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7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7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 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중구 정동 한 식당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올해 5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5월 출간작 중에서는 뜻이 모아지지 않아 올초 출간작을 다시 검토한 결과, 4월 출간작 두 편이 선정됐습니다.
7월 독회 추천작은 김종광 장편소설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걷는사람)와 이주혜 소설집 ‘괄호 밖은 안녕’(문학동네)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
현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 중 하나
김종광의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걷는 사람, 2026.04)는 그가 집요하게 탐구해 온 ‘고향의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고향은 흔히 말하는 마음의 고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와 맞닿은 삶의 터전이다. 돌아갈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의 상황의 뿌리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점에서 김종광은 상황과 대결하고 있다. 그런데 고향을 경유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특별한 형태이다. 그가 평생 참조한 고향 선배 작가 이문구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이문구에게는 고향과 현실이 따로 없다. 고향이 곧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라는 제목이 나왔다. 이문구의 고향-현실은 현실을 억누르는 정치·사회적 제도에 저항한다. 고향은 제도에 대한 저항의 실체이다.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두 개의 특별한 형식이 나왔다. 하나는 철저한 방언의 사용이다. 방언은 제도의 표준어, 그 표준어가 하달하는 명령에 저항하는 육체 언어의 반항이다. 또 하나의 형식은 그 육체 언어의 결정체로서의 ‘인물’의 부각이다. 그의 상당수 소설은 한 인물의 전기로 이루어진다.
반면 김종광의 소설은 방언 대신 재담을 택한다. ‘낙서’에 가까운 실없는 농담이 그의 재담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의 인물들은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인물들은 제도에 대한 저항체가 아니라 제도의 농간에 휘둘리는 존재들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라.
“1983년, 젖소값이 우박 떨어지듯 했다. / 뭘 모르는 사람들은 소젖 팔아서 떼돈 벌어 놓지 않았느냐고 했다. / 짐승값은 갑자기 오르거나 갑자기 떨어지는 널뛰기 성질을 지녔지만, 사룟값은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외국에서 고가로 들여온 귀하신 몸이 토종 소보다 못한 가격으로 뚝 떨어졌지만, 사룟값은 꿋꿋이 오르기만 했다. / 반면에 젖값은 떨어지기만 했다. 학교마다 우유를 급식하고 온 국민이 우유 안 먹고는 생활이 불가능한 그런 세상이 오니 낙농은 무조건 돈 버는 영농이다, 농정 당국이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펼친 보람이 있어 젖소가 넘쳐났다. 우유 회사들이 아무 젖이나 안 사 갈 정도로 젖이 남아돌았다. 우유 소비가 줄거나 우유에 대장균이 있느니 없느니 뉴스가 나면 아예 사 가지도 않았다. 조카 부부는 피 같은 젖을 그냥 버려야 했다. / 온 국민이 그달엔 우유만 먹고 살았는지 젖이 모자랄 정도로 귀한 때가 있었다. 그러자 농정 당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에서 젖을 농축한 전지를 수천 톤씩 수입해 왔다. 국민이 아무리 우유를 진탕 마셔도 낙농인은 돈을 벌 수가 없는 팔자였다. 조카 부부는 소젖 팔아서 떼돈을 번 게 아니라 사료값 대느라 빚만 늘어갔다.” (『산 사람은 살지』, pp.168~169)
이런 광경이 오늘의 작품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에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하나의 사례만 축약해 소개한다.
1980년대 정부는 소고기 소비 증가에 맞춰 “소 안 키우는 농민은 삼청교육대 보낼 분위기”로 가혹하게 축산을 장려한다. 하지만 농민들이 빚을 내 소를 늘리자마자 정부는 갑자기 외국 송아지와 쇠고기 수입을 전면 허용해 버렸고, 그 결과 100만원이 넘던 송아지 값이 개값(20만원)보다 싸지는 폭락을 맞이한다.(p.246) 농협과 축협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자비하게 빚 독촉을 해댔고, 농민들은 야반도주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무엇보다 금융 시스템이 요구한 ‘연대 보증’ 제도 때문에 보증을 서준 이웃과 친척들까지 억울하게 연쇄 파산하여 눈도 못 감고 죽어 나가는 것이다.(p.314)
그러니까 김종광의 인물들은 이문구의 인물과 다르게 제도 속에 끼여 있다. 그 인물들은 이문구의 경우처럼 제도에 대한 저항체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의 파열이다. 그 파열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자들이 세상과 자신을 조소한다. 그것이 그의 재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은 단순한 패배자가 아니다. 독자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제도에 협력함으로써 출발했고, 제도에 의해 배신당하는 사정을 생체험으로 겪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번 소설이 김종광의 소설사에서 갖는 의의가 나온다.
