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할아버지가 가르친 ‘남자다움’…손자가 옷으로 쓴 ‘존경심’ [따만사]

한국의 패션 브랜드 VDR를 이끄는 김의정 대표(37)가 한 말이다. 그가 만드는 옷에는 그를 둘러싼 두 남자가 겹쳐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였던 친할아버지와 바이커(Biker)였던 외할아버지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살롱 VDR’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군인과 소방관 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타일링하고, 한 권의 앨범으로 기록하는 캠페인이다. 2023년 시작해 4회째를 맞았다. 올해는 군인과 소방관 각 1명을 선정했다.
이달 8일 서울 이태원 VDR 쇼룸에서 진행된 캠페인 현장을 찾았다. 바버숍에서 이발을 마친 16년 경력의 베테랑 소방관 김우태 씨(43)는 이날 세 벌의 옷을 입었다.
업무 현장에서는 무거운 방화복을 입던 그가 거울 앞에서 연신 미소를 지었다. 김 대표는 옷마다 담긴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 첫 번째 옷, 검정 청바지에 남은 군인정신

김 대표는 여러 차례 청바지의 밑단을 다듬었다. 착장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옷이라는 설명이다. 2차 세계 대전 시기 물자 부족으로 처음 개발된 데님인 만큼, 김 대표에게는 군인정신을 표현한 상품이기도 하다.
그 뿌리는 6·25 전쟁에 참전한 친할아버지 김길호 중령이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그는 최전선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던 참전용사다. 공로를 인정 받은 그는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에 이어 보국훈장 광복장까지 받았다.

김 대표는 친할아버지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추는 습관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총알이 비껴간 충격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책임감을 갖고 내 소대원들 어떻게든 돌려보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그 정신은 김 대표에게도 이어졌다. 김 대표는 해병대 1094기로 입대했다. “추리닝이 멋있어 보여서”다. 육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까지 더하면, 3대에 걸쳐 쌓인 군의 기억이다.
● 두 번째 옷, 엔진오일 냄새가 밴 외할아버지와의 기억

두 번째 착장의 컨셉은 ‘바이커’였다. 이 착장의 뿌리는 외할아버지다. 김 대표의 외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사냥과 사격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7~8년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속 썩인 남편’으로 기억됐지만 김 대표에게는 아니다.
김 대표는 외할아버지를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베풀길 꺼리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숙자에게 선뜻 옷을 벗어주는가 하면, 갈 곳 없는 사람을 어린이집 원장이나 환경미화원 등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세운 인물이었다. 김 대표는 “지금도 명절이면 할아버지에게 영향받은 분들이 찾아와 발 디딜 틈이 없다”고 전했다.
이때의 영향이 김 대표가 ‘패션’을 선택한 이유였다. 옷이 곧 삶이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탓이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학원비 부담에 마음을 접고 일반 대학에 진학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김 대표를 세운 것은 군대였다. 복무 중 우연히 풀어본 언어 영역 문제집이 생각보다 잘 풀려 다시 학업에 도전, 미대에 진학한 것이다.
이후 김 대표는 중소기업청 디자인 공모전을 수상, 2015년 9월 자신의 브랜드 VDR을 열었다. 바이크와 사냥을 즐기던 외할아버지의 취향이 그대로 이어져 ‘남자다움’을 다루는 브랜드가 됐다.
● 마지막 옷, 두 할아버지를 함께 입다

김 대표에게는 이 옷이 두 할아버지가 동시에 투영된 옷이었다. 기름때는 오토바이를 타던 외할아버지를, 총알자국은 참호에서 소대원을 살린 친할아버지를 뜻한다.
김 대표에게 옷은 한 사람의 인생과 됨됨이를 담는 그릇이다. 워크웨어와 밀리터리, 바이크 무드로 옷을 만드는 이유도 결국 두 할아버지를 형태로 남기려는 시도다. 김 대표는 이를 짧게 정리했다.
“남자다움은 결국 책임감이다. 책임을 지고 존경을 받는 것”
김 대표가 말한 ‘책임감’은 이날 스타일링을 받은 소방관 김우태 씨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총알자국이 새겨진 마지막 착장을 입은 그는 손끝으로 자국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그는 소방관으로서의 사명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튿날 현장을 찾은 군인 이승빈 씨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군인을 택한 것이 “가족과 연인, 친구를 제 손으로 지키고 싶다는 책임감 때문”이라 답했다. 2023년 미국 모하비 사막에서 이어진 한 달간의 훈련을 이겨낸 것도 그 때문이다. 남자다움을 묻는 질문에 그는 “외적인 강인함이나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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