(목화)을 전방에서 실을 뽑아 냈다. 언니야는 후방에 있었다. 실을 합치는 공정인 합사가 있고, 합한 실을 꼬는 작업을 연사라고 불렀다. 합사해서 나오는 실을 수레에 실어 조달하는 일도 했다. 기계가 잘 돌아가면 여유롭고 시간이 많았다. 한 기계에 실타래 120개가 돌아가는 데 문제가 생기면 기계가 머리를 치켜 올리듯이 올라갔다. 그러면 성숙 언니야가 뛰어가서 실을 연결하고 기계가 다시 돌아가도록 했다. 워낙 기계 만지는 일을 좋아했고, 손이 야무져서 작업은 힘들지 않았다.

그 곳에 있었던 일 중에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부모님이 성숙언니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식에도 안 오고, 중학교 졸업식에도 오질 않았다. 한일여실고를 수석 졸업해 자랑스럽게 부모님을 모시고 싶었다.

그땐 기숙사에서 나와서 양덕초등학교와 양덕중앙시장 사이에 있는 동네에서 자취하던 때였다. 마산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공부시키면서 말이다. 집은 한일합섬하고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날은 야간작업이라 오후 10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동생이 먹을 도시락 반찬을 준비해 놓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잠깐 졸았다. 일어나 보니 오전 2시였다. 수석 졸업을 하려면 교과목 공부만 열심히 해선 안 됐다. 영어에서 만점 받아 2400여 명 중에 6등을 했지만, 공장에서 현장 평가를 잘 받아야 수석 졸업을 노릴 수 있었다.

그동안 현장 평가를 잘 받으려고 조장이 제일 힘든 기계에서 일하라고 해도 거뜬히 해냈다. 기계가 돌아가는 와중에 작은 종이에 암기할 내용을 적어 틈틈이 공부도 했다. 딱 한 번 늦잠자는 실수를 했다. 눈을 뜨자마자 회사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11월이라 기온이 낮은데도 땀을 뻘뻘 흘렸다. 빨리 달려서인지, 식겁한 나머지 식은땀이 난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경비실에 들어갔더니 너무 늦어서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성숙 언니야는 결근보다는 지각이 낫다고 생각해서 들여보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겨우 들어간 공장에서는 파트 조장이 지각한 벌로 현장을 10바퀴 돌도록 했다. 울면서 10바퀴를 돌고 평소 잘 지냈던 성격이 어진 계장에게 가서 실습 점수를 잘 달라고 몇 번이나 빌었다. 결국 실습 점수는 C를 받았다. 성숙언니야는 수학과 과학 과목 때문에 수석 졸업을 못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11월 어느 날 새벽에 회사로 달려가던 자기 모습을 잊지는 못했다.
박성숙 언니야가 창원시 진해구 한 카페 앞에서 인터뷰 후 밝은 미소로 사진을 찍고 있다. /주성희 기자

배움과 열정 그 속에서

1983년 2월에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7회 졸업생이 됐다. 한일합섬에서 더 일하고 싶었는데 주간으로 일 할 수 없고, 3교대를 해야 한대서 그만뒀다. 시계를 만드는 씨티즌으로 갔다. 주간으로 일하고 잔업까지 하면 오후 8시 30분에 마쳤다. 오후 9시에 반찬거리를 사와서 동생이 아침에 가져갈 도시락을 준비했다. 풍로 위에 밥을 얹혀두고 오후 10시부터 11시, 다음 날 오전 4시부터 5시까지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때는 라디오로 수업을 들어서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 했다. 전산통계학 공부를 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서 2학년 때쯤 그만뒀다.

1989년에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다시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학과에 다녔는데 남편 반대가 심해서 중단했다.

공부하려고 했던 순간에 부모님과 남편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줬으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 언니야는 "형부가 대학에 꼭 가라고 지지해 줬다. 공부에 갈망은 있었지만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다면 공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래서인지 부모와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다"라고 말했다.
박성숙 언니야는 아마추어 볼링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2인조 볼링대회에서 수상하고 찍은 기념사진. /박성숙

성숙언니야는 내면의 열정을 가만두지 않았다. 1997년에 스트레스를 푸는 돌파구로 볼링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처음에 진해 덕산에 있는 성원볼링장에 있는 주부교실을 등록했다. 경남여성볼링대회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마추어 선수로 나서게 됐다. 이후 시장기 대회, 협회장 대회 등 각종 단체전과 개인전에 선수로서 또 시니어 부문에서 경상남도 대표로 나서서 활동하고 있다.

성숙언니야는 요즘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 올해 10월에 일본에서 있을 시니어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이때 우승도 중요하지만, 현지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해보고 싶다. 서툴지만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인터뷰가 마무리 될 때 쯤에서야 성숙언니야는 자기가 '언니야 보고 싶다' 인터뷰에 나선 이유를 말했다.

"중학생이 된 손주가 있다. 손주에게 할머니가 열심히 살아온 얘기를 하고 싶었다."

/주성희 기자

※이 시절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언니야들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 분은 주성희 기자(010-9211-4818·hear@idomin.com)에게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