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더럽혀라! 기후변화 시대, 건축 비평이 할 일

아르떼 2026. 7. 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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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백승한의 한국 현대건축 깊이 읽기
기후위기 시대, 건축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글에서 나는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지구적 환경위기 상황 가운데 건축 비평이 지녀야 할 태도와 실천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아이러니와 역설적 측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야기의 시작으로 제19회 2025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주제에 주목한다. 당시의 비엔날레 주제는 ‘Intelligens: Natural. Artificial. Collective.’였다. 이는 ‘지성: 자연적. 인공적. 집단적.’으로 번역된 바 있다.1)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지능’을 뜻하는 영단어 intelligence의 gence가 gens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gens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한 카를로 라티(Carlo Ratti)의 선언문(manifesto), 「지성: 새로운 적응의 건축을 향하여」에서 적어도 세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2)


첫 번째로, gens는 ‘사람(people)’을 뜻한다. 하지만 그 함의는 좀 더 구체적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위 단어는 씨족이나 부족(tribe)을 뜻한다. 대도시의 익명적 군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소그룹에 가깝다. 이는 긴밀하고 상호소통적인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두 번째 단서는 부제로 등장하는 세 개의 형용사 ‘자연적’, ‘인공적’, 그리고 ‘집단적’에 있다. 이는 자연과 인공을 엄밀히 구분하는 대신, 서로 뒤얽힌 문제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이에 집단적으로 대응하고 대안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맥락으로 풀이된다. 라티의 글 제목 바로 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문장 “This is not a slogan. It is a call to action”이 암시하는 것처럼, 라티에게 중요한 것은 (집단) 행동이다. 오늘날 건축가는 기후변화와 함께 동식물의 멸종 등 각종 위기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서는 보다 직접적이다. 대문자화되어 등장하는 GENS는 비엔날레 일부가 열리는, 베니스에 위치한 아르세날레(Arsenale)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공공 프로그램을 지칭한다(GENS Public Programme). 이는 일상적인 대화부터 워크숍과 학회 등 각종 이벤트를 주최하면서 폭넓은 대화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플랫폼 구축 및 실행과 관련한다.3)

라티가 말하는 gens는 오늘날의 각종 위기 상황에 주목하고 맞서면서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공유하기 위한 일종의 개념적 플랫폼이다. “건축은 항상 기후에 대한 응답이었다”라는 선언문에서의 표현처럼, 그는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gens 개념을 위시한 그의 선언은 각 국가관에 일관되게 반영되고 작동한 것일까? 가령 <두껍아 두껍아: 집의 시간>(영문제목: Little Toad, Little Toad: Unbuilding Pavilion)이라는 제목을 선보인 한국관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는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다. 심지어 서로 긴장이나 모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근거로서 기획 취지에 대한 설명문 및 참여 작가의 작업과 글에 주목해볼 수 있다.

2026년 2~4월 두 달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귀국전 소개문에 따르면, 두꺼비를 은유적으로 삼은 이 전시는 “한국관의 [1995년] 건립 계기와 과거를 조명하며 한국관의 미래를 탐색”하는 데 집중하였다.4)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의 기획자(CAC: 정다영, 김희정, 정성규)와 네 사람의 참여 작가(김현종, 박희찬, 양예나, 이다미)는 한국관을 “중성적인 전시 장소가 아니라 다층적 의미가 담긴 유기적 생명체로” 바라본다.5) 아울러 해당 건물이 “기존 요소(방치된 벽돌 건물과 보호수목)를 보존할 것”, “지면을 훼손하지 않을 것”, 그리고 “언제든 철거할 수 있게 지을 것”이라는 세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건립된 사실에 주목하였다.6)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파빌리온 자체보다 그 주변을 둘러싼 나무 등의 자연환경이다. 하지만 작업의 면면을 살펴보면 꼭 그렇게 이분법적 구분이 유효하지는 않다. 대신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라 보인다. 가령 이다미는 “한국관을 지키는 ‘나무’와 이곳을 드나드는 고양이 ‘무카’ 등 비인간적 존재들”을 그의 서사에 등장시키면서, 그간 건축 행위에 가려져 온 “숨은 존재들을 화자로” 불러낸다.7)


그렇게 소환된 숨은 존재들은 텍스트와 시각 이미지로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며, 그간 건축 내부 담론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관 서사에 개입한다.

