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렌즈 담았던 아파트, 다시 가보니 재건축 홍보관이…”

허정연 2026. 8. 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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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파트 연구 30년…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가 갖는 공간적 의미를 탐구해온 발레리 줄레조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사진 Nadia Abdelwahed]
“30년이 지나면 다시 짓는다.”

한국 아파트를 처음 연구하던 시절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 지리학자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대표작 『아파트 공화국』의 토대가 된 1996년 처음 서울 현장 연구에 나선 지 30년. 당시 렌즈에 담았던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찾아가 보니 그 자리엔 거짓말처럼 재건축 홍보관이 들어서 있었다.

발레리 줄레조(Valérie Gelézeau)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문화지리학 교수이자 한국 사회와 공간 연구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한국학자다. 지난 30여 년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연구를 이어온 그는 최근 2년간 서울대 방문연구원으로 머물며 가장 길었던 한국 생활을 마무리했다.

줄레조 교수에게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는 “공간은 사회와 분리된 게 아니라 사회가 만드는 동시에 사회를 다시 만들어내는 ‘사회적 실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아파트와 비무장지대(DMZ)는 그에게 단순한 건축물이나 경계선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욕망과 권력, 역사와 삶이 응축된 공간이다. 한국의 아파트를 ‘연구 대상’이 아닌 ‘삶의 공간’으로 직접 겪어본 그에게 ‘아파트 공화국’에 대한 견해와 경험담을 들어봤다.

현장 연구 2007년 『아파트 공화국』 출간

Q : 새 프로젝트인 ‘아파트: 30년 후’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나.
A : “출발점은 매우 단순한 질문이었다.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한국의 건축가나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아파트가 30년 정도 사용되도록 만들어졌다’고 했다. 파리에서 내가 사는 공동주택이 1916년 지어졌듯 유럽에선 집을 아주 오랜 기간 유지하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30년 뒤 다시 지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Q : 2007년 『아파트 공화국』 출간 때 “30년 후 아파트 수명이 다하면 한국 사회는 거대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했는데.
A : “당시엔 나조차도 그 의미를 온전히 체감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내가 연구했던 아파트들의 연식이 정말 30년이 되는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사례로 다뤘던 서울시내 7개 아파트 현장을 모두 다시 찾아가 봤다. 1996년 촬영했던 정확히 같은 장소에 서서 다시 카메라를 들었고, 자연스럽게 그곳 주민들과 대화가 이어졌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 일 자체가 한국 아파트의 현재를 기록하는 현장 연구가 됐다.”

Q : 다시 찾은 곳 중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나.
A : “압구정 현대아파트다. 예전 연구 당시 책에 실었던 사진 속 바로 그 지점에 갔는데, 정확히 그 자리에 재건축 홍보관이 들어서 있었다. ‘시간의 순환’을 피부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30년 수명’의 아파트 재건축 문화는 비교지리학자인 그의 눈에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집은 시간을 견디며 보존하는 대상인 반면, 한국의 아파트는 재건축을 전제로 생애주기를 설계한다는 게 낯선 풍경이었다. 그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아파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후화되고 주변화돼 관리가 까다로운 주거 형태로 인식된다”며 “반면 한국에서는 끊임없이 헐고 다시 지어지며 오히려 부와 신분을 상징하는 고급 자산으로 재탄생한다”고 진단했다.

줄레조 교수가 직접 찍은 1996년 압구정 현대아파트(위)와 재건축 홍보관이 들어선 2026년 현재 모습. [사진 Valérie Gelézeau]
실제로 그가 1996년 기록했던 아파트 단지는 지금 서로 다른 속도로 재건축을 맞고 있다. 방배동 삼익아파트는 새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재건축 홍보관이 들어서며 변신을 앞두고 있다. 30년 전 기록과 오늘의 풍경을 겹쳐 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아파트가 지나온 시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Q : 최근 2년간 서울에 장기 거주한 경험은 연구자로서의 관점에 어떤 영향을 줬나.
A : “연구자로 아파트를 바라보는 것과 실제 거주자로 경험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아파트는 단순한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공간이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지가 핵심이다. 내가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온 것도 건축 자체보다는 ‘건축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관계’다. 이번 서울 체류는 연구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아파트를 일상의 삶 속에서 다시 이해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Q : 그새 한국도 많이 변했을 텐데.
A : “1989년 12월 처음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강남 거리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나는 아직도 석유 난로 냄새를 맡을 때면 당시 서울로 돌아가곤 한다. 지금처럼 거리 1층마다 유럽식 카페가 늘어선 풍경도 없었다. 당시의 다방은 대부분 건물 지하나 2층에 자리했다. 도시의 공공 공간도 재탄생했다. 특히 한강공원·청계천·여의도 등 물과 연결된 공공 공간은 이전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비약적인 변화를 이뤘다.”