그 전의 소설들에서도 유사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 인물들은 대체로 자조적 분위기에 젖는다. 그러나 ‘어머니’를 다룬 직전의 소설, 『산 사람은 살지』(2021)와 이번 소설에서는 재담 대신에 냉정한 현실 묘사가 기본 어조를 이룬다. 부모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그 어조를 주도한다. 이 냉정한 현실 묘사를 통해서 작가는 단순히 제도에 대한 협력, 그로부터의 배신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옹골진 저항이 사방에서 움트는 과정도 보여준다. 그 저항 작용들은 점차 자라나 언젠가 제도를 주도하는 자들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희망은 아직 ‘타블라라사’의 상태이다. 그것을 채우는 데에도 숱한 시련과 성찰과 자기 갱신이 덧쌓일 것이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한마디 고언을 한다.
방금 말한 광경은 과거와 미래를 안으로 접고 개진되는 현재의 탐구로서 나타날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안으로 접되 그것을 현재의 층위에서 부조하여 현재와의 치열한 긴장을 조성할 때, 그 탐구는 생생해질 것이다. 한데 지금까지의 김종광의 약점은 그의 현재 탐구가 어정쩡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조차도 과거화한다. 근원화하고 관조화한다. 관조의 즐거움이 커지면 현실의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고언은 이렇다 “고향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라.”
♦괄호 밖은 안녕
반-여행문학을 옥죄는 고통
이주혜의 『괄호 밖은 안녕』(문학동네, 2026.04)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여행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왜 여행인가? 저 옛날 죄르지 루카치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을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라고 요약했고, 그것은 훗날 한국의 평론가 및 문학 연구자들에게 소설 이론의 공리로 군림하였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근대에 지친 자들이 저 잔혹한 ‘길’로부터 이탈해 도피하는 내력들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소설로부터 이야기로의 퇴각인가?
여행의 까닭을 찾아보자. 명시적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여행은 일상의 피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분비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은 ‘낯설음’에 대한 정서적 이끌림에 의해 추진력을 얻는다. 가령 ‘할리’에게는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p.172)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며, 그게 그의 행로를 결정짓게 한다. 게다가 그 말은 강박관념이 된다. 시시때때로 출몰하면서 할리의 행로를 절대적으로 지시한다.
욕구와 힘은 맞물려 있다. 일상의 피로에서 탈출하려는 욕구는 반일상성의 장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으로의 여행이 네 편이나 되는데, 그 선택은 “내 번역의 출발어도 도착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휴식”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획’으로 섰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인물에게 주어진 일상의 과제가 아닌 ‘분재’로 도피한다.
여기까지 오면 책 제목의 뜻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인물들은 일상이라는 이름의 폐색 공간(괄호)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선택지의 대부분이 ‘끝’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망에 속한다.
그런데 ‘끝’ 너머, 즉 괄호 밖에 어떤 세계가 있는가? 거기에 ‘길’이 있는가? 여행이 새로운 길로 변환되는 계기가 있는가? 여행문학의 범위는 넓다. 자아 갱신의 계기로부터 미지의 발견으로까지. 이 넓은 스펙트럼에서 여행문학의 요체는 이 넓이를 하나로 응축시키는 데에 있다. 즉 자아 변신이 곧바로 타자(미지)와의 조우가 되는 것. 여행문학의 본성에 대한 두 문단을 소개한다.
