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은 작가, 몸은 약사… 둘 다 ‘측은지심’ 필수”
<6> 등단 15년 차 소설가 김희선

8일 오후 3시 강원 원주시 평원동 한 약국. 카운터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흰 가운을 입은 소설가 김희선(54)이 차분한 목소리로 복약 안내를 하고 있었다. “약이 일주일 분이거든요. 하루 두 번 아침, 저녁 식사하고 드시면 되세요.”
소설가라면 쓰지 않을 문법에 어긋나는 ‘되세요’체를 쓴 것은 그가 이날은 약사로 일하며 손님을 상대하는 중이었기 때문. 수시로 손님이 들락거리는 가운데 인터뷰가 진행됐다. 김희선은 약사였다가, 소설가였다가, 다시 약사가 됐다. 평소 약국에는 소설가 자아를 들이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약국에서 두 자아를 바삐 오갔다.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강원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약사로 일하다가 방송통신대 국문과에 편입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여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소설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등단하면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2011년 습작 수업에서 완성한 소설을 문예지에 투고했고, 단편 ‘교육의 탄생’으로 등단했다.
그는 문단에 갓 발을 내디딘 때를 떠올리며 “등단이 얼마나 어려운지, 등단한 뒤에 계속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미리 알았으면 겁나서 원고를 못 보냈을 것 같다”며 “아무것도 모르던 백지 상태였다. 아예 모르니까 시작할 수 있었던 일인 것 같다”고 했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원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다가 이후 관리 약사로 풀타임 근무했다. 대학원에 다니고 등단하면서부터는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겸업은 성공적이었다. 등단 15년 차인 그는 어느덧 소설집 세 권, 장편소설 세 권, 짧은 소설 두 권을 펴냈다. 에세이, 서평집, 선집 등을 포함하면 열 권을 훌쩍 넘는다. 2024년 발표한 장편소설 ‘247의 모든 것’(은행나무)은 본지 동인문학상 최종 심사에 올랐고, 대산문학상을 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지금은 병원 조제실에서 주 이틀 근무하고, 수요일 하루는 지인의 약국에서 일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소설을 쓴다. 저녁 먹고, 강아지 산책을 시킨 다음 밤 10시쯤 자리에 앉아서 새벽 2~3시까지 글을 쓴다. 매일 밤 글쓰기 전에 꼭 지키는 의식도 있다. 박카스 한 병 마시기. 약사 소설가답다. “고순도 무수 카페인에 액상이라 반짝하는 효과가 훨씬 빠르다”고 효능을 설명할 때 신나 보였다. 문단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그에게 건강 상담을 해오는 이가 많고, 그도 흔쾌히 응한다.

김희선은 약사와 소설가 자아가 “딱 반반인 것 같다”며 “정신은 작가이고 몸은 약사인 것 같다”며 웃었다. “이 자리(약국)에서 나가면 약사 일은 굳이 더 생각할 건 없어요. 그런데 소설에는 계속 사로잡혀 있는 거니까.... 물론 사람이 정신으로만 사는 건 아니니 전인적으로 봤을 때 반반인 것 같습니다.”
두 자아가 포개지는 순간은 없을까. 김희선은 오히려 둘을 분리하려 했다. 그에겐 “환자의 이야기를 소설에 절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약사로서 또 소설가로서 지키는 직업 윤리다. “환자분들이 한 이야기라든지, 약국에 와서 있었던 일을 허구적으로 각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진실을 각색하거나 제 입맛에 바꾸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소설가와 약사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측은지심일 것”이라고 김희선은 답했다. “알베르 카뮈가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 서문에 쓴 말인데요. 위대한 작가는 작중 인물을 용서한다고 해요. 인간을 단면적으로 판단하면 작가는 절대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요.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됐을까 접근하면서 파고들어야만 소설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약사도 ‘아파서 힘들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을 대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된다”며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희선 소설가가 마음을 다잡을 때 읽는 문장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처럼 마르탱 뒤 가르도 모든 작중 인물들을 용서한다. 그 삶이 무엇보다도 투쟁이고 싸움이라 해도, 진정한 예술가는 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알베르 카뮈가 마르탱 뒤 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 서문에 쓴 글-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李대통령 선물은 ‘일월오봉도’...카스트 대통령은 칠레産 와인
- 韓·칠레, 핵심광물 협력강화 합의...李 “양국, 이상적 파트너”
- ‘charter flight’는 ‘전세기’, 오페라 극장에서 ‘charter’는?
- 에비, 우니, 노리… ‘海’를 품은 해산물 이름
- 앉아서 푸는 무릎·허리… AI 강사를 따라해보세요
- [55화] “내게 주기로 한 초선을 어찌!”
- ‘2800평 연꽃 바다’ 찍으러 새벽마다 사진작가 몰린다… 남양주 봉선사
- ‘이승만 제거 작전’ 돌입한 미국, 백선엽을 워싱턴으로 초청하다
- 중국 반도체 굴기… 창신메모리에 대해 알아야할 것들
- 오픈AI·앤스로픽은 왜 워싱턴 정가에 로비 자금 쏟아붓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