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제강점기 사이, 치열했던 13년…다시 보는 '대한제국'(종합)
日 총독 이름 새겨진 은판·상량문 첫 공개…AI로 살린 고종 모습도
유홍준 "박물관 역사실, 교과서 이상의 의미…일제강점기도 다룰 것"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 대정(大正) 9년 7월 10일'
은빛이 선명한 판 위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초(定礎), 건물을 지을 때 기초를 다진 뒤 머릿돌을 놓으며 만든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쓰이던 연호로 표기한 대정 9년은 1920년을 뜻한다.
건물 남쪽 모서리 아래에서 발견된 은판에는 일본 군인이자 정치가로, 조선 총독으로 두 차례 임명됐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이름이 뚜렷하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남은 흔적이다.
식민 통치에 나선 조선총독부는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고쳤고, 순종(재위 1907∼1910)은 황제에서 왕으로 내려와야 했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짧은 역사로 남게 된 대한제국이 겪은 아픔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 왕조와 일제 강점기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대한제국을 조명한 새로운 전시를 선보인다. 상설전시관의 '대한제국실'에서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대한제국을 조명할 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한제국의 역사를 다룬 공간은 2016년부터 상설전시관 안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어져 있어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데다 공간이 90㎡(약 27평) 규모에 불과해 당대 역사와 문화를 폭넓게 다루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박물관은 공간을 늘려 약 133㎡(약 40평) 규모 전시실에 고종(재위 1863∼1907)이 황제국을 선포한 때부터 국권 침탈의 순간까지의 역사를 새롭게 풀어냈다.

유홍준 관장은 대한제국의 13년 역사는 그동안 '공백'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했다.
유 관장은 "대한제국을 두고 일각에서는 고종이 명색만 황제였다고 보지만, 다른 쪽에서는 근대를 향한 강력한 몸부림이라고 인식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으로 넘어간 뒤 전신, 철도, 교육 등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며 '근대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보물 7점을 포함해 총 65점의 유물로 대한제국의 면면을 비춘다.

황제의 명령을 내릴 때 쓴 국새(國璽·나라를 대표하는 도장), 황색 곤룡포를 착용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고종의 초상 등이 시선을 끈다.
황제 즉위식 과정을 담은 '대례의궤'(大禮儀軌)를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대한제국이 새로운 제도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려 한 노력도 소개한다.
황제 직속 기구인 궁내부 현판, 서양식 예복에 착용한 예검(禮劍·예식이나 의식을 치를 때 차는 칼), 각국의 공사관이 표시된 1902년 지도 등을 모았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1870∼1917)이 1900년 펴낸 수학 교과서에는 '(사람들이) 산수를 못 해서'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그간 광복절을 전후한 시기에만 특별히 공개돼 온 보물 '데니 태극기'는 대한제국실의 주요 유물로 다뤄진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언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데니 태극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유물 안전을 위해 약 3개월만 진본을 공개한 뒤 복제본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순국하기 전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는 뜻을 담아 쓴 유묵 '용공난용연포기재'(庸工難用連抱奇材)도 공개된다.
전시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할 때 중앙탑 아래에서 발견된 상량문,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장과 증서 등이다.
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뒤 부재 대부분은 폐기하고, 일부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이관했으나 정초 은판과 상량문 등은 박물관에 보관해왔다.

두 유물은 발견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전시로 소개한다.
인공지능(AI) 기술로 되살린 고종의 생생한 모습, 대한제국 당시 설치된 각국의 공사관과 역사적 인물을 소개한 영상 등이 전시 관람객의 흥미를 돋운다.
박물관은 대한제국실과 이어진 조선실 일부도 새로 꾸몄다.
박물관 관계자는 "'민(民)의 성장과 시대의 전환'이란 흐름 속에 넓어진 세계 인식, 새로운 지식과의 만남과 충돌 등 변화하는 시대상을 살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은 앞으로 대한제국 이후의 역사도 다룰 계획이다.
유 관장은 "박물관의 역사실은 역사 국정교과서 이상의 의미와 권위를 가진다"며 "일제강점기에 해당하는 근대 역사실도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
유 관장은 제2 상설전시관 건립 추진 계획을 언급하며 "제2 전시관이 들어서면 시대 흐름에 따라 해방이 될 때까지 역사를 확실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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