“여행에 관한 문학적 서술에서는 주체와 대상 모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정체성 담론은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하는데, 하나는 여행자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문학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정체성은 물론 주관적이고 창의적인 상호 저울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심사는 여행 문학의 역사에서 때마다 다르게 우선순위가 매겨져 왔지만, 항상 이 장르의 핵심 요체였다.”(Jakub Lipski, 「여행과 정체성Travel and Identity」, Jakub Lipski (Ed), Travel and Identity: Studies in Literature, Culture and Language,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18, p.5)
“여행과 여행기는 개인적 및 국가적 정체성을 알리고 구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쉽게 자아와 세계의 만남으로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다양한 문학 유형에서 ‘주체성의 변화하는 역할’을 반영한다. 이 점에서 모든 여행은 ‘때로는 타자성(다름)이라 불리는 것과의 대면, 혹은 더 낙관적으로는 협상’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타자성과 정체성, 차이와 유사성 사이의 복잡하고 때로는 불안한 상호작용을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상응하여 자크 데리다는 타자성과의 만남 가능성 외에도 여행이 위상 전도displacement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언어에서 의미와 감각의 전위에 모델링된다고 보았다.”(Tymon Adamczewski, 「정체성으로의 역행Counterpath to Identity」, 같은 책, p.52.)
이 응축, 즉 자아와 대상의 변별성을 유지한 채로 하나의 상(相·phase)속에서 결합시키는 것, 그것이 여행문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추어본다면 이주혜의 여행에는 ‘타자의 발견’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확인’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이 소설들의 여행은 과거로 귀착한다. 과거의 재발견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재확인이다. 이 방향에 까닭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절실한 사연이 있다. 과거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때 여행은 그 불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잔혹한 기억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요구한다. 그 요구가 말한다.
“유령을 찾아왔는가? 아니면 당신은 손님입니까?”(p.62)
이주혜의 반-여행문학은 이 질문의 무서운 다그침, 즉 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 속에 서 있다. ‘나’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인물의 사적 체험들을 넘어설 때 그 대답의 공간이 열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죽은 자와 나를 연결하는 유일한 기억, ‘질투’는 실제 괄호 바깥에서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주변에서 은은히 어른거리는 아주 희미한 여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썩 고대적인 기담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모색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 외에도 무수한 다른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
김종광은 산문 장르 불문 다작의 작가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새들이 먹이를 찾듯 글을 쓰는 작가 같다. 이 비유가 맘에 안 들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품 활동을 먹고 생존하는 데 일생을 다 써버리는 새에 비유하다니. 생각 없이 기계적 섭생을 반복하는 형태의 행위야말로 작가가 우선적으로 경계해야 할 바가 아니던가.
그러나 작가라는 인간은 또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편에 속해서 과잉된 의미를 생산하기도 하고 그 결과로서 새는 생각 없이 기계적 섭생을 반복한다는 편견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애써 의미를 배제하는 글쓰기를 하거나,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발화기계’ 혹은 ‘발화장치’로 자임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말해지는 ‘작가’로서의 자아를 작가가 자발적으로 부정하는 모양새이기도 한데, 사정이 이러하다면 ‘생각 없음’과 ‘기계적 섭생의 반복’은 오히려 입선(入禪)의 경지로도 보일 만하다.
김종광을 두고 장황하게 서두를 떼는 이유는 물론 그의 작품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를 말하기 위해서다. 김종광을 산문 장르 불문 다작의 작가라고 했지만 그래도 한마디로 그를 말하라고 한다면 농촌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거의 유일한 한국의 작가라 할 만하다.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도 농촌이 배경이고 농부가 주인공이며 농촌에 사는 농부의 아들이 쓴 소설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도 그렇다. 소설 속 주인공 김동창이라는 이름 또한 실제로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도 그렇다.
농촌에 사는 농부의 아들은 농사는 안 짓고 만날 소설만 쓰는데 그 소설이 농촌 소설이다. 그런데 그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농촌은 과연 어떤 농촌이며 누구의 농촌일까. 혹시, 설마, 애먼 농촌인 건 아닐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작가로서는 겁이 날지도 모른다. 김종광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입을 빌려 “네 소설도 리얼하지 않아. 실제와는 거리가 멀어(35쪽).”라고 적고는 있지만 실은 김종광의 자기고백이다. 작가의 자발적 자기부정으로서의 고백. 다시 말해 의미의 자의적 생산과 그로 인한 편견을 줄이고 보다 더 ‘리얼’한 농촌을 소설 쓰기를 통해 접해보고 싶다는 다짐. 그러려면 일단 자기를 지우거나 최소한 자기로부터 멀어져 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김종광의 선택이 김동창, 즉 아버지의 시선인 것이다. 리얼하지 않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농부의 농촌은 리얼할 테니까.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김종광인 이상, 농촌이 그랬듯 김동창도 리얼한 김동창으로 그려질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고민이 이 소설의 독특한 형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걸핏하면 작가의 기억에서 도망치는 김동창이 등장하는 방식이니까.
