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해설은 다정한 종합예술”…국내 1호 음성해설작가 서수연 [플랫][여자, 언니, 선배들]

소녀는 언니를 보고 자랍니다. 여기 선배가 된 언니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정표이자 버팀목이 되는 [여자, 언니, 선배들]의 일·커리어 이야기를 플랫이 전달합니다.
눈을 감고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시각 정보를 활용할 수 없는 이들은 무엇을 통해 영화, 공연, 전시를 이해해야 할까? 재미있는 문화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그것을 즐길 수 있을까?
음성해설이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컨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놓친 것,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음성해설로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잖아요. 음성해설은 풍부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이 질문에 서수연 작가(50)는 ‘음성해설’이라고 답한다. 음성해설(Audio Description)은 시각장애인이 시청각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상황을 묘사하는 대본을 쓰고, 이를 음성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뜻한다. 인물의 대사나 효과음을 제외한 다른 정보, 예를 들어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 배경, 장식, 색감 같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귀로 듣게 해주는 것이다.
서수연 작가는 우리나라 1호 음성해설 작가다. 그는 2003년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로 시작해 7800여편의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무용, 마술쇼 등의 음성해설을 맡았다. 그의 이력은 곧 한국에서 장애인의 문화콘텐츠 접근성이 확장돼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수연 작가가 생각하는 음성해설의 가치는 단지 접근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음성해설이 아동, 노인, 외국인 등 말 그대로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모두를 위한 언어로 영상을 번역하는 일의 기쁨에 관해 들었다. 그는 음성해설이 “다정한 종합예술”이라고 했다. 그 다정한 종합예술의 비중은 지상파 기준 10%에 불과하다. 다정함 위에 전문성을 더하고 후속 세대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 그것이 서수연 작가의 목표다.
뛰어들다: 누군가를 위해 쓰고, 읽기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영희가 “아, 이 꽃 귀엽다”라고 하면서 길가의 붉은 꽃을 쓰다듬는 장면이 나온다고 가정하자. 시각장애인에게는 “아, 이 꽃 귀엽다”라는 대사만이 전달되고 쓰다듬는 동작, 꽃이 핀 위치, 꽃의 색깔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를 위해 대사 앞뒤에 [영희는 길가의 붉은 꽃을 들여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쓰다듬는다]는 음성을 별도로 삽입하는 것이 음성해설이고, 별도의 음성해설 대본과 녹음이 필요하다.

- 음성해설은 어떤 일인가요?
“여러 감각 중 시각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80% 이상이라고 해요. 시각장애인은 80% 이상의 정보가 차단되는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죠. 드라마 등 영상에서 대사를 하지 않고 움직이는 부분을 언어로 번역해서 이야기 전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음성해설입니다. 영상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전시 등에도 음성해설이 있어요.”
- 한국 1호 음성해설 작가로서, 선배가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이 두렵진 않았나요?
“전국에 저 혼자 일하던 시기였는데, 그런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시각장애인이 드라마나 영상을 못 봤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이 컸거든요. 읽고, 쓰고, 낭독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게 딱 (성우와 작가를 준비했던) 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게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무조건 앞으로 가자’ 싶었습니다.”
- 현재 한국에는 음성해설 작가가 몇 명 정도 있나요?
“꾸준히 활동하는 분들, 작업에 참여했던 분들까지 합치면 100~200명쯤 될 것 같습니다. 협회가 따로 있지는 않고, 각 기관에서 작가를 뽑아서 교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한국접근성연구센터를 설립해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 음성해설 작가는 주로 어떤 배경을 가진 분들인가요?
“제 경우엔 글쓰기를 많이 보기 때문에 작가 경험이 있는 분들을 우대합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글로 밥벌이를 해 본 사람이요. 왜냐하면 엄연히 이용자가 있잖아요. 가장 크게는 시각장애인들이 음성해설의 도움을 크게 받기 때문에, 음성해설 작가가 가져야 할 무게감과 책임감이 상당합니다. 언어가 탄탄한 분들이 영상의 재미를 더 크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쓰기 부분을 보고 있습니다.”
마주치다: 아직은 낯선 ‘음성해설’

