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사라진 조선의 ‘입상 화가’ 8명 작품, 일본 왕실이 갖고 있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멀리 산과 숲, 밭을 배경으로 망건 쓰고 담뱃대를 문 노인의 풍모가 다가온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패전하기 전 일본 황실 사무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였던 궁내성이 1922~1933년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서 입상한 조선인·일본인 근대 작가들의 작품 60여점을 사들여 황실 소장품으로 삼았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확인됐다.
남은 조선 작가들의 그림은 서양화 4점과 문인화, 병풍 등 동양화 5점으로 나뉘는데, 병풍을 뺀 모든 작품이 입상작이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본 황실소장품박물관에 온전히 보관
1922~1933년 조선미전 입상작 사들여

멀리 산과 숲, 밭을 배경으로 망건 쓰고 담뱃대를 문 노인의 풍모가 다가온다. 기울어지는 햇빛을 받아 입고 있는 허연 옷자락 곳곳에 그늘이 진 옆 모습을 인상파 분위기로 그렸다. 102년 전 국내 최초의 양화가 고희동(1886~1965)이 묘사한 습작 인물화의 생생한 모습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렇게 오랜 세월 잊혀졌던 조선 근대 그림의 숨은 수작들이 일본 도쿄 일왕의 황궁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희동을 비롯해 윤희순(1902~1947), 김용진(1878~1968), 홍득순(1905~?) 등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화단을 움직였던 서화가 9명의 그림들이 일왕의 거처인 도쿄 황궁의 황실소장품박물관(산노마루쇼조칸)에 100년 가까이 온전하게 보관돼온 사실이 밝혀졌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패전하기 전 일본 황실 사무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였던 궁내성이 1922~1933년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서 입상한 조선인·일본인 근대 작가들의 작품 60여점을 사들여 황실 소장품으로 삼았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확인됐다.
그동안 조선미전 도록에 희미한 도판으로만 나왔을 뿐, 실체가 어디 있는지 알 길 없어 망실된 것으로만 여겨져온 한국 근대미술사 중요 작품 실체가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런 사실을 한국 학계에 처음 알린 이는 황실소장품박물관의 다나카 준이치로 주임연구원이다. 그는 지난 28일 서울 공덕동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회장 조수진) 부설 근현대미술연구소의 발표회장에 나와 자신이 지난 3월 일본에서 먼저 발표한 ‘조선미술전람회와 궁내성’의 논고를 슬라이드 도판과 함께 공개했다.
‘조선 미술전람회와 궁내성’은 황실소장품박물관에 소장된 작품들 중 궁내성이 당시 구입한 조선미전 입상작 회화 작품들에 대한 첫 조사 연구 결과물이다. 다나카는 궁내청 서릉부 도서과 궁내공문서관에 소장된 ‘장려록’과 ‘장려어매상품연도별부’를 바탕으로 궁내성이 매입을 시작한 1922년부터 마지막으로 구입한 1933년까지 과정을 개괄하고, 그 변천과 실태를 검토했다. 그 결과 11년간 입상작을 비롯한 출품작 62점을 궁내성이 매입했고, 이들 가운데 조선 작가 9명(고희동, 윤희순, 김창섭, 홍득순, 황용하, 박호병, 김우범, 김용진, 김규진)의 그림과 글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남은 조선 작가들의 그림은 서양화 4점과 문인화, 병풍 등 동양화 5점으로 나뉘는데, 병풍을 뺀 모든 작품이 입상작이다. 특히 서양화 쪽은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1920~30년대 작가들의 실물이 나와 눈길을 끈다. 고희동의 유화 ‘습작’은 1924년 3회 조선미전 4등 수상작으로, 1910년대 자화상 3점에 이어 실물이 확인된 네번째 유화다. 다나카는 “고희동은 3회 전을 마지막으로 조선미전에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동양화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공적인 자리에서 그가 발표한 마지막 유화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짚었다. 노란 저고리 입은 조선 소녀를 그린 윤희순의 ‘황의소녀’(1930)와 도쿄 니콜라이 성당을 그린 김창섭의 ‘성당’(1923), 1920년대 말 홍수로 무너진 수원 방화수류정 일대 성벽 자취를 그린 홍득순의 ‘교외의 방화수류정’(1929) 등도 주목된다.
발표회를 준비한 근현대미술연구소의 권행가 소장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조선미전 출품작들이 상당수 전하지 않는데다 1920년대 중후반 조선 근대화단의 실물 그림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이번에 공개된 양화들은 근대회화사의 공백을 메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자리에서는 당대 화단의 실력자였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이 1923년 2회 조선미전 심사위원단에 참여하면서 참고 작품으로 냈던 17체 병풍도 구입품으로 일부 몸체 사진이 공개됐으나 전체 화폭은 훼손된 뒷면을 수복한 뒤 내보일 계획이라고 다나카는 전했다.

다나카는 “조선미전 입상작 말고도 각계 고위급 인사들이 기증하거나 다른 경로로 입수한 조선 작가들의 작품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전모를 구체적으로 조사한 적은 없다”며 “앞으로 한국 학계와 협업해 한국 근대미술사 주요 작가들이 포함된 소장품 조사 연구를 심화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의 논고는 학회 학술지인 ‘한국근현대미술사학’(2026년 상반기, 8월 초 발간)에 ‘조선미술전람회와 궁내성: 잊혀진 한국근대미술컬렉션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실릴 예정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서울·경기 첫 ‘폭염중대경보’ 발효…최고기온 39도 안팎
- 46.7도 치솟는 비닐하우스 ‘집’…이주노동자의 ‘폭염과 사투’ [현장]
- 마음 급한 트럼프 “참수 전 마지막 기회”…이란은 “미국과 직접 협상 안 해”
- “너무 더워 사람이 안 와요”…고깃집 사장님도 “하루 딱 3팀” [현장]
- [Q&A] ‘시가 30억 종부세’ 실거주 91만→76만원, 비거주는?
- “‘가난은 이민자들 때문’…프랑스 극우, 서민 분노 먹고 자랐다” [인터뷰]
- ‘슈퍼마켓계 디즈니랜드’…관광하러 간다는 중국 팡둥라이 열광 왜?
- “관저 안에 코바나 사무실 준비”…특검, 21그램 관계자 진술 확보
- 미국 엔화 부양 나선 이유는…“미 국채 금리와 일 대미 투자 때문”
-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2.8%…석달 만에 2%대로 내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