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무형유산을 찾아서]⑤ 김춘식 국가무형유산 나주소반장 보유자: 결 따라 깎아낸 삶, 소반의 맥을 잇다
전통 창호 기법이 낳은 공예적 혁신
손가락 잘려도 지켜낸 ‘불굴의 집념’
365일 열린 전수관…원만한 계승 목표

통영반, 해주반과 함께 조선 3대 소반으로 꼽히는 나주소반. 화려함 대신 단정함과 견고한 미학을 자랑하는 나주소반의 중심에는 평생을 목공예에 바쳐온 국가무형유산 김춘식(90) 보유자가 있다. 끊어졌던 전통의 맥을 홀로 고증해 재현해내고, 평생을 바쳐 나주반의 중흥조(中興祖)가 된 그를 만나 나주소반에 담긴 공예사적 혁신과 장인정신, 전통공예가 처한 현주소를 들어봤다.
◇과도한 장식 대신 간결함으로 승부
소반은 단순히 음식을 나르는 도구가 아니다. 옛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삼신할머니에게 비는 삼신상부터 돌상, 혼례상, 환갑상, 세상을 떠난 뒤의 제사상까지 삶의 고비마다 상을 맞이했다. 김춘식 장인은 "상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고 난 이후까지 인간의 삶과 계속 함께하는 인성교육의 장이자 삶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소반 중에서도 나주반은 유독 독보적인 역사와 기술적 특징을 지닌다. 해방 후인 1966년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전남 민속문화재 현장조사 보고서에는 "나주반은 과도한 장식을 배제하고 순식(純飾)의 미를 추구하여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매우 견고하다. 외형상의 화려함보다는 제작 과정의 내밀한 정교함과 구조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고 나주반의 조형적 가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옥을 닮은 소반…창호 기술과 결합
나주반의 진가는 기술적 구조에서 드러난다. 통나무 하나를 파내는 통영반이나 해주반과 달리, 나주반은 상판과 테두리를 별도로 제작해 결합하는 '변죽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전통 창호장의 '쇠시리' 및 짜임 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목재 낭비를 줄이고 작업 효율을 극대화한 공예사적 혁신으로 평가받는다.
구조적 안정성도 탁월하다. 상판 아래 장식 부재인 '운각'을 통해 다리를 간접 결합함으로써 상판에 다리를 직접 꽂는 구조의 취약성을 극복했다. 이동 시 무게를 줄이고 접착력을 높이는 '뒷메움 기법'도 적용됐다.

◇시련 끝에 찾아온 운명
김춘식 장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본 후쿠오카 탄광 이주, 귀국 후 6·25전쟁, 제대 후 어머니마저 여읜 혹독한 가난 속에서 그는 먹고살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 "나주에 왔으니 나주반을 만들어보라"는 서울 손님의 권유로 1961년 첫 상 가게를 열었다. 이듬해 광주상집을 개업해 시장용 상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평생의 운명이 됐다.
당시 나주반 장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맥이 단절돼 가던 시기였다. 그는 스승 장인태를 만나 기술의 기초를 배우는 한편, 밤마다 헌 상을 칼로 긁어내고 분해하며 구조와 칠 기법을 스스로 연구했다. 문양을 구하려 부잣집의 문전박대를 견뎌내며 숨겨둔 소반을 탁본해 오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박물관 강연에서 한 전문가가 "나주반은 안타깝게도 맥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단언하자, 김 장인은 참지 못하고 즉시 관장의 앞을 막아서며 "맥 안 끊어졌다. 나주에 내가 살아서 만들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당찬 발언은 현장 조사로 이어졌고, 1977년 광주 첫 전시를 거쳐 1986년 전라남도 나주반장,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소반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장인이 된 후에도 삶은 매서웠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돈이 되던 기성 가구 제작을 포기하고 혹독한 궁핍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작업 중 톱기계에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을 때도, 그는 치료를 마치자 마자 손에 붕대를 감은 채 그날 오후 곧바로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이 자리에 선 것은 오롯이 아내의 공(功)"
김 장인은 스스로 대가의 자리에 오른 지금도 모든 영광을 2024년 세상을 떠난 아내 故 이상순 여사의 헌신으로 돌린다.
1962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절망적인 처지의 그에게 양옥집 가문 출신의 이 여사가 선뜻 다가와 손을 잡았다. 단칸방 신혼살림의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아내는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대야를 이고 나가 취로사업에 나섰으며, 배급받은 밀가루를 팔아 남편의 가죽 점퍼를 마련해 입히기도 했다. 돈도 되지 않는 헌 소반 수리와 복원에 온 정신을 쏟는 남편 곁에서 아내는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묵묵히 그 험난한 세월을 함께 견뎌냈다.
김 장인은 한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아내를 향한 깊은 고마움과 그리움을 표했다. 넉넉했던 친정을 뒤로하고 말없이 자신에게 와준 아내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 덕분에 비바람 치는 삶의 고개를 넘어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장인의 고초 물려주기 싫었던 부성애
소반 공예계 전체를 둘러보면 전승의 현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통영반은 계승자의 타계로 단절됐고, 해주반은 고인의 아들이 전승에 힘쓰고 있지만 보유자는 부재한 상황이다. 김춘식 보유자의 경우 고령으로 작업 일선에선 물러난 상태다.
다행히 나주반에는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막내아들 김영민 전승교육사가 가업을 이어받아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계승마저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칠순이 넘어서야 계승자를 얻은 김 보유자는 당초 공대(전자공학과)를 다니던 아들이 소반 일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말렸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제날짜에 등록금 한 번 못 내줬던 아비였다"며 "내가 겪었던 이 배고프고 험난한 길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애가 고집을 안 꺾었다"고 말했다.

◇365일 열려 있는 문…남겨진 전승 과제들
현재 나주반 전승 현장에 남겨진 과제는 명확하다. 김춘식 보유자와 김영민 전승교육사 간의 원만한 기술 계승을 바탕으로 선대가 아직 완벽히 복원하지 못한 다양한 전통 나주반 형식을 연구·복원해내는 일, 그리고 현재 나주반 전수교육관의 환경을 개선하고 활성화하는 실질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 속에서도 김 보유자는 여전히 365일 전수교육관을 지키며 마지막 힘을 쏟고 있다. 나주반 전수교육관에서는 여전히 소반을 만드는 둔탁하고 강인한 대팻질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끊어질 뻔했던 민족 유산의 맥을 홀로 일으켜 세운 장인의 눈빛과 손길은 다음 세대를 향한 깊은 울림과 과제를 남긴 채 여전히 나주반 위를 단단히 머물고 있다.
김춘식 장인은 "멀리 도시에서 나주소반 하나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가면 안 되지 않느냐. 그래서 1년, 12달 문을 닫지 않는다"며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매일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박정석 기자 pj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