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책 찢고 나온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울산에도 있소
어릴 때부터 송아지 돌보며 성장
건강 악화 아버지 대신 16년째 관리
우유로 만드는 잼·치즈·와인 도전
동물도 사람도 행복한 세상 위해
사육 젖소 더 줄여 완전 방목 목표
공업도시로만 생각했던 울산에도 목장이 있다. 지난달 열린 부산푸드필름페스타(BFFF)에서 30년 넘게 젖소를 키우고 우유를 생산해 온 유진목장을 처음 알게 됐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프랑스 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가 계기였다. 열여덟 살 소년이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고로 가장이 되어 치즈 만들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신기하게도 울산에 꼭 닮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 영화 상영 뒤 유진목장 정해경(38) 대표가 무대에 올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날 관객들은 MZ세대 여성이 대를 이어 큰 목장을 운영하게 된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풍덩 빠져들었다. 그 뒤 내내 궁금했던 울산 울주군 유진목장에 찾아가 해경 씨가 미처 풀어놓지 못한 달콤쌉쌀한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아버지 정이기, 어머니 손선희 씨는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년 소녀 출신이었다.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목동처럼 살고 싶다”라고 먼저 운을 띄웠다. 아버지도 “그러면 부산을 떠나 자연으로 가자”라고 선선히 응했다. 아버지는 경남 양산의 한 목장에서 목부로 취직해 성실하게 일했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목장주가 송아지 한 마리를 선물로 준 게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이어갈 사람이 없었던 연로한 목장주로부터 목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구제역, 광우병 파동, 원유 가격 폭락, 사룟값 폭등 같은 온갖 위기가 있었다. 그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젖소 150두를 키우는 오늘날의 유진목장을 일궈냈다.

해경 씨는 걸음마 할 때부터 송아지가 친구였다. 목장 일로 바쁜 부모님을 도와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거나 볏짚을 옮겼다. 한국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소를 키우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던 철없는 시절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물에 잠겨 트랙터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와 멀찌감치 내려달라고 해도, 꼭 정문 앞에 세워주는 아버지가 그때는 참 원망스러웠다.

종이 다른 동물도 서로 교감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됐다. 해경 씨는 겨울에 송아지가 태어나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주곤 했다.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강아지가 갓난 송아지를 톱밥으로 얼굴만 빼고 다 덮어놓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엔 송아지가 죽었다고 오해를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송아지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강아지의 마음이 나중에야 읽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다 동물과 교감하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를 꿈꾸게 됐다. 수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천안의 연암대학교 축산학과에 다니다, 유가공 산업에 관심을 두게 되며 부산대 동물생명자원학과에 편입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하던 2012년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가 목장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의 상태는 생사의 기로에 섰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신기한 꿈도 몇 차례나 꿨다. 버스가 다가와서 타라고 했다. 아버지가 버스 좌석에 앉으면 도로에 흰 소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가 도로에 있으면 안 되는데 싶어서 버스에서 내리면 꿈에서 깼다. 저승행 버스를 가족 같은 소가 막아준 게 아닌가 싶은 꿈이었다.

부모님은 해경 씨 자매에게 목장 일을 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차녀인 해경 씨는 고민 끝에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가 스물셋이었다. 처음 3년은 소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약속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우유를 짜고, 사료를 먹이고, 거름을 치웠다. 지게차와 트랙터 운전에 인공수정까지, 남자도 힘든 낙농 전 과정을 혼자서 다 했다. 소들의 미스코리아 대회 같은 한국홀스타인품평회에도 송아지와 함께 처음 출전해 4등이라는 꽤 좋은 성적을 거뒀다. 대회에서 자신처럼 젊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낙농이 새로운 문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부모님은 해경 씨가 맡은 목장 일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밖에 나가 안목을 넓혀 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시작한 선진 낙농국 체험은 일본, 미국, 호주, 터키, 이스라엘 등 12개국을 넘기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유도 잼으로 만들어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알게 됐다.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밀크잼은 언양읍에서 운영 중인 카페 본밀크를 창업하는 데 큰 영감을 줬다. 유진목장에서 직접 만든 수제 아이스크림과 요거트를 맛볼 수 있는 본밀크는 줄 서는 유명 카페가 되었다.
유진목장에서 함께 운영하는 유가공 제조시설 및 체험공간인 본치즈어리는 호주 여행에서 처음 만난 개념이었다. 본치즈어리는 처음에는 치즈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치즈 레스토랑으로 구상했다. 하지만 다소 시기상조라는 판단에 치즈를 만드는 체험 공간으로 한발 물러선 상태다. 해경 씨의 아이디어 노트에는 호주에서 만난 유청 와인도 들어 있다. 원유로 치즈를 만들면 치즈가 10퍼센트, 그 나머지가 유청이다. 국내에서는 이 아까운 유청을 모두 버린다. 유청을 증류해 만드는 유청 와인에 도전할 생각으로 특허까지 받아뒀다.

목장에 카페 일로 바쁜 해경 씨는 이봄(6), 이숲(4)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남편 김유장 씨는 유진농장에서 차로 15분 떨어진 언양읍에서 포니랜드라는 승마 체험장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2018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청년 창업농 1기에 울산에서 나란히 선정되어 교육을 같이 받으면서 서로 눈이 맞았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소말부부’의 탄생이었다.
해경 씨는 첫 아이 출산하고 나서 진짜 많이 울었다. 미처 엄마 젖소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한 게 미안해서였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고 나면 안전과 위생을 이유로 서로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어미 소는 밥도 안 먹고 난리가 난다. 해경 씨는 출산 뒤에 아이를 떨어뜨려 놓고 하루 두 차례 전화 통화만 허용하는 게 그렇게 서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 소와 아기 송아지를 합방시키는 목장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너의 깨달음이 참 감동스럽다. 우리만의 목장 관리 방식으로 풀어가자”라고 약속했다. 소는 임신 기간이 사람과 똑같은 열 달일 정도로 사람과 닮았다.
목장주이자 엄마로서 해경 씨가 요즘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저출생 여파로 인한 우유 소비량의 감소다. 국내 1인당 흰 우유 소비량은 1980년대 이후 최저 기록을 연이어 경신하고 있다. 그래서 해경 씨는 교육부와 연계한 학교로 ‘찾아가는 우유 교실’ 출강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유에 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줘야 낙농 사업도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경 씨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유진목장에 들어온 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그동안 아버지는 두 번의 고비를 넘겼지만 맞는 약을 찾아서 회복되었고, 지금도 목장 일을 도와주고 있다. 부모님이 애써 가꾼 목장을 부끄럽지 않게 오래 지속할 방법에 대해 여전히 고민을 많이 한다. 유진목장은 부산우유에 70퍼센트를 납품하고 나머지는 제품화해 카페에서 사용한다. 다행스럽게도 유진목장에서 자체 처리하는 비중이 계속 늘고 있다.

대량 생산과 전국 납품, 세계로 우주로! 미안하지만 이런 확장이 꿈이 아니다. 대신 해경 씨는 여러 가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유진목장이 하는 일이 보람 있고 귀감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단다. 유진목장에서 키우는 소는 130두로 줄였다. 앞으로는 50두만 키우는 게 목표다. 알프스처럼 소들을 풀어 놓아 누가 봐도 정말로 소를 행복하게 키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유진목장과 본치즈어리의 체험 프로그램인 ‘팜클래스’는 주말에만 네이버 예약을 통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치즈 만들기, 송아지 우유 주기 등 아이 눈높이에 맞는 목장 체험이 포함되어 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