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온기 지펴주는 사람이고 싶다”
● 20년 된 청바지와 은발이 말해 주는 ‘사람 박인희’의 취향
● 본래 꿈은 연극배우, ‘뚜아에무아’ 데뷔는 뜻하지 않은 길
● 무명 시절 박건호가 작사하고 박인희가 작곡한 ‘모닥불’
● 직접 낭송한 자작시 ‘얼굴’의 대상은 단짝 친구 이해인
● 미국에서도 이어진 방송인의 삶, 내면 채운 소중한 시간
● “잊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대에 다시 서게 한 원동력”
● 우리는 언제나 청춘, 그 따스한 온기 잃지 않길 바라

1970~80년대 캠프파이어를 한가운데 두고 모여 앉으면 어김없이 '떼창' 하던 노래 '모닥불'의 가사 일부다.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한국 포크 음악의 황금기를 이끈 싱어송라이터이자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애칭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가수 박인희(80·본명 박춘호)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품에 안은 통기타 한 대, 그리고 가슴을 조용히 파고들던 청아한 목소리. 1970년대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온 이들에게 그녀는 단순한 스타가 아닌, 영혼을 울리는 따스한 위로 그 자체였다.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인희는 서울봉래초와 풍문여자중·고교를 나와 숙명여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그녀의 꿈은 연극배우였다. 그러다 1969년 가수 이필원과 국내 최초의 혼성 포크 듀엣 '뚜아에무아(Toi et Moi·너와 나)'를 결성하며 뜻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 1970년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 특유의 청아한 음색과 이지적인 분위기는 단숨에 대학가를 사로잡았다.

세월 비켜간 아름다움의 비밀
박인희의 목소리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시대의 아픔과 청춘의 고독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힘이 있었다. 1981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대중이 끊임없이 그녀를 찾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2016년 35년 만에 가수로 복귀해 전국 각지를 돌며 펼친 콘서트도, 2024년 연세대 대강당에서 벌인 두 차례의 공연도 모두 삽시간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정도로 그녀의 티켓파워는 시대를 초월한다. KBS 음악 다큐멘터리 '백투더뮤직'을 비롯해 최근 그녀가 출연한 여러 프로그램도 방송이 나가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삶이 편리해질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살아 있는 전설'을 여름 한복판,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녀가 시간의 저편에서 소환한 추억과 인생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전한다.
염색하지 않은 은발이 잘 어울린다. 젊었을 때도, 지금도 패션 감각이 남달라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드뮤어 룩(demure look)' 아닌가,
"트렌드를 의식하고 고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20대 때나 노년인 지금이나 차림새에는 큰 변화가 없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스타일이 딱 내 지향점이다. 매 시즌 유행하는 디자인이나 색감이 무엇인지는 눈여겨보지만, 그걸 무작정 따라가기보다는 '요즘은 이렇구나' 참고만 할 뿐 눈치 보지 않고 내 스타일대로 입는다. 오늘 입고 나온 이 청바지도 사실 20년이 훌쩍 넘은 옷이다. 유행을 좇지 않고 내게 가장 편안한 옷을 입는 것, 그것이 가장 나다운 스타일을 완성하는 비결이 아닐까 한다."
패션을 완벽하게 받쳐주는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는 비결도 궁금하다.
"특별히 다이어트를 하지는 않는다. 그냥 먹고 싶은 만큼 잘 먹고 스트레스 안 받으며 편하게 지내는데, 다행히 몸무게나 옷 사이즈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매력적인 목소리(성대)는 어떻게 관리한 건가.
"관리하는 것은 전혀 없다. 지금 내는 목소리와 어조가 평소 가정이나 일상에서 편하게 말할 때의 말투 그대로다. 높낮이나 말투 모두 자연스러운 본연의 호흡을 유지하지, 일부러 꾸며 내지 않는다."
실례가 안 된다면, 베일에 싸여 있던 가족관계도 알려줄 수 있나.
"서른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들 한 명을 두고 있다. 가수인 나로 인해 가족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사생활 노출을 자제해 왔다."
지금 거주하는 집이 과거 미국으로 떠나기 전, 여의도 개발 초창기에 마련해 둔 아파트라고 들었다. 처분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궁금하다.
"내 성격이 사람이든 일이든 한번 인연이 닿으면 쉽게 바꾸거나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그랬더니 세월이 흘러 감사하게도 이 아파트 단지만 리모델링(재건축)이 됐더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변해 있어서 참 신기하고 감사했다(웃음)."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과거 활동할 때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가장 낯설게 느껴진 점은 뭔가.
"주거 환경부터가 완전히 달라졌다. 주변에 새로운 고층 건물이 너무 많이 들어서서 처음엔 조금 낯설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건,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보고 싶어도 아주 못 보게 된 분들도 있고, 연락이 두절된 지인이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내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연락처를 사람들과 많이 공유하지 않는 편이다 보니, 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던 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방송이나 콘서트로 노출되니까 옛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무척 반가워해 준다."
