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에서 다시 만난 사촌…96세 노병이 기억한 한국전쟁

이병철 2026. 8. 3. 06:0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51년 겨울부터 6.25전쟁에 참전했던 알렉스 애서러스(Alex Atheras). 지난 7월 미국 뉴저지 한 행사에 참여한 모습.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1953년 여름.

한국전쟁을 마치고 미국으로 향하던 미군 수송선이 태평양 한가운데를 가르고 있었다. 전장을 떠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병사들은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96세 한국전 참전용사 알렉스 애서러스(Alex Atheras)도 그 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그의 등을 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도 등을 떠밀자 그는 결국 참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본 순간, 애서러스는 말을 잃었다.

사촌이었다.

같은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서로 다른 부대에 배치돼 전쟁 내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이 태평양 한가운데 귀국선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서로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촌 형제였다.

두 사람의 재회는 뉴욕 신문 '뉴욕 저널 아메리칸(New York Journal-American)' 1면에 실렸다. 신문은 한국전쟁에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촌의 사연을 전했다.

"그때까지 사촌이 한국에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70여 년이 흘렀지만 애서러스는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그러나 태평양 한가운데서 이뤄진 그 우연은 두 사람이 한국에서 살아 돌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시간은 다시 1951년으로 돌아간다. 미국 뉴저지에 살던 스무 살 청년 애서러스는 징집 영장을 받았다. 자신이 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다녔다. 그 때문에 징집 시기도 또래보다 1년 늦었다. 당시에는 뒤처졌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다닌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한국에도 1년 늦게 갔으니까요."

짧은 한마디에는 자신보다 먼저 전장으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에 대한 노병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뉴욕에서 집결한 병사들은 뉴저지 포트 딕스(Fort Dix)와 매사추세츠 포트 뱅크스(Fort Banks), 텍사스 포트 블리스(Fort Bliss) 등을 거치며 포병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뒤 다시 뉴욕으로 이동한 그는 한밤중 수송선에 올랐다. 배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병력을 더 태운 뒤 파나마운하를 지나 태평양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하와이에도 들렀다.

그러나 병사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서류철 하나가 지급됐다.

"열어보지 마라."
장교는 그 말만 남겼다.

며칠 뒤 선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열어도 된다."

병사들이 봉투를 열자 안에는 지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한반도 지도였다.

장교는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러분이 갈 곳이 바로 여기다."

애서러스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웃었다.

"우리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이미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충돌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된 상태였다. 그러나 미국 본토의 평범한 청년들에게 한국은 지도에서 처음 발견한 낯선 나라에 가까웠다. 그들은 그 낯선 나라에서 자신들의 청춘과 생명을 걸어야 했다.

1951년 겨울부터 6.25전쟁에 참전했던 알렉스 애서러스(Alex Atheras). 지난 7월 미국 뉴저지 한 행사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래 우리가 탈 기차였습니다"

애서러스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2월이었다. 한국 땅을 밟은 직후 병사들은 기차역에서 오랫동안 이동 명령을 기다렸다. 그들보다 먼저 기차 한 대가 역을 떠났다. 왜 먼저 출발했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뒤 한 하사가 지나가며 애서러스에게 물었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기차 기억하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차는 미끼였어. 폭파됐어."

하사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래 우리가 탈 기차였어."

누가 공격했는지, 기차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애서러스는 당시를 설명하다 잠시 말을 멈췄다.

"그것이 제 한국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먼저 떠난 이름 모를 병사들에 대한 기억이 더 짙게 배어 있는 말이었다.

'움직이는 전쟁'에서 '버티는 전쟁'으로

애서러스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개전 초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 개입, 서울 재수복을 거친 전선은 1951년 하반기부터 38선 부근에서 고착됐다. 같은 해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지만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울 북쪽 산악지대에서는 고지를 둘러싼 소모전이 계속됐다. 이름조차 남지 않은 능선 하나를 두고도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애서러스는 오산과 수원 등을 거쳐 서울 북쪽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그가 기억하는 도시는 수원과 서울, 김포 정도였다. 그보다 북쪽에서는 온전한 마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울을 지나면 산뿐이었습니다. 마을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이미 다 파괴됐습니다."
그에게 한국은 폐허 위에 형성된 거대한 전선이었다.

샌드백 캐슬…모래주머니로 쌓은 전선

애서러스의 부대는 주저항선(MLR·Main Line of Resistance) 인근 진지에 배치됐다. 주저항선(MLR)은 한국전쟁 중, 특히 1951년 여름 이후 전선이 교착 상태에 들어가면서 형성된 개념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지속적으로 방어하며 실질적으로 사수하려 한 주력 방어선을 말한다.