- 음성해설이란 용어가 아직 낯설게 느껴집니다. 같은 뜻으로 화면해설이라는 용어도 쓰이는데요. ‘화면해설’ 대신 ‘음성해설’을 쓰자고 제안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성해설’이 전세계적으로 쓰이는 국제 표준입니다. ‘화면해설’이라고 하면, (주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해설’과 혼동됩니다. 많은 분들이 화면해설이 곧 자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음성해설이라고 하면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이구나’하고 금방 이해하십니다. 또 음성해설은 ‘화면’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화면해설이라는 말이 쓰였던 건, 우리나라가 2000년대 초 미국 방송사에서 비디오해설서비스(DVS)를 벤치마킹해올 때 ‘화면해설’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 방송사가 ‘DVS’란 용어에 저작권을 걸어서 이제 DVS라고는 쓰면 안 돼요.”
- 음성해설이 일종의 번역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그 언어에 잘 맞는 한국어 표현을 써야 하잖아요. 영상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을 제대로 옮기려면 영상언어에 맞는 적확한 언어를 갖고 와야 해요. 그 과정에서 음성해설 작가는 중재를 합니다. (영상 속) 빠르게 흘러가는 여러가지 요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중재자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가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저라면 이 대목에서 ‘애순이가 바다를 본다’ 대신 ‘숨비소리를 낸다’라는 말을 선택하겠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얻으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대학원에서 배운) 번역 분야의 이론과 설명이 음성해설을 더 깊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됐습니다.”
깊어지다: ‘어디까지 옮겨야 하나’, 고민과 딜레마
- 음성해설 작업을 할 때 원작 대본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가요?
“음성해설에서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데요. 그때 대본에 있는 요소를 활용하는 것이 용이합니다. 공간, 인물의 이름, 물건의 종류를 알면 음성해설도 경제적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네모 모양의 전자기기’보다는 ‘태블릿’이라고 하는 것이 경제적이잖아요. 또 감정을 설명할 때 혼란을 줄일 수 있습니다. 대본의 지문에 ‘기쁜 듯 미소짓는다’가 있으면 음성해설에 쉽게 ‘기쁜 듯’이라고 쓸 수 있어요. 나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는 편안함이 드는 것이죠. 그렇지만 대본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절반 정도입니다. 특히 영화는 대본과 다른 경우가 상당히 많고요. 저작권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대본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 어느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석 능력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릴러나 공포물 작업을 할 때는 카메라가 지나가듯이 훑으면서 보여주는 사물을 무심코 놓치게 되는데, 나중에 보면 중요한 정보였던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벽에 칼이 있다’고 서술합니다. 그렇다고 칼만을 너무 강조하면 안되니까 ‘벽에 책, 칼, 노트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쓰지요. 잘 스며들 수 있게끔 해설을 조각하고 재단하는 것도 음성해설 작가의 일입니다.”

- 그러면서도 스포일러는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음성해설에서 스포일러는 절대 해선 안 되지만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운드와 영상이 일치하지 않는 비동기식 사운드가 대표적입니다. 보통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보이는데, 비동기식 사운드는 말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비춥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 1의 1화에서 영희 인형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어요. 참가자들이 ‘저거 뭐냐?’, ‘대가리 X나 크다’라고 소리를 질러요. 그 대사가 나가는 순간 영상에는 (참가자가 아닌) 영희 인형이 나오죠. 전형적인 비동기식 사운드입니다. 비시각장애인은 들으면서 화면을 보니까 ‘대가리 X나 큰 것’이 영희 인형이라고 알 수 있는데 시각장애인은 모릅니다.
그래서 영어판 음성해설은 탁월한 선택을 했어요. 참가자들의 대사 직전에 ‘소녀처럼 생긴 거대한 로봇인형이 서 있다’고 선해설을 했습니다. 화면과 일치하지도 않고 스포일러도 일어나니까 해설로서는 해선 안 되는 것을 했지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저였어도 그렇게 썼을 거예요. 이렇게 고민해서 룰을 깨는 건 인공지능(AI)은 절대 못할 일이죠.”
- 작업하셨던 7800여편 중 가장 도전적이었던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영화 <궤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100분짜리 영화에 대사는 3줄밖에 없었거든요. 그것이 가장 충격이었고 유학을 떠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마술쇼가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사전에 소통할 시간이 많이 없었던데다 미리 준비한 대본도 거의 쓰지 못했거든요. 본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를 보면서 즉석에서 음성해설을 했습니다. 이은결 마술사에게도 지시어를 사용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는데 정말 센스있게 잘 해주셨어요. 그때 중재자의 역할을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협업이라는 점도요.”
- 음성해설 작가의 직업윤리는 무엇인가요?
“쓰다 보면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이 이야기 전체를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해석은 시각장애인 이용자가 할 수 있게끔 한 발 떨어져야 해요. 객관적으로 쓰라는 것이 아니라, 과하게 표현해 답지를 제공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옛날 (무성영화 시절) 변사처럼 신적인 존재, 다 이야기하는 존재와는 달라요. 중재자로서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빛나다: 모두를 위한 음성해설, 우리는 어디쯤