최근 출연한 방송마다 오랜 공백이 무색할 만큼 반응이 뜨겁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개인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팬들이 가슴속에 온전히 품고 있던 '순수한 감수성' 덕분인 것 같다. 내 노래들이 그분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투영하는 매개체로 작용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빛바래지 않고 그때의 감성이 다시 연결된 것 같다."
소환된 추억, 그리고 다시 선 무대
무대 위에서 객석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나."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무대에서 객석을 보면, 관객이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청춘 시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 있는 게 보인다. 그 아련하고도 맑은 눈빛을 마주할 때면, 내가 노래했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팀 해체 이후에는 가수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더 활발히 활동한 것 같은데.
"맞다. 팀 해체 이후 동아방송(DBS)에서 팝송 전문 '3시의 다이얼' DJ를 시작했고, 기독교방송(CBS), MBC FM 개국 멤버로 DJ 활동을 이어갔다. KBS에서는 주부층을 겨냥한 '안녕하세요 박인희예요' MC를 맡기도 했다. 뚜아에무아 시절은 1년뿐이지만, 그 이후의 삶은 온전히 '방송인'으로 살았다. 그때는 매니저나 소속사 시스템도 없을 때여서 방송국에서 살다시피 했다."
방송인으로 지내다가 1972년, 다시 솔로 가수로 앨범을 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내가 방송만 하고 있으니까 여러 레코드사나 기획사, 작곡가분들이 찾아와 노래를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노래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거절하고 방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아방송국으로 한 아마추어 청년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뚜아에무아의 팬이었다면서 직접 글을 쓰고 작곡한 곡들을 들고 왔다. 그 청년이 바로 나중에 '아! 대한민국' '잊혀진 계절' 등을 만든 작사가 박건호 씨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 청년이었는데, 그가 가져온 시에 내가 곡을 붙여 탄생한 노래가 바로 '모닥불'이다. 그 노래가 발표되고 나서도 나는 방송인으로만 남고 싶었다. 그런데 박건호 씨가 내 앨범을 들고 레코드사마다 다니며 나를 설득했고, 결국 지구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게 됐다. 그때 내가 내건 조건은 '방송활동이나 신곡 홍보는 하지 않고, 오직 레코드실에서 녹음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신곡이 나오면 가수가 직접 앨범을 들고 PD들을 찾아다니며 홍보하는 게 관례였는데, 나는 연예인 기질도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 절차가 너무 싫었다. 다행히 레코드사에서 내 조건을 수락해 꾸준히 DJ와 MC 활동을 하면서 앨범 녹음 작업만 진행했다. 그래서 내가 TV에 나와 노래하는 영상 자료가 거의 없다(웃음)."
애초에 노래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직업 가수로 나서는 것을 꺼린 이유가 있을 텐데.
"데뷔할 때부터 나는 가수를 열망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에는 연극을 하고 싶었고, 순수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를 꿈꿨다. 부모님의 반대로 그 꿈을 누르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숙명여대 재학 시절 방송극연구회 회장을 맡게 됐고, 그 인연으로 우연히 어떤 행사에서 사회를 봤다. 그때 관객들이 '사회자도 노래 한 곡 하라'고 요청해 정말 뜻하지 않게 노래를 한 곡 불렀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필원 씨의 눈에 띄어 준비도 없이 뚜아에무아로 데뷔하게 된 거다. 내 뜻과 달리 시작한 길이었기에, 팀 해체 후에는 '젊은 날 좋아하는 노래를 앨범으로 몇 장 남겼으니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접어두자'고 생각했다. 더 유명해지거나 히트곡을 내야겠다는 욕심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선을 긋고 방송인을 내 길로 여겼다."
채워지지 않은 여백에 담은 진심
미국에 있을 때도 한인방송국에서 일하며 방송인으로 지냈다고 들었다."미국으로 건너간 뒤에 아주 오랫동안 대중의 시선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완전히 마이크를 내려놓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 현지 한인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면서 방송인으로서의 삶을 묵묵히 이어갔다. 한국에서 화려한 대중가수로 주목받으며 겪었던 번잡함을 내려놓고, 온전히 내가 애착을 가졌던 라디오방송 일에만 몰두하면서 내면적으로 스스로를 평온하게 채워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시 가수로 마이크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있을 것 같다.
"미국으로 간 뒤에도 1년에 한 번씩은 조용히 한국에 들어와 지인들만 잠깐 만나고 가곤 했다. 그러다 2024년 6월과 9월에 연세대에서 콘서트를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내 노래를 기억하면서 나를 기다려준 팬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내 노래가 누군가의 삶에 여전히 따스한 위로가 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를 다시 무대로 이끌었고, 마침내 정식 귀국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직접 부른 노래, 직접 쓴 시가 젊은 세대에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더 부각되는 아날로그 감성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다림과 여백이다. 요즘처럼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세상과 달리, 그 시절에는 편지 한 장을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시간 속에 깊은 낭만이 있었다.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있었기에 그 사이에 진심을 담을 수 있었고, 그것이 음악과 시를 통해 순수한 위로로 전달된 게 아닐까 한다."
