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원청 직원에 강제추행 당한 하청 직원에 ‘임금 감소’ 전보명령

고나린 기자 2026. 7. 3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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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희롱 원청 책임 묻기 어려워 ‘사각지대’…“제도 보완 필요” 지적
게티이미지뱅크

외국계 수입차 기업 ㄱ사의 하청업체인 ㄴ사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김아무개(33)씨는 지난해 7월 ㄱ사 직원으로부터 강제추행 피해를 당했다. 원청의 가해자 징계 약속을 믿고 경찰 신고까지 미뤘지만 김씨에게 돌아온 것은 임금 감소를 동반한 전보명령이었다. 원·하청 노동자 간 발생한 성희롱·성추행 사건에서 원청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현행 제도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례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씨는 30일 한겨레에 “지난 2월 인사이동을 통보받고 이를 거부하니 해고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10여년간 일한 회사에서 이런 일을 겪게 돼 매일 지옥 같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지난해 7월 ㄱ사와 ㄴ사의 정기회의 이후 열린 회식 자리에서 원청인 ㄱ사 차장으로부터 성희롱과 강제추행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가해자가) 계속 손을 만지고 억지로 안주를 먹였다. 자리가 파한 뒤에도 계속 따라와 힘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 ‘한잔 더 하자’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ㄱ사가 회사와 재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안 좋게 보일까 봐 이도 저도 못해 너무 겁이 났다”고 말했다.

김씨는 소속 회사인 ㄴ사에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ㄱ사 임원이 찾아와 해외 본사에도 알리겠다며 가해자 징계를 약속했고 ㄴ사 임원은 경찰 신고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김씨에게 돌아온 건 2차 가해였다. 그는 “ㄱ사 임원이 원치 않는 면담을 요구하며 가해자의 자필 사과문을 보여줬고 ㄴ사는 한국 지사나 해당 부서 차원에서만 징계하면 안되겠냐는 등 가해자에 대한 징계 요구 수위를 낮춰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인사 불이익도 발생했다. 부서 이동으로 김씨의 월급은 최대 60만원 줄었고, 5년 단위 재계약이 1년 단위로 바뀌었다. 김씨는 ㄱ사가 인사에 사실상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김씨와 ㄴ사 임원의 통화 녹취를 보면 “(ㄱ사가) 김씨의 태도를 언급했다”, “(내가) 양해를 구했지만 ㄱ사가 (인사이동을) 빨리 결정해달라고 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후 해당 임원은 사내 메신저로 김씨에게 “고객사의 업무 배제 요청을 거부 시 회사 경영상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ㄱ사는 한겨레에 “피해자의 부서 이동 조치는 ㄴ사의 경영상 필요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당사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사업주가 가해자 징계와 피해자 보호 등 관련 조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무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사업주의 지휘·감독 아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원·하청처럼 소속은 다르지만 위계적 관계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서 발생한 성희롱은 책임 주체가 불분명해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김씨는 지난달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ㄴ사를 상대로 전보 등 불이익 조치를 바로잡아달라는 ‘고용상 성차별’ 시정 신청을 냈다. 다만 ㄱ사에는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어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했고, 지난 5월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김씨를 대리하는 여수진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ㄴ사는 팀장 보직 신설을 위한 인사라고 주장하지만 김씨에겐 여전히 별도의 보직이 없다”며 “김씨의 인사이동 때문에 기존 부서는 신규 채용을 했고 옮긴 부서는 인력이 1명 초과 배치된 상태”라고 말했다.

서울지노위가 ㄱ사의 부당한 인사개입을 인정해도 책임을 물을 수단이 없는 점은 한계다. 김세정 노무사(노무법인 돌꽃)는 “남녀고용평등법에 ‘고객 등에 의한 성희롱’ 규정이 있지만 원청 노동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부터 다퉈야 해 실효성이 없다”며 “지위를 이용해 불이익을 주기 쉬운 원·하청 관계도 포섭되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 노무사도 “하청업체가 원청을 조사하거나 분리 조치하기엔 한계가 있다”며 “사업주에서 노무 제공자로 넓혀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조사 및 조치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차별 시정신청에 대한 서울지노위의 심문회의는 오는 31일 열린다. 김씨는 “계약이 끊길까 봐 하청업체가 소속 직원을 감싸지 못하고 원청 비위를 맞추는 행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법의 보호가 필요하다”며 “하청노동자들이 부당한 일을 겪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ㄱ사는 “(강제추행 사건은) 가해 지목자에 대한 엄중 경고 및 피해자에 대한 사과, 당사자 간 분리 등 피해자가 요청한 조치를 즉시 이행했다”고 밝혔다. ㄴ사는 한겨레에 “취재에 응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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