김동창은 이미 고인이다. 그런 만큼 작가에 의해 호명되는 김동창은 작가의 기억 안에서만 오롯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고인을 어떻게 작가의 기억에서 벗어나 도망치게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이를, 죽었으나 죽지 않은 김동창을 등장시킴으로써 해결한다. 김동창이 유령으로 나타나 작가인 아들을 꾸짖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만 작가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김동창이 될 수 있고, 덩달아 뜻하지 않은 김동창이 될 수 있으며, 잘 못 알고 있던 농촌의 모습이 비로소 새롭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자는 1941년생 김동창의 생애와 우리 농촌의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소설 중간중간에 사진으로 제시되는 김동창의 실제 졸업장과 수료증 등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이기는 하되 그 사실성이 곧 ‘리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왜곡 없는 기억이나 기록과 사진 등의 자료는 어쩌면 사실을 사실로서 박제하고 ‘리얼’을 제한할지도 모른다. 김동창이 말하는 리얼은 박제된 사실들 너머에 실재하는 잉여의 영역인 것 같으니까. 김종광이 아버지의 입을 빌려 ‘실제와는 멀다’고 했을 때의 실제.
그 리얼로서의 농촌에 다가가기 위해 김종광이 택한 방식은 유령으로서의 아버지를 불러다 빙의하여 유유자적하는 팬터사이징(Fantasizing)이 그 하나이고, 선적 구성을 거부하고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비질서적 배치를 통해 언제든 새로운 차원의 정동을 야기하는 작법이 그 둘이다.
이에 따라 그의 소설에는 박제된 사실(성)을 깨고 리얼한 농촌으로 향하는 틈새와 여지가 열리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납득할 수도 정리할 수도 없는 흐름을 방임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멀리 물러난 ‘나’가 ‘아버지’를 조망하는 대신 차라리 그 유령(성) 한복판으로 침투하는 ‘안으로의 탈주’를 감행함으로써 ‘섞임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토피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승우·소설가

♦괄호 밖은 안녕
이번 소설집에 실린 이주혜의 인물들 대부분은 여행 중이다. 혼자거나 두세 사람이 동행한다. 이 인물들은 거의 다 기억에 붙들려 있는데, 그 기억은 대부분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 대상은 지금 가까이에 없다. 공간적으로 멀리 있고, 시간적으로도 멀리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의 내부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으니 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여행이 순탄할 리 없다는 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순탄하지 않음이 낯선, 다른 층위 존재와의 만남을 불러왔을 것이다. 예컨대 여행 중인 인물 앞으로 사람처럼 말을 하는 사슴, 맨발로 도로에 앉아 있는 여자,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온천탕의 노인이나 세일러복 여학생 같은 낯선/환상적 존재들이 무대에 잘못 등장한 배우처럼 불쑥 나타나 서사의 방향을 바꾸는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충격과 파격이 필요하다고 이 소설의 작가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소설에서 이 여행은 ‘이소 중’으로 표현된다. 새는 어느 시점이 되면 둥지를 떠나 이동한다. 그러니까 이주혜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여행은 이소하는 일이다.
표제작 「괄호 밖은 안녕」의 화자인 번역가는 자기가 아는 언어가 없는 낯선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 대해 그는 ‘언어와 해석’에서 도망친 거라고 말한다. 언어와 해석은 곧 사람들과 일, 즉 그의 현실일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 다른 현실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떠오르는 기억을 주저앉히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문한다. 기억은 해석과 그 작동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기억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소할 수 없는데, 기억의 세계가 그가 도망친 언어와 해석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이 딜레마다. 그러니까 이 딜레마를 가진 인물 앞에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맨발의 여자가 나타나는 것은, 다른 소설(「안개의 기분」)에서 사슴이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이상하지만, 그만큼 불가피하기도 하다. 이 인물에게 기억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충고하는 작가는 우리에게는 해석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충고하는 것 같다. 맨발의 여자가, 사슴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 언어는 손짓과 몸짓, 표정, 즉 몸의 언어이다.