병사들은 그곳을 '샌드백 캐슬(Sandbag Castle)'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모래주머니로 만든 성이었다. 새로 온 병사들은 작은 자루에 모래를 담았다. 자루를 하나씩 포개 진지를 높였다. 포탄이 떨어지면 일부가 무너졌고, 병사들은 다시 모래를 담아 쌓아 올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요새가 샌드백 캐슬이었다.

"최전선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50야드였는지 100야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가까웠습니다."

진지 입구에는 커다란 표지판 하나가 서 있었다.

'SNIPERS.(저격수 주의)'
짧은 단어 하나가 당시 전선의 긴장감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초 진지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트럭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차량이 산길을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무전으로 반대편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트럭 올라갑니다." 그러면 반대편에서 응답이 돌아왔다. "내려오는 차량 있습니까?"
한 대가 길을 통과할 때까지 다른 차량은 기다려야 했다. 중간에서 마주치면 어느 쪽도 움직일 수 없었다.

1951년 겨울부터 6.25전쟁에 참전했던 알렉스 애서러스(Alex Atheras). 지난 7월 미국 뉴저지 한 행사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밤이면 철조망에서 총성이 시작됐다

진지 주변은 철조망과 뾰족한 말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밤이 되면 중공군 병사들이 몸을 낮춰 진지 쪽으로 접근했다. 철조망이 흔들리거나 몸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적은 총성으로 바뀌었다.

"중공군이 철조망에 걸리면 부대에서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그 소리로 접근을 알아챘습니다."
애서러스는 보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보병 진지 뒤쪽에서 대기하다 상황이 발생하면 전방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해야 했던 것은 다른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행이 결정됐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죽었다. 고향 생각은 하지 말자. 도착하면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군대에 가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자네 그리스계라고 했지?"

애서러스는 원래 포병이었지만 전쟁은 병사들을 늘 계획대로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최전선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사 담당 하사가 자리를 비웠고, 어느 날 한 장교가 그를 불렀다.

"애서러스, 자네 그리스계라고 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취사장을 맡게."
장교는 그가 그리스계라는 이유만으로 음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렇게 애서러스는 포병에서 수백 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취사 담당 하사가 됐다.

전쟁은 총을 든 병사들만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포탄을 나르고, 누군가는 식량을 옮기고, 누군가는 최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먹어야 했다.

애서러스는 최전선 바로 뒤에서 병사들의 하루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진흙 움막에서 나온 사람들

취사장 근처에는 진흙으로 만든 작은 움막 몇 채가 있었다. 애서러스는 처음에는 그곳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했다. 병사들이 식사를 마칠 시간이 되자 움막 쪽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와 여성,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버린 음식통으로 달려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빵 조각과 감자, 고기 부스러기라도 상관없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필요했다.

애서러스는 그 모습을 두세 번 지켜봤다. 그리고 더는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먹지 않은 음식은 쓰레기통에 버리지 마라. 빵과 고기, 감자는 따로 모아 둬라."

병사들이 남긴 음식은 종류별로 나눠 별도의 통에 담았다. 뚜껑도 덮어두었다. 병사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취사장을 떠난 뒤에야 기다리고 있던 한국인들이 다가와 음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선 주변에는 집과 생계수단을 잃은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유엔군 부대에서 나온 남은 음식은 이들에게 단순한 잔반이 아니었다.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식량이었다.

애서러스의 기억 속 한국전쟁은 총성과 포탄뿐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음식통으로 달려오던 주민들의 얼굴로 남아 있었다.

"저는 전투보다도 그 사람들이 굶주리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전쟁은 사람의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일상의 식탁과 한 끼의 존엄까지 무너뜨렸다.

낡은 물자로 치른 또 하나의 전쟁

애서러스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모습은 '낡은 전쟁'이었다. 그가 부대에서 접한 상당수 장비와 물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됐거나 전후에 생산된 것이었다.

냉동 다진 고기 상자에는 1947년 생산 표시가 남아 있었다. 그의 기억에 당시 지급된 달걀은 깨거나 조리하면 노른자가 초록빛을 띠기도 했다.

소총과 탄약, 야전 장비 상당수도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규격과 재고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모든 것이 2차대전 때 쓰던 것 같았습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부 병사들이 다시 군복을 입고 한국으로 왔다. 젊은 병사들은 이들을 '리트레드(Retreads)'라고 불렀다. 닳은 타이어에 새 고무를 덧씌워 다시 사용하는 것처럼, 이미 한 차례 전쟁을 겪은 병사들이 또 다른 전쟁터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몇 년 만에 벌어진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병사와 무기, 군수품 곳곳에는 이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격추되면 이 총이 필요합니다"

전쟁이 끝을 향하던 1953년, 약 1년 반의 한국 근무를 마친 애서러스에게 마침내 귀국 명령이 내려왔다.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지만 전선에서는 여전히 포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대는 그에게 오후 3시까지 본부로 오라고 지시했다. 한국에 올 때처럼 귀국 명령도 갑작스러웠다.