이는 사료에 의거하는 연대기적인 건축 역사 서술과 낯선 관계에 놓인다.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이를 엄밀한 방식으로 분류하거나 소개하고 있지는 않은 탓에, 관람자는 그의 전시를 보고 난 이후에도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를 –적어도 당장에는– 명확히 그리기 어려울 수 있다.8) 이는 분명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한편 박희찬은 <나무의 시간>이라는 작업에서 “한국관의 중요한 설계 조건인 ‘나무’에 반응하는 건축적 장치”를 제안한다.9)


이를 구성하는 세 개 작업 중 하나인 <엘리베이티드 게이즈 1995>는 관람자로 하여금 잠망경처럼 생긴 장치를 통해 나무 위의 풍경을 지면에서 감상할 수 있게끔 한다. 한편 변형과 이동이 가능한 모듈형 구조물로 이루어진 <자르디니 건축 여행자>는 전망 데크, 사다리, 벤치, 무대, 전시 구조물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하다.10)

비록 형식적으로는 많이 달라 보이지만, 이다미와 박희찬의 작업 사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김석철과 프랑코 만쿠조(Franco Mancuso) 두 건축가가 설계하였다는 사실관계 자체보다는 그 주변 풍경과 소리 등 감각 차원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작품과 배경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아니면, 적어도, 이를 유예시킨다. <나무의 시간>에서 한국관은 주인공이 아니다. “참여 작가들에게 건축을 전시의 배경이 아니라 해석할 대상으로 제시”하였으며 “각자의 작업을 나무·땅·바다·역사와의 관계로 확장하였다”는 귀국전 설명처럼, 나무와 관계 맺는 행위는 건축 설계를 둘러싼 내부 담론에 머무르는 대신 땅, 바다, 역사 등 보다 근본적인 삶의 토대를 생각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11)

한국관의 의제와 작업은 추상적이고 미묘하다. 그리고 사변적이다(speculative). 그런 점에서 라티가 주목한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는 결이 상당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한국관을 “사물(thing)”로 간주한다는 정다영의 관점은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12) 그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를 언급하면서 한국관이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또 다른 존재양식”을 촉발할 수 있는 “사물/건축”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13)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으로 잘 알려진 라투르의 연구에서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gency)로서의 사물 개념은 중요하다. 그에게 각종 동식물과 사물 등 인간이 아닌 것들은 인간과 대등한 위상에 놓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길에 있는 나무와 풀은 인간적인 언어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상호 영향 관계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와 교감한다.

만들어진 건축물은 반드시 의도한 대로 사용되거나 인식되지 않는다. 그 사용과 경험 방식 그리고 의미를 직조하고 풀어나가는 방식 모두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는 건축이 가진 매력적인 측면이자 동시에 난제(aporia)이다. 건축물을 설계함으로써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가시적 성과를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도모하려 할 때, 지어진(또는 지어지지 않은) 설계 작업과 그 의미나 가치, 또는 해석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집은 단지 살기 위한 기계가 아니고 미술관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물리적인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닌 것처럼, 지어진 건축물에는 그 이후의 사용과 경험 방식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기획자와 작가는 모두 한국관이라는 동일한 참조대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들의 서사에서 참조대상은 느슨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작업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2025년 4월 발행된 영문 도록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관 현장에 설치된 이다미의 작업은 오직 몇 장의 사진들로만 확인 가능하다. 한편 박희찬의 경우 자세한 설명과 도면, 다이어그램 등 많은 시각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후위기, 인류세, 집단 지성, 지속가능성과 같은 사회적 의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전체 주제와의 관계성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어려움과 가능성이 공존한다. 비엔날레와 같은 대형 전시에서 건축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기능이 빠졌기 때문이다. 기능 없는 건축은 온갖 디테일한 현실적인 이슈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예술작품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예술과 건축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으면서, 관객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염원한다. 하지만 라티의 행동주의와 한국관의 사변적 실천 양자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향은 불가피하게 시차를 지닌다는 점이다. 전시를 본 건축가 내지 관련 연구자는 ‘즉각’ 기후위기 운동에 뛰어들 수 있을까? 아니면 두꺼비의 은유를 목도한 누군가가 후속 작업으로 이에 응답하면서 소통과 연대의 실타래를 능숙하게 직조할 수 있을까? 어느 경우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취가 가시화된다고 할지라도 이는 참조 대상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평행선을 유지하는 이상이 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사변적 작업에는 한계와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건축에서 필요한 것은 정다영이 말하는 ‘짓기(build)’에 대한 시적 제스처로서의 ‘다르게 짓기’만큼이나(unbuild), 송률과 크리스티안 슈바이처가 말하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 “짓기를 거부하는 것(refusing to build)”일 수도 있다.14) 하지만 사변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누구도 지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건설의 흐름을 쉽게 막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사변적 관점은 긍정적인 차원에서 관습과 선입견을 유보시키고, 그렇게 유예된 시간 속에서 새로운 논리와 주장을 풀어내기를 지향한다. 그 누군가가 이로부터 영향받고 후속 작업을 ‘지금 당장’ 공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2025년 한국관이 지니는 미덕은 이와 같은 사변적인 관점과 실천 전술에 있다. 그리고 이를 반드시 총감독 라티의 선언적 의제와 긴밀히 연동시켜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양쪽 모두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체제를 벗어나려 하든 아니면 그 안에서 내파(implosion)를 시도하던 간에, 비엔날레마저 제도와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적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건축이 늘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려는 태도이다. ‘반’의 정신에 기반하는 저항적 태도이든 아니면 ‘함께하기’의 윤리이든 간에, 문제를 풀려 한다면 그다지 이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바로 이 얽힌, 뒤틀린 상황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 비평 역시 비슷하다. 비평은 대체로 늘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상황은 참조대상인 작가(건축가)의 작업과 연동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금 신자유주의적 세계와 뒤얽힌 채 펼쳐진다. 이념과 기술 그리고 정치경제의 구도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2020년대에서 이를 도외시하고 비평을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시대정신’이라는 용어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요즈음, 비평은 시대를 장엄하게 논한다기보다는 시대로 귀속될 수 없는,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과 맞닥뜨리면서 휘발될 수 있는 서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비평가의 역할은 불편함과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기술-매체적인 상황 속에서 건축이라는 용어 정의 또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경제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건축은 점점 대형화되었으며,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맥을 나란히 하면서 변모해오고 있다.

