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주 변동성, 5년 전 ‘황의 저주’ 영국에서 재소환
CS 무너뜨린 5년 전 빌황 사태 재조명
위험 분산된 점은 그때와 달라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시작된 반도체주 변동성이 런던 금융가마저 흔들고 있다. 29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영란은행(BoE) 산하 건전성감독청(PRA)은 런던에 거점을 둔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들의 아시아 주식 위험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수 아시아 AI 관련 기업에만 지나치게 쏠리는 투자를 막겠다는 취지다.
FT는 영국에서 영업하는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이 한국 SK하이닉스, 대만 TSMC, 중국 캄브리콘테크놀로지 등 아시아의 AI 기업에 돈을 쏟아부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종목들이 급락하면 대형 은행에 위험이 전이되고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이어질 수 있는 점을 위험 요소로 지적했다.
이 투자 구조는 5년 전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를 몰락시킨 한국계 월가 큰손 빌 황(한국명 황성국)의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빌 황이 세운 아케고스캐피털은 파생상품을 통해 가진 돈의 5배나 빌려서 중국 주식 등에 투자했다. 그러나 투자한 주식의 폭락으로 연쇄 부실이 발생하면서 ‘황의 저주’는 결국 CS를 무너뜨리며 끝났다.
◇영란은행, 亞 AI주 쏠린 헤지펀드 정조준
AI 인프라 관련 기업 가치가 치솟자 헤지펀드들은 앞다퉈 자금을 쏟았고, 보유 자산 가치가 불어나면서 차입도 함께 늘었다.
문제는 이 종목들이 빠르게 오른 만큼 빠르게 빠진다는 점이다. FT는 지난 28일 SK하이닉스가 하루에만 약 15% 급락해 시가총액이 1000억달러 이상 증발한 점을 위험 요소로 지적했다. 중국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CXMT)가 27일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며 주가가 466% 폭등한 점도 급락을 불러올 수 있다고 꼽았다.
영란은행의 우려는 연쇄 반응이다. 차입을 일으켜 한 투자가 해당 종목 급락으로 큰 손실을 내면 고객이 채무를 갚지 못하고, 그 손실이 다시 은행으로 번진다.
차입 투자를 하는 고객이 파생상품(옵션)으로 돈을 거는 규모(배수)를 더 키우거나, 헤지펀드가 아시아의 단기 개인 자금을 끌어다가 투자하는 정황도 감시 대상이라고 FT는 전했다. 위기가 오면 빨리 빼서 위기를 가속화하는 개인 자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보겠다는 뜻이다.
영란은행은 위험이 과도하다고 판단하면 은행이 보유해야 할 유동자산 기준을 높일 수 있다고 FT는 전했다. 영란은행은 확인되는 내용에 따라 해당 은행들에 경고 서한을 보내거나 고위 감독 당국자가 공개 브리핑을 할 수도 있다.

◇빌 황의 ‘아케고스 사태’ 데자뷔
2021년 한국계 미국인 빌 황의 아케고스캐피털은 총수익스와프(TRS) 기법 등을 활용해 원금 100억달러의 5배인 500억달러를 중국 주식, 미국 미디어주 등 소수 종목에 베팅했다.
TRS는 투자은행이 대신 주식을 사서 보유하고, 그 주식에서 나오는 손익을 고객에게 그대로 넘기는 대신 수수료를 받는 계약이다. 주식은 은행이 형식적으로 갖고, 오르든 내리든 손익은 고객이 온전히 가져간다. 투자가 실패하면 그 손실도 고객이 진다. 고객은 증거금만 맡기고도 그보다 훨씬 큰 자산에 돈을 거는 셈인데, 이 구조 자체가 곧 차입 효과를 낸다. 아케고스가 원금의 5배를 굴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케고스 사태 때 빌황은 여러 투자은행에 나눠서 주식 거래를 맡겼다. TRS의 특성상 각 은행은 자신이 맡은 투자만 볼 수 있어, 전체 투자가 얼마나 크고 어디에 집중됐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2021년 3월 미국 미디어주인 비아콤CBS 주가가 급락했다. 담보 가치가 최저 기준을 밑돌자 담보를 채워 넣으라는 마진콜이 아케고스에게 걸려왔다. 아케고스는 이틀 만에 약 200억달러(약 26조원)를 잃고 무너졌다.
불똥은 자금을 빌려준 은행으로 튀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손실 합계는 100억달러(약 15조원)를 넘었다. CS가 가장 많은 55억달러(약 7조6000억원)를 잃었고, 이 충격은 CS가 2023년 UBS에 흡수되는 몰락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일본 투자은행 노무라도 28억5000만달러를 물렸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빠르게 담보로 갖고 있던 주식을 던져서 손실을 줄였다. 하지만 대응이 늦은 곳은 직격탄을 맞았다.
빌 황은 사기와 시세조종 등 혐의로 2024년 11월 18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이번은 위험이 분산돼 있어 빌 황 때와는 달라
아케고스 사태는 한 운용사가 집중적으로 베팅하다가 터진 사건이었다. 반면 이번은 다수의 헤지펀드와 개인 자금이 아시아 AI주에 몰린 형태다. 투자 주체가 흩어져 있어 한 곳이 무너져도 아케고스처럼 즉각적인 대형 디폴트로 번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영란은행의 조사도 사고가 터진 뒤의 수습이 아니라, 제2의 아케고스를 막기 위한 사전 점검 성격이다.
한국 시장과의 연결 고리는 SK하이닉스다. 국내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이 이 종목의 하루 변동성을 키우고, 그 종목을 차입해서 투자한 글로벌 헤지펀드 위험이 다시 런던 투자은행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다만 영란은행이 한국의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을 직접 조사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영국 헤지펀드들의 투자 행태는 빌 황의 투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소수 종목에 집중됐고, 금융당국 시야에서 벗어난 장외파생을 통한 차입 투자(레버리지)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또, 여러 은행에 분산돼 전체가 보이지 않고, 주가가 급락할 경우 강제청산이 강제청산을 부르는 구조도 비슷하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지난 1~5월 글로벌 헤지펀드의 누적 차입 투자 증가 폭은 2016년 통계 집계 이후 최대였다. 총 차입 잔액도 지난 6월 원본의 약 294%로 5년 래 최고치였다. 경계 요소는 충분히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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