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문의 즐거운 독서] <13>『할매』

김상진 기자 2026. 7. 3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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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 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나무 ‘할매’”

『할매』 (황석영 지음/ 창비/ 224쪽/ 2025년)

이 책의 저자 황석영은 1943년에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한 소설가다. 저자는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 연대기』, 『장길산』, 『철도원 삼대』 등의 작품을 썼다. 대산문학상,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을 받았고, 『철도원 삼대』가 인터네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동쪽 하늘 멀리 흰 눈을 덮어쓴 산맥이 연이었고 그 아래로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물결치듯 내려오다가 그치고, 키 작은 관목 숲이 우거진 들판이 나오면서 드넓은 습지 가운데로 강이 나타났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철새 개똥지빠귀가 머나먼 북방 대륙에서 날아와 반도 남쪽 서해안에 인연의 씨앗이 되어 팽나무가 생겨나고 이백오십 년이 지났을 무렵,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유랑민이 떠돌 때였다. 어느 절의 스님이 마을로 내려왔다가 유민 가족이 굶어 죽자 낮은 곳에 묻어주고, 죽어가는 어미가 다섯 살 되는 아기를 맡겼다. 노스님은 아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몽각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그 후 몽각은 불공을 드리러 온 강릉 부사의 딸과 눈이 맞아 절을 떠나 자식을 낳고 화전을 일구고 약초를 캐어 먹고 살았다.

세월이 흘러 두 부부는 노인이 되자, 또 흉년이 되어 소작지를 잃고 걸식하며 떠돌다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몽각은 충청도 내륙에서 금강 기슭을 따라 바닷가로 가다가 작은 절에 객승으로 머물게 된다. 몽각은 언덕 바로 아래 서 있는 우람한 팽나무 옆에 움막을 짓고 열매를 따서 씨를 심었는데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그는 죽어가면서 팽나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이제 내가 먼저 없어지네."

팽나무가 삼백 살쯤 되었을 무렵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동네 이름을 하제라 불렀다. 팽나무가 사백 살쯤 되었을 때 여자 무당 당골네가 팽나무를 몸주로 삼았고, 아들 춘삼은 인근 포구로 드나들며 하제 마을에서 배를 몰기로 으뜸인 사공 유씨를 따라 뱃일을 배웠다. 유 도사공은 바닷길로 청나라에 신부와 천주학쟁이를 태워주었고, 본인도 천주학에 입교했고 세례명으로 분도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전라도 진산의 선비가 제사를 거부한 데서 비롯된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배춘삼은 유분도의 시신을 멍석에 말아 거두었다. 배춘삼은 아들딸을 낳았다. 아들 배경순이 어느 날 농악 걸립패의 놀이군이 되련다는 소리에 기겁하면서, 그 피가 어디로 가랴 싶었다.

팽나무는 언제나 하제 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던 그때로부터 마흔 몇 차례 겨울이 지나갔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주막집 앞마당 건너편에 서 있는 작은 팽나무를 사격 표적으로 삼아 총을 쏘자, 작은 팽나무는 죽어버리고 큰 팽나무 할매만 남았다. 유 신부의 속명은 산하, 세례명은 프란체스코 방지거였다. 그는 유분도가 강경에서 잡혀 순교할 때 가족을 따라갔던 사무엘의 후손이었다.

배동수는 갯벌의 풀밭에 엎드려 가마우지 떼와 전투기가 충돌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었다. 유 신부는 배동수와 함께 '신공항반대 시민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유 신부는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팽나무에 안기듯이 두 팔을 벌리고 뺨을 대 보았다. 그때 그는 분명히 나지막한 쉰 목소리를 들었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소설은 우리 민족이 겪은 온갖 기근과 외침과 동학사건과 천주교 탄압에 이르는 근세사의 재앙을 묵묵히 지켜본 '할매'라는 이름의 팽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전진문 (사)대구독서포럼 이사,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전진문 (사)대구독서포럼 이사,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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