서구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려 한 탈식민주의 건축 담론의 역사가 있어 왔지만, 건축은 지금도 여전히 서구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울러 기후변화 시대에서 안정과 구축을 전제로 하는 건축 개념 자체가 의문시되어오고 있으며, ‘건축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풀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은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비판적 거리를 두고 사태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비평의 태도에 대한 가치는 2000년대가 시작한 이후 이미 절하되었거나, 각종 콘텐츠 산업과는 달리 아직 잔존해 있지만 그 존재감은 희미해진 상황으로 보인다.

만약 2025년 비엔날레 한국관이라는 미시적인 상황만을 다룬 이 짧은 글이 당대의 건축 비평의 가치와 전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어쩌면, 바로 이 희미해진 상황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은 국내의 전반적인 인식 상황 속에서, 건축 비평은 건축이라는 상황(내지 사태)에 새로운 ‘얼룩(stain)’을 묻히고, 당연해 보이는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인 건축물에 주목하게끔 하면서, 그로부터 나름의 의미를 찾아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태초에 건축은 이러이러했다’라든지, 아니면 ‘건축은 이래야 한다’라는 신화와 당위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태를 파악해나가려는 태도가 중요할 수 있다. 헬렌 프리쇼(Hélène Frichot)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건축을 ‘더럽히고 문제 상황에 위치시키면서’ 잊혔거나 억압된 생각과 감각,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간 및 비인간 개체들 간의 관계 맺기를 활성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15) 하지만 이는 희망적인 결말을 담보하지 못할 수 있다. 열린 차원에서의 건축(그리고 ‘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상황)을 문제시하는 행위는, 온전히 공론화될 수 없는 생각과 감각과 상충하고 나아가 공통분모만큼이나 차이를 ‘더’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희망적인지조차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비활성 상태보다는 차이를 품는, 문제를 촉발하는 활성화된 상황들이 어쩌면 건축을, 그리고 건축 비평을 앞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조금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백승한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미술사학 박사)


참고문헌

1) 이지회, 주제전: 기후, 지능, 건축의 공동체적 전환, SPACE(공간)」 2025년 7월호(통권 692호)
2) 카를로 라티의 2025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전시 소개와 선언문
3) 2025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와 관련한 공공 프로그램 ‘GENS’에 대한 소개
4~7) 베니스비엔날레 제19회 국제건축전 한국관 귀국전 <두껍아 두껍아: 집의 시간>에 대한 아르코미술관 소개문
8) Lee Dammy, “Overwriting, Overriding,” (pp. 117-129), Little Toad, Little Toad: Unbuilding Pavilion, eds. Park Junghyun & Kwak Seung-Chan (Paju: Propaganda, 2025): 119.
9) <두껍아 두껍아: 집의 시간> 소개문
10) Heechan Park, “Time for Trees” (pp.147-162), Little Toad, Little Toad, 150.
11) <두껍아 두껍아: 집의 시간> 소개문
12~13) Chung Dahyoung, “Prologue - From Unbuilding to Living: Rethinking the Pavilion” (pp. 7-12), Little Toad, Little Toad, 11.
14) Song Ryul & Christian Schweitzer, “Sustainability, Architecture and the Venice Biennale” (pp. 206-217), Little Toad, Little Toad: Unbuilding Pavilion, eds. Park Junghyun & Kwak Seung-Chan (Paju: Propaganda, 2025): 211.
15) Hélène Frichot, Dirty Theory: Troubling Architecture (Baunach: Spurbuchverlag, 201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