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무지개를 연주하는 소년

일본 미스터리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작 ‘무지개를 연주하는 소년’에는 ‘광악(光樂)’이라는 낯선 개념이 등장한다. 황홀한 멜로디로 청각을 자극하는 것이 음악(音樂)이라면, 빛의 점멸과 색채의 조화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시라카와는 미세한 색의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의 소유자로, 밤마다 비밀스러운 공간을 옮겨 다니며 ‘광악’을 연주한다. 입시 압박과 가정 불화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그 빛에 열광하며 치유를 얻지만, 어른들은 이를 사이비 종교 취급하며 억압하려 든다는 이야기다.
히가시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고교 1학년이던 2011년이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으로 너도나도 중국어 수업에 몰리던 시절로,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어 든 장편소설 ‘백야행’(1999년 작)에 빠져들었다.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외출해 카페에서 1권을 단숨에 읽어 내려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동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소소한 일탈이 됐다. 유인책은 거창하지 않았다. 오직 ‘재미’였다. 축구나 당구, 온라인 게임에 빠져 살던 평범한 남고생에게 ‘글자뿐인 책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가르쳐준 작가였다. 책을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기특하다’던 어른들의 칭찬은 낯부끄러우면서 괜스레 기분 좋았다. 후에 대학 전공으로 일본 문학을 골랐다. 10대 시절 내게 히가시노는 새로운 자극이자 전환점이 되어준 ‘무지개를 연주하는 소년’이었던 셈이다.
히가시노가 최근 대장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3년 전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인기 비결을 묻는 질문에 격의 없이 진솔한 답을 내놓았다. “어릴 적 책을 잘 읽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나조차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를 통해 일본 문학에 빠져든 내 청소년기가 우연은 아니었다고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생전 그는 105권의 작품을 세상에 펴냈고, 일본 내 누적 발행 부수는 1억부를 넘겼다. 매해 2~3권의 신작을 쏟아낸 셈이다. 8월에 출간되는 유작(遺作) ‘영원의 기억’은 그를 대표하는 ‘갈릴레오 시리즈’의 후속작이다.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그는 줄곧 글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은 긴 텍스트는커녕 2시간 남짓한 영화도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잠들기 전 무심코 튼 유튜브에 눈을 뺏겨 새벽을 맞이하곤 한다. 넷플릭스 등 OTT엔 ‘나중에 볼 콘텐츠’로 저장하고 방치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도파민의 홍수’가 덮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15년 전 내게 그러했듯 더 깊고 묵직한 울림을 안겨줄 ‘무지개를 연주하는 소년’일지 모른다. 평생 현역으로 살았던 거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뎌진 독자의 마음에 다시 한번 환한 무지개를 띄워 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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