뚜아에무아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그 시절 음악에 열중하며 청춘을 보낸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나.
"사실 1969년 이필원 씨를 만나 연습을 시작하고 '뚜아에무아'로 활발하게 활동한 기간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방송 출연보다는 오로지 음악 자체가 좋아서 조용히 연습실에 박혀 LP 녹음 작업에만 몰두했었다. 단 1년 동안 독집 음반을 네 장이나 낼 정도로 오직 노래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은 시기다. 이필원 씨와는 팀 해체 이후 연락이 끊겼다. 특별한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비록 짧은 활동이었지만, 그 시절 음악에만 순수하게 몰두한 청춘 박인희의 모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굵고 보람찬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국내 최초로 '시 낭송 앨범'을 히트시키며 대중음악에 문학을 입혔다. 당시 노래뿐만 아니라 시(詩)에 그토록 빠져 있던 이유가 뭔가.
"대학 시절 순수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를 꿈꿨다.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대학에서 방송극연구회 회장을 맡으며 텍스트가 가진 문학적 힘과 목소리의 오라(aura)에 늘 매료돼 있었다. 내게 '시'는 노래의 연장선이자, 멜로디라는 틀에 다 담지 못한 인간의 깊은 고독과 사색을 가장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였다. 대중에게 화려한 가수로 다가가기보다, 한 편의 시처럼 잔잔한 울림을 주는 존재이고 싶었던 내면의 소망이 시 낭송 앨범으로 발현된 것이다."
‘영혼의 단짝' 이해인과 60년 넘게 이어진 '편지 우정'
시 낭송 하면 그가 친구 이해인 수녀를 생각하며 쓴 자작시 '얼굴'을 빼놓을 수 없다.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온 밤 내 비가 내리고/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그녀가 직접 낭송해 유명해진 이 시는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아 당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등과 함께 '세계명시선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때 방송에서 이 시를 시인 박인환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하자, 이해인 수녀가 직접 라디오방송국에 연락해 "이 시는 내 친구 박인희가 나를 생각하며 쓴 자작시"라고 정정해 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시인인 이해인 수녀가 둘도 없는 단짝 친구다. 어떻게 가까워졌나.

두 사람은 이해인 수녀가 부산으로 전학을 간 이후에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키웠다. 이들이 학창 시절부터 주고받은 많은 편지와 메모는 '우리 둘이는'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어진 부연 설명은 이렇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금세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나는 방송과 음악의 길로, 그 친구는 수도자의 길로 걸어가며 서로 사는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삶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과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늘 같았다.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고독을 위로하고 영감을 나누었던 그 특별한 우정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버팀목 중 하나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살자'는 주의
생애 가장 깊은 영감을 받은 시기는 언제인가."아이러니하게도 화려했던 전성기가 아니라, 모든 화려함을 내려놓고 떠났던 '미국에서의 공백기'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로, 그리고 인간 박인희로 돌아가 고독을 마주했던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깊은 영감의 계절이었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내면을 채웠기에, 지금 다시 무대에 서서 더 깊어진 감성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얻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약 지금 20대의 박인희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가.
"‘뜻하지 않은 길(가수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너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에 가수로 데뷔했을 때, 내성적인 나는 늘 내 옷이 아닌 것 같은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이 예정된 축복이었다. '네가 내딛는 그 조심스러운 발걸음들이 훗날 수많은 사람에게 따스한 위로가 될 테니, 너만의 속도로 묵묵히 걸어가라'고 다독여 주고 싶다."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준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살자'다. 성격상 사람이든 인연이든 물건이든 쉽게 버리지 못하고 한자리를 지키는 편이다.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기보다 순리대로 물 흘러가듯 사는 것이 가장 평온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극적인 쇼츠 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서정적인 음악과 시 낭송이 왜 필요하다고 보나.
"모든 것이 초고속으로 소비되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멈추어 서서 숨을 쉴 수 있는 '여백'을 갈구하게 된다. 옛 노래와 시 낭송은 대단한 자극은 없지만, 바쁘게 달려가느라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가만히 보듬어주는 쉼터가 돼줄 수 있다. 자극적인 소음에서 벗어나 낭만을 이야기하는 노래와 서정시 한 구절을 들으면, 잠시나마 잊고 지냈던 자신의 순수한 내면과 마주하는 위로의 시간이 될 거라 믿는다."
앞으로 무대에서 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청춘이 아름다웠듯,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삶의 매 순간 역시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모습은 변했을지라도, 노래를 들으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그 맑은 감수성이 여러분 안에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청춘이다. 그 따스한 모닥불 같은 온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나는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쓸쓸한 길목에서 온기를 지펴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박인희는 11월 26일과 27일 이화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펼친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선물 같은 공연이 될 듯하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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