-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역시 음성해설 이용자들이 좋다고 해주실 때죠. 최근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작업했을 때 모니터해주신 분들이 너무 재밌다고 연락주셔서 반가웠고요. 또 저는 음성해설이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컨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방영 당시엔 비시각장애인 팬들이 음성해설 버전으로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을 목격하면서 ‘잘 쓰는 것이 되게 중요하구나’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 비시각장애인으로서 문화재, 영화, 공연 등의 음성해설을 들어보니 감상이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놓친 것,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음성해설로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잖아요.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보여줘도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유학 당시 (영어로 된) 음성해설을 많이 들으며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을 배우니 너무 좋더라고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도 좋지요. 요즘 사람들은 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언어가 약화되기도 하는데, 음성해설은 풍부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 접근성 확장에 관해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예전에 청각장애인들이 (자막이 없는) 한국어 영화를 못 봤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자막이 있는 해외 영화를 주로 볼 수 있었다고요. 그런데 넷플릭스가 한국어 기반 프로그램에도 자막을 제공하면서 센세이션이 됐죠. 비장애인도 ‘어, 너무 편하다’ 이렇게 됐잖아요. 이처럼 청각장애인은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영역이 엄청 넓어졌어요.
그런데 시각장애인은 지상파에서조차 더빙이 사라지면서 아예 외국어로 된 작품은 감상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마블 영화를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 시각장애인 청년 이야기도 있어요. 저는 지상파만이라도 더빙을 부활해야 하고, 그때 반드시 음성해설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자막을 읽기 힘든 사람들 등 더빙과 음성해설이 필요한 이들이 있거든요. 그들이 비록 소수라고 해도 공익적 차원에서라도 더빙은 부활해야 합니다.”
꿈꾸다: 접근성을 확산하고 후속 세대를 기르기

- 음성해설에 임하는 나만의 원칙을 꼽자면 무엇인가요?
“지쳐도 되고 실망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만족스러운 글을 써도 한두달 지나 다시 보면 ‘내가 왜 저렇게 썼지’ 실망하게 되거든요. 잘못된 게 보였다는 건 다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자신에게 지쳐도 되고 실망해도 된다,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꾸벅꾸벅 걸어가면 되죠.”
- 어떤 선배로 남고 싶나요?
“‘저 사람의 발자취가 내게 배움과 위안이 됐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양질의 대본을 쓰는 음성해설 작가를 많이 양성하고 싶고요. 접근성에 관한 연구가 아직 많이 없으니 후속 세대를 위해 논문도 쓰고 싶습니다. 어떤 분야가 뿌리내리려면 학문적 연구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박물관, 전시 등에서 접근성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어떤 사람에게 이 일을 추천하나요?
“글을 잘 쓸 수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쓰다 보면 허리도 아프니까 대충 끝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음성해설은 한번 제작되고 나면 재제작이 힘듭니다. 한번 더 생각하고 여러번 읽어보는 그런 지난한 과정을 이겨내는 마음도 필요하고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 이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관심이 들었을 때는 실행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일단 하면 기술은 늘고 시간은 흘러가고 어느 순간 목표에 도달합니다.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과는 온다고 생각해요. 저의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있는 길이기 때문에 궁금하면 무조건 문을 두드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가면 됩니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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