“몸에서 출발한 언어는 의식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게 단단한 괄호에 담겨 곧바로 내 몸에 도착했다.”(「괄호 밖은 안녕」)
소설에서 그 몸의 언어는 괄호 안에 담겨 표기된다. (가야할 곳이 있어요.), (안녕, 친애하는 낯선 사람). 이런 식으로. 이 몸의 언어는 실은 마음의 언어이기도 하다. 사슴은 ‘마음을 다하면’ 저절로 상대방의 말을 할 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화자는 어머니인 은재씨가 말로 하지 않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 마음의 소리 역시, 맨발 여자의 몸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괄호 안에 담겨 표기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꿈에 동참한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낯선’ 존재가 나타나 화자의 등에 글을 쓴다. “그것이 밤새도록 내 등 가득히 언어를 채워 넣었다. 꼬리표 바로 위에 마침표가 찍히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내 귀에 인사말을 속삭이더니 공중제비를 넘어 창밖으로 사라졌다. (…) 나는 영영 내 등의 언어를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언어를 담은 괄호가 되었다.”
한 사람은, 해석할 수 없고 해석이 필요 없는 누군가의 언어를 담은 괄호라는 이 소설의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것을 인지할 때 우리가 다른 몸/사람이 된다는 것도. 제대로 이소에 성공한 새는 다른 몸/존재이다.
김인숙·소설가

♦괄호 밖은 안녕
이주혜의 전작 ‘여름철 대삼각형’은 독서 모임에서 만난 세 명의 여성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러나 이 소설에 ‘이야기’라는 단어를 붙이면 소설의 폭이 달라진다. ‘여름철 대삼각형’은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소설로 읽힌다. ‘자신’이라는 추상적 존재가 - 어쩌면 자신에게조차, 혹은 자신에게 가장 추상적이었던 존재가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된다. 구체화되면서 숨길을 찾는다. 이해 불가이며 혼돈이며 심지어 용서 불가했던 삶이, 그렇게 덩어리째로 뭉쳐져 있던 삶이 틈과 구멍을 보여준다. 숨이 차오르다가 조용히 잦아든다. 안의 숨과 밖의 바람이 서로 만나는 길을 찾는다. 세 여인이 별을 보러 가서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고요히 잦아드는 순간이다.
신작 ‘괄호 밖의 안녕’은 약 3년 동안 발표한 단편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모두 여덟 편이 실렸는데, 이 소설들 속에서도 인물들은 대개 여행 중이다. 보통은 동행이 있다. ‘안개의 기분’에서는 엄마와 아들이 일본의 도시 구시로로 여행을 간다. 다른 단편 소설 ‘여름 손님입니까’에서는 재일 교포였던 이모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에 잠시 머무는 인물이 나오는데, 장례식 그 자체보다는 화자의 여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망자는 화자의 동행으로 읽힌다. ‘할리와 로사’에서는 두 여성이 함께 여행 중이고 여행지는 주인공 할리의 고향 경주이다. 경주가 할리의 고향인 줄 모르는 로사의 안내에 따라 할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는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만난다. 이야기의 틈을 메워 주는 것은 ‘할리와 로사’에서는 본명도 알지 못하는 로사, ‘여름 손님입니까’에서는 망자라고 추정되는 이상한 존재들, ‘안개의 기분’에서는 예의 바른 사슴이다.
최근 이주혜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그것도 주로 여성들이 줄곧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볼 만하다.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것, 떠나야만 떨쳐 버릴 수 있는 것, 혹은 떠나야만 완성되는 무엇이 있어서일 테다. ‘안개의 기분’에서 모자가 만나는 사슴은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예의 바른 말도 할 줄 아는 사슴인데, 그 능력을 궁금해하는 모자에게 대답한다. “저는 마음을 다하면 저절로 상대방의 말을 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주혜의 소설 속 여행은 마음을 다하는 일이라는 뜻. 뭔가를 포기하거나 외면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가닿아야 하는 ‘곳’, 혹은 ‘것’. 그것은 다시 이야기이다. 과거로 들어가는 이야기, 용서하지 못했던 이야기, 용서할 방법을 몰랐던 이야기.