Q : 그렇다면 변하지 않은 것은 뭔가.
A : “놀라울 만큼 변하지 않은 건 ‘아파트를 향한 열망(desire)’이다.”
줄레조 교수는 인터뷰 내내 ‘열망’을 한국 아파트 연구의 핵심 개념으로 반복해서 언급했다. 재건축이 진행되고 도시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지만, 사람들을 아파트로 향하게 하는 사회적 동력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한국의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중산층 진입의 꿈과 자산 형성, 사회적 지위를 향한 욕망이 응축된 공간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의 연구 전반을 관통한다. 2008년 총선 때는 아파트 단지를 ‘중간계급 제조공장’이라 규정하며, 낙후 지역을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과정이 주민들의 계층 상승 욕망을 자극하고 지역의 정치적 지형까지 바꾸는 메커니즘을 집중 분석하기도 했다. 지금도 재건축이 자산과 계층 이동의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6월 DMZ 평화의 길을 따라 트레킹하고 있는 발레리 줄레조 교수. [사진 Oh KeumJoo]
아파트뿐 아니라 한반도의 ‘경계 공간’ 역시 그의 오랜 탐구 대상이었다. 줄레조 교수는 2024년 개방된 DMZ 평화의 길을 따라 500㎞를 직접 걸으며 군사적 긴장과 생태 환경, 지역 주민의 삶이 교차하는 공간적 특성을 탐구했고 그 결실로 최근 저서 『Marche et demarche a la frontiere coreenne(한국 경계 지역에서의 걸음과 탐구)』를 출간했다. 지난 6월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신간을 선보이며 직접 발로 뛰면서 기록한 DMZ 현장 연구의 경험을 국내 독자들과 나누기도 했다.

Q : 아파트와 DMZ, 전혀 달라 보이는 두 공간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A : “두 공간 모두 한국 사회의 본질을 가장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란 점이다. 아파트가 한국인의 삶과 욕망이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보여준다면 DMZ는 분단이란 역사가 한국 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보여준다. 또 하나는 독보적인 ‘한국적 특수성’이다. 최근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노래 ‘APT.’처럼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집을 넘어 특별한 문화적 위치를 지닌다. DMZ 역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과 국경이라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맥락을 갖고 있다.”
아파트와 DMZ, 한국 본질 비추는 거울

Q : DMZ에선 왜 직접 걷는 방식을 택했나.
A :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눈으로 보고(시각), 사람들과 이야기하는(언어) 것을 넘어 공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걷기는 그 세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실제 DMZ를 직접 걸어보면 군사구역과 관광지, 농경지가 뚝뚝 끊기듯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그동안 DMZ 연구가 생태나 안보·관광·지역발전 등을 각각의 주제로 다뤄왔다면 직접 걷는 방식은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함께 읽어낼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단절돼 보이는 DMZ를 하나의 연속된 공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Q : 오랫동안 한국을 연구해온 학자로서 세계가 한국이란 공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뭐라고 보나.
A : “한국 연구는 단순히 ‘한국이라는 나라’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학은 이른바 아시아 연구, 더 넓게는 지역학의 한 분야다. 동시에 한국의 사회 현상과 그 분석은 서구 중심의 기존 이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국의 아파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양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언어와 개념, 현장의 맥락 속에서 그 함의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런 접근은 자문화 중심적 사고를 넘어 기존 학문 체계를 더욱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줄레조 교수가 30년 넘게 발로 뛰며 벼려온 질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공간은 사회를 비추는 배경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란 사실이다. 그가 과거에 기록했던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위에는 시대의 욕망과 권력, 삶의 방식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의 공간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기록해 나가고 있을까.

허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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