짐을 정리한 뒤 애서러스는 잠시 PX에 들렀다. 그의 허리춤에는 작은 25구경 마우저 권총이 채워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제작된 손바닥만 한 소형 권총이었다. 탄약 두 상자도 가지고 있었다.

PX에는 공군 조종사 두 명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애서러스의 권총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 총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애서러스는 탄창을 분리하고 약실에 탄환이 없는지 확인한 뒤 권총을 건넸다. 조종사는 한동안 총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파실 생각은 없습니까?"

애서러스는 의아했다.

"왜 이런 작은 권총이 필요합니까?"

조종사는 자신들이 적진에서 격추됐을 때를 대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아서 비행모나 옷 속에 숨길 수 있습니다. 적에게 붙잡혀 몸수색을 당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소형 권총은 적진에 불시착하거나 포로로 붙잡힐 상황에 대비한 마지막 생존 수단이었다. 설명을 들은 애서러스는 더는 가격을 흥정하지 않았다.

"20달러면 됩니다."
조종사는 돈을 건넨 뒤 애서러스의 손을 붙잡고 거듭 고맙다고 말했다.

애서러스의 눈에 그는 열두 살 소년처럼 앳돼 보였다.

"저는 몇 시간 뒤면 집에 갑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계속 이곳에 남아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격추되면 그 총이 필요할지도 몰랐습니다."

애서러스는 조종사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이 총을 절대 쓸 일이 없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

애서러스는 그 조종사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은 고향으로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전쟁의 하늘로 향했다.

태평양에서 다시 만난 가족

권총을 건넨 뒤 애서러스는 예정대로 귀국선에 올랐다. 그리고 며칠 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자신을 뒤에서 밀던 사촌과 마주쳤다.

공군 조종사는 전선에 남았지만, 애서러스와 그의 사촌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전쟁에 참전하고도 서로가 한국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한국 땅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그것도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수송선 위에서 다시 가족을 만났다.

애서러스가 그 장면을 70여 년 동안 잊지 못한 이유였다.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때로 실력이나 용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탈 예정이던 기차가 먼저 떠나 폭파됐고, 그는 수많은 포탄과 총성을 피해 살아남았다. 귀국길에는 같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촌을 우연히 만났다. 그의 한국전쟁은 죽음과 생존, 이별과 재회가 반복된 시간이었다.

"주방 일은 충분히 했습니다"

애서러스는 1953년 군 복무를 마쳤고 이후 정식 제대 절차를 밟았다.

군은 그에게 계속 복무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이제 충분했습니다."
그는 훗날 군에 계속 남았다면 베트남전쟁에도 투입됐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전역 직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군에 가기 전 어머니와 함께 뉴저지 포트리에 작은 집을 마련했던 그는 이웃의 소개로 건설 현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나 다시 취사 관련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방 일은 충분히 했습니다."

그는 제대군인 교육지원제도를 이용해 미술을 공부했다. 뉴욕 인테리어디자인학교에도 다녔다. 이후 미술을 가르쳤고 작은 사업체도 직접 운영했다.

전쟁은 그의 젊은 시절 일부를 가져갔지만 남은 인생까지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는 군복을 벗은 뒤 자신의 삶을 다시 만들어갔다.

끝내 다시 밟지 못한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애서러스는 한국을 한 번도 다시 찾지 못했다.

한국 정부의 참전용사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 두 차례 방한을 준비했다. 두 번 모두 여행을 앞두고 있었지만, 출발 직전 집안에 사정이 생기면서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두 번이나 준비했는데 두 번 모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더는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1953년 떠난 뒤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나라를 다시 밟지 못했다.

그러나 기억 속 한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 북쪽의 산악지대와 모래주머니로 쌓은 샌드백 캐슬, 진지 입구의 저격수 경고판, 밤마다 흔들리던 철조망, 남은 음식을 기다리던 아이와 여성, 노인들이 그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원래 자신이 탈 예정이었던 기차의 폭발 소식과 귀국 직전 권총을 건넸던 어린 공군 조종사의 얼굴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 말미,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애서러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참전용사를 기억하는 일은 살아 있는 노병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늘 우리를 기억해 주는 것은 살아 있는 참전용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지 못한 미국인 참전용사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운 한국군 전우들을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미국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Copyright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