그래서 인물들은 불가해한 존재들을 만나고, 그곳이 자신의 고향인지도 모르는 동행에게 고향의 길을 안내받기도 한다. 다시 사슴 이야기로 돌아가면 고기도 먹고 연어 덮밥도 먹고 빨대로 하이볼도 빨아 먹을 줄 아는 사슴은 자기 능력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것, 즉 ‘마음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말을 하는데, 사슴의 이 유일한 능력은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이 ‘유일하게’ 소망하는 것일 테다. 사슴 키리의 뿔이 세 갈래로 나 있으며 단단히 여무는 중이라는 묘사도 흥미롭다. 소설 속 모자는 역사의 격랑기를 거쳐 왔으며 여전히 그 흔적과 함께 살고 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가 구분되어야 했던 시대, 여전히 그러한 시대. 그러나 사슴의 뿔은 세 갈래고, 여무는 중이다. 그 뿔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 속 화자는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 그것도 안개의 도시까지 가야 했을까. 하긴 사슴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말하는 사슴이라면.
마음을 다하는 일이 서사로 발화되고 문장으로 직조되는 것은 마음을 다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테다. 그래서 이주혜는 아주 천천히 간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굳이 어디에 반드시 도달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은 ‘안개 속’에 머물거나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은 화자의 동행이 된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테다. 아무리 가도 ‘안개 속’이거나, 어딘가에 닿더라도 괄호로 지워지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 반대일 수도 있겠다. 결국엔 안개를 벗어나거나 괄호를 채우거나. 독자가 어느 곳에 닿을 수 있을지는 스스로 어느 쪽으로 숨길을 내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작가는 다행히 어느 소설 속에서나 동행을 두고 있다. 소설 속 화자도 소설 밖의 독자들도 그래서 외롭지 않을 것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
김종광의 장편소설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는, 죽은 아버지가 작가인 아들과 함께 소설을 고쳐 쓰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죽은 아버지가 작가의 꿈에 나타난다. “됐고, 내 소설은 어떻게 됐냐? 쓰기는 했어?”(10면) “원고 줘 봐라. 내가 읽어 봐야겠다. (……) 내가 읽으면서 흥미 있게 고쳐 주마.”(12면)
아들이 쓴 소설의 초고는, 아버지가 남긴 개인적인 기록인 잡기록과 두 해가량 마을 반장을 하며 쓴 반장 일기에 근거해서 아버지의 일생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기록과 아들이 쓴 소설 초고를 함께 읽어가면서, 아들의 소설이자 아버지의 자서전이기도 한 글을 만들어 간다. 죽어서 작가가 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동창. 1941년생. 고향인 충청도 역경리에서 80평생을 살면서, 다른 형제들의 농사일을 돕고, 공사판 노가다 일을 하고, 광업 노동자로 지하 400m의 막장에서 일하고, 광업 회사에서 해고된 후에는 정부의 축산 장려 정책에 따라 소를 키우는 일도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세 아이를 대학까지 공부시켰고, 그중 큰아들은 농촌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다.
발문을 쓴 박성우 시인의 말처럼. “이 주인공은 80년을 한 시골 마을 역경리에서 살았다. 매일같이 농사를 지었고, 석탄을 캤고, 한우를 40년 키웠다. 내세울 얘깃거리가 없을 듯하기도 한 삶이었다.” 소설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내세울 이야기가 없는 삶, 달리 말하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소설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점이 그것. 물론 아버지의 삶은 이미 그 자체로서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 정도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정도의, 서사적 응축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택시에 우연히 외국인 손님을 태웠다가 의도치 않게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는 설정, 평범한 생활인이 우연한 계기에 의도치 않게 역사적인 사건에 휩쓸려 들어감으로써 주인공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설정이.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예를 들자면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박정희 사망, 광주민주화운동 등과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거대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소설 주인공의 표지로서 승인되었던 것이다.
물론, 김동창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사회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역경리의 농민으로서 4H운동, 재건운동, 새마을운동, 민주화운동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고, 광부로 일할 때에는 회사의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시위를 주동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거대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는 장면은 많지 않다. 역사의 거대 사건들에서 비켜나 있지만 역사의 과정들을 온몸으로 겪고 버티며 살아온 사람. “1970년대가 박통의 죽음으로 끝나자, 새마을운동도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새마을운동은 계속되었다. 운동이란 말 대신 사업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지만.”(183면) 정치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박정희의 죽음은 권위주의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역사적 거대 사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죽음으로 중단되지 않는, 역사적 거대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경험의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김동창은 보여주고 있다.
거대 사건과 서사에 편입되지 않은 역사적 경험의 층위. 김동창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역사적 거대 사건이나 거대 서사가 포착할 수 없는 지점들에서 시작된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의 농민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 작은 몸 어디에 눈물이 그리 흔한지’를 읽으며 다시 생각한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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