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미, 뉴욕서 가장 높은 별이 되다
한국인 역대 세 번째로 승격
작년 정강이 부상으로
넉달 동안 무대 떠나
절제로 더 깊어진 예술
러 바가노바 스타일에
美 재즈·현대작품 접목
새로운 발레세계 개척
내달 국립극장서 공연

“박선미를 다음 시즌 수석무용수(principal dancer)로 승급합니다.”
지난 15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여름 시즌 마지막 주를 장식한 ‘백조의 호수’ 피날레 때의 일이다. 오데트와 오딜 역을 처음으로 맡아 무대를 마친 박선미(27·사진)가 커튼콜을 하며 숨을 고르던 순간, 수전 재피 ABT 예술감독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관객도, 박선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발표였다. 재피 감독은 “박선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모든 춤에 조용한 힘을 불어넣는 무용수”라며 “맡겨진 모든 도전을 훌륭히 해냈고,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고 승급 배경을 설명했다.

ABT 수석은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도 무용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 꼽힌다. 깜짝 승급 발표가 이뤄진 무대는 발레리나의 기량과 예술성을 모두 시험하는 대표 레퍼토리 ‘백조의 호수’였다. 순수한 백조 오데트와 치명적인 흑조 오딜을 한 무대에서 오가는 이 작품의 첫 주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선미는 ABT에 합류한 지 5년도 안 돼 최고 자리에 올랐다. 한국인으로서는 서희, 안주원에 이어 세 번째 수석무용수 탄생이다. 박선미는 최근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승급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어요. 백조의 호수로 데뷔하는 날인 만큼 객석에 엄마도 계셨죠. 객석에서 많이 우셨다더라고요. 승급 발표를 듣고 엄마가 제게 한 첫 한마디는 이거였어요. ‘정말 수고했다’.”
부상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
화려한 승급 뒤에는 누구보다 치열한 준비가 있었다. 백조와 흑조는 한 사람이 연기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학생 시절부터 ‘백조의 호수’는 그에게 두려운 작품이었다. 특히 흑조는 어려워하던 역할이다. 긴장한 만큼 실수도 잦았다. 그를 가장 오래 지켜본 어머니마저 “선미가 흑조를 출 때면 떠는 게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무대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극복해야 했어요. 하루하루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연습했어요. 견갑골에서부터 팔을 쓰는 감각을 만들려고 ‘테라밴드’를 움켜쥐고 팔도 수십 번씩 돌렸고, 새의 움직임을 연구하려고 유튜브에서 새 영상도 찾아볼 정도였어요.”
동작이 몸에 익자 그는 음악 안에서 감정선을 하나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완벽한 백조를 만든 것은 피나는 연습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그는 정강이 스트레스 골절 직전까지 가는 부상으로 넉 달 넘게 무대를 떠나야 했다. 쉼 없이 달려온 무용수에게 찾아온 첫 공백은 절망적이었지만, 그 ‘멈춤’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가장 단단히 다져놨다.
“예전에는 무조건 많이 연습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치고 나니까 몸을 쉬게 하는 방법,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처음 배웠어요.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날의 ‘백조의 호수’도 없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시작한 발레. 처음엔 좋아하지 않던 발레가 삶의 중심이 된 데에는 스승의 존재가 컸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에서 만난 은사 조주현 교수는 어린 박선미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인물이다. “발레가 서툰 제게 어떤 가능성을 보셨는지 리허설도 많이 시키고, 좋은 역할도 많이 맡겨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덕분에 발레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뉴욕을 매료할 다음 무대
한국에서 정교한 러시아 바가노바 스타일을 몸에 익힌 그는 2019년 뉴욕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 입단했고 2022년 정단원이 된 지 7개월 만에 솔리스트가 됐다. 그즈음 박선미의 예술 세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 미국의 재즈와 조지 발란신의 현대적 작품이 낯설기보다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고. 춤 자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작품을 대하는 독창적인 방식도 그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선미는 완벽한 테크닉을 몸에 완전히 익혀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낸 뒤에야 비로소 인물의 서사를 덧입힌다. ‘라이크 워터 포 초콜릿(Like Water for Chocolate)’을 준비할 때는 원작 소설을 읽으며 인물의 고통과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백조의 호수’에서도 날갯짓 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박선미는 무대 뒤에서 공연 직전까지 손이 떨릴 정도로 지독한 긴장과 싸운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조명이 비추는 순간 거짓말처럼 객석의 소음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린다고 말한다. 올가을 시즌부터 수석무용수로 무대에 서지만 달라질 건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관객들이 ‘선미는 정말 무대를 즐기는 무용수구나’라고 느끼면 좋겠어요. 언젠가 모두가 기억하는 발레리나로 남는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박선미는 다음달 21일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립 30주년 기념 공연 ‘리: 무브 에라(RE: MOVE ERA)’에 출연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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