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헌 시집 ‘다정이 찾아왔다’ ...“자연에서 사람을, 사람에게서 꽃을 보다”

김지은 기자 2026. 7. 2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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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말 이조년(1269∼1343)이 시조에서 읊었던 ‘다정’은 시인에게 불치병이다. 김지헌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다정이 찾아왔다』(청색종이 발행)는 그 병이 뭇생명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여실히 알려준다.

김 시인의 시는 오래전부터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시선 위에서 펼쳐져왔다. 이번 시집에서 그 시선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자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발견하고, 사람을 바라보다가 꽃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나민애가 이 시집 해설에서 제시한 ‘사람-꽃’이라는 개념은 거기서 나왔다. 시 「노랑어리연꽃」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고갱이를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 아래 수반 하나

지난봄 노랑어리연꽃 한 포기를 얻어 수반에 심어 놓고는 아침저녁 줄어드는 물을 채우며 기다렸지요 수반 아래 금이 가 있는 줄은 모르고 물을 채우며 배롱나무 꽃 아래 노랑어리연꽃이 참 잘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에 이미 꽃을 본 듯 웃음이 배곤 했지요 가끔은 고양이들이 그 물을 먹고는 수반 속 구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가기도 했는데, 마치 오래전부터의 약속인 듯 말이죠 한여름엔 수반의 물이 더욱 빠르게 줄어 동네 고양이들이 다 몰려든 줄 알았어요

고양이들이 분주할 때면 쏜살같이 물까치가 다녀가기도 했지요

노랑어리연꽃은 다녀갈 생각이 없는지 배롱나무만 꽃비를 흠뻑 뿌려 주네요

밑동에 금이 간 수반을 메우곤 아침저녁 물을 흘려 넣으니 종일 구름이 머물다 갑니다 여전히 노랑어리연꽃은 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배롱나무 아래 수반은 이 말 저 말 받아 적느라 깜빡 했을까요

어느덧 배롱 꽃도 지고 마당의 나무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에 드는 시간

빈 하늘만 수면 위에 머물다 갑니다

나는 지금껏 무얼 기다렸던 걸까요

60년대식 연애처럼 서성거리다 입도 못 떼던, 한 계절이 다 가도록, 아니 평생을 걸어오면서도 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이었을까요’

-「노랑어리연꽃」 전문

시적 화자는 금이 간 수반에 물을 채우며 노랑어리연꽃이 피기를 기다리지만 꽃은 끝내 피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나는 지금껏 무얼 기다렸던 걸까요”라고 묻고, 그것이 결국 “평생을 걸어오면서도 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이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기다림은 결핍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는 정신의 바탕이다.

「폭염도 시가 되네」는 그 바탕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일상의 꽃을 벼락치듯 발견하는 순간의 성찰을 기록한 작품이다.

‘단맛 든 여름 한 바구니 식탁에 두었는데

깜빡한 사이

물컹한 쉰내로 무너져 내렸다

텃밭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는데

기어이 살겠다고 피워낸 참외꽃

한여름 땡볕 독하게 이겨낸 물증이라는 듯

노랑이 한껏 노랑을 베껴 쓰고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먀

관심 끄고 그냥 지나가시라

이 지독한 폭염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니

단맛이 쓴맛 되어갈 때쯤

벼락치듯 알게 되는 것들

세상의 단맛은 거저 오지 않더라’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시인의 시선은 살아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아야 하는 죽음을 보듬는다. 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이에 대해 “시인은 지상을 살아가는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실존을 절감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순간적 초월을 열망하고 수행해 간다”라고 했다. 「단풍 조문객」과 「벚나무 장례식」,「무연고자 김경철 씨」등이 그런 작품들이다.다. 「애연가- 오탁번 시인」도 실존 인물이었던 선배 시인을 기리며 삶과 죽음의 비의를 탐색한다.

유 교수는 이번 시집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깊은 인연으로 다가온 뭇 존재자들을 특유의 충실성으로 증언하면서도, 어김없이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회귀형 구조를 그의 시는 천천히 이루어 간다. 그러한 ‘시인 김지헌’의 예술적 지향이 우리의 가파른 존재론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주면서 시집 곳곳을 미학적 온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그의 언어보다 먼저 와 있던 그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어느 노스님이 이 세상에 잘 왔다 하시며 건넨 이름 ‘선래(先來)’처럼 말이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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