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와인 맞아?” 잔만 바꿨는데 혀끝이 경악…지허 글라스 설계 실비오 니체가 밝힌 글라스 마법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글라스는 와인을 위한 옷... 집중도 달라져”
지허와 10년 연구 끝 ‘비전 글라스’ 개발
파격적 발상 디자인 많은 화제 낳아
와인 캐릭터 따라 글라스 모양 나눠
4명 장인 입으로 불어 연간 단 5000개 생산


니체는 독일을 대표하는 소믈리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2018년 미식 전문지 데어 파인쉬메커(Der Feinschmecker)가 선정한 ‘독일 최고의 소믈리에 톱10’에 이름을 올렸고, 독일 소믈리에협회(VDP)와 마이닝거스(Meiningers)가 수여하는 ‘트라우벤아들러(Traubenadler)’ 소믈리에상을 비롯해 20개가 넘는 상을 받았습니다. 25년 가까운 세월을 와인 업계에 몸담으며 독일과 유럽,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3스타 셰프 디터 뮐러(Dieter Müller)의 레스토랑에서 5년간 수석 소믈리에로 일했고, 슈투트가르트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슈파이제마이스터라이(Speisemeisterei)’에서도 소믈리에 겸 부지배인을 지냈습니다.

니체는 새로운 와인 글라스를 만들게 된 배경은 매우 단순하다고 설명합니다. “오랫동안 손님에게 와인을 서빙하면서 품종과 산지에 따라 기계적으로 특정 글라스만 고집하는 기존 방식에 한계를 느꼈어요. 세상에 나쁜 글라스는 없지만, 와인 글라스의 형태 자체는 오랜 세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답니다. 정답을 찾기보다 자신의 취향대로 와인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글라스를 만들고 싶었죠.”


지허 글라스는 립부터 스템, 베이스까지 이음매 없이 통째로 입으로 불어 만드는 ‘마우스 블로운(Mouth Blown)’ 방식을 고수합니다. 일반적인 잔이 보울, 스템, 베이스를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이는 것과 달리, 지허는 하나의 유리 덩어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어서 완성합니다. 이음매가 없다 보니 탄성이 뛰어나 잘 부러지지 않고, 손으로 살짝 튕기면 맑고 긴 울림이 남습니다. 제작 온도도 남다릅니다. 일반적인 기계 성형 글라스는 섭씨 700도 안팎에서, 통상적인 수제 글라스도 섭씨 1000~1200도 선에서 만들어지는 데 비해 지허 글라스는 섭씨 1500도의 고온에서 성형됩니다. 그만큼 유리 재질이 치밀하고 안정적이어서 내구성이 뛰어나며 식기세척기 사용도 가능합니다. 특히 보울 바닥의 물결치는 웨이브 디자인은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닙니다. 표면적을 넓혀 와인을 따르는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에어레이션, 즉 공기와의 접촉을 유도해 잔 안에서 디캔팅이 이뤄지도록 설계했습니다.

손으로 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미세한 표면의 결도 지허만의 개성입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마우스 블로운 잔의 표면에는 치즈처럼 미세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이 구멍들이 와인의 향을 붙잡아두기 때문에, 와인을 다 마시고 잔이 비어도 지허 글라스에는 잔향이 오래 남는답니다.” 손으로 만져서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세한 결이지만, 향을 붙잡는 효과는 분명하다는 겁니다.

와인 글라스는 보통 샴페인·화이트·보르도·부르고뉴처럼 품종과 용도로 나누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지허 비전 시리즈는 이런 구분을 아예 지웠습니다. 대신 프레시(Fresh)·스트레이트(Straight)·인텐스(Intense)·밸런스드(Balanced)·리치(Rich)·노스탤직(Nostalgic) 여섯 개 글라스로 승부합니다. 이름 자체가 그 글라스의 퍼포먼스를 직관적으로 설명하도록 설계했다는 게 니체의 설명입니다.

신선한 산도가 강조되는 화이트와 레드, 가벼운 로제, 프로세코 등에 어울리는 글라스입니다. 여섯 종 가운데 가장 작은 크기로, 산미와 신선함을 또렷하게 잡아냅니다. 리슬링이나 소비뇽 블랑처럼 상큼한 개성이 살아있는 와인에 잘 맞습니다.
▶인텐스
농축감과 구조감이 뛰어나고 향이 강렬한 와인을 위한 잔입니다. 풍부하고 잘 숙성된 파워풀한 화이트나 레드, 다소 투박한 산미를 지닌 와인, 어리거나 중간 정도 숙성된 보르도 스타일 와인의 힘을 제대로 표현합니다. 입구가 좁아지는 구조 덕분에 아로마를 응축시켜 잔 밖으로 강하게 밀어내고, 산소와 충분히 접촉시켜 주기 때문에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도 따로 디캔팅하지 않고 이상적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섬세하고 균형 잡힌 아로마를 표현하는 데 특화된 잔입니다. 부르고뉴나 피에몬테처럼 복합적이면서도 섬세한 화이트·레드 와인, 화려한 로제, 올드 빈티지 샴페인처럼 다양한 향을 원할 때 선택하면 좋습니다. 구조가 섬세해 디캔팅은 권하지 않지만, 공기와의 접촉은 충분히 필요한 와인에 잘 어울립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샴페인입니다. 과거에는 좁고 긴 플루트 잔에 마시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이제는 샴페인도 아로마를 제대로 느끼려면 볼이 넓은 잔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습니다. 밸런스드 잔에 샴페인을 따르면 플루트 잔보다 버블은 조금 더 빨리 가라앉지만, 그만큼 아로마는 훨씬 풍성하게 피어오릅니다. "샴페인은 기본적으로 샤르도네나 피노누아로 만들어지는 만큼, 이런 아로마틱한 잔에 마셔도 충분히 맛있게 즐길 수 있답니다."
▶스트레이트
리슬링, 소비뇽 블랑처럼 단일 품종의 개성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유니버설 글라스입니다. 와인메이커가 의도한 아로마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에, 레드와 화이트를 가리지 않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잔입니다.


포트와인이나 리큐어처럼 도수가 높고 구조감이 짙은 주정강화 와인, 브랜디 등을 위한 잔입니다. 알코올이 과도하게 날아가지 않도록 입구를 좁게 설계해, 강렬하면서도 응축된 풍부한 향을 온전히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노스탤직
폭이 넓은 볼 형태로, 달콤한 샴페인을 즐기던 시절의 정취를 오마주한 잔입니다. 예전에는 샴페인이 지금처럼 드라이하지 않고 달콤한 스타일이 주를 이뤘는데, 이런 스위트한 샴페인을 즐기기에 넓적한 볼 형태의 잔이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칵테일이나 디저트 와인을 즐길 때, 혹은 디저트 자체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시각적으로도 매력적인 잔입니다.

니체는 잔을 고르는 기준을 세 가지로 단순화합니다. 신선한 아로마를 원한다면 프레시, 힘 있고 파워풀한 인상을 원한다면 인텐스, 부르고뉴나 샴페인처럼 섬세한 균형과 조화를 원한다면 밸런스드를 고르면 된다고 설명합니다.
잔이 달라지면 왜 맛과 향이 다르게 느껴질까요. “뭉툭한 일반 잔에 따르면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게 돼 1차적인 과실향 외에는 정보를 얻기 어렵지만, 인텐스나 밸런스드처럼 설계된 잔은 와인이 한 번에 입으로 많이 들어오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 조금씩 머금으며 2차 향과 구조, 여운까지 천천히 느낄 수 있답니다.” 그는 스포츠웨어를 예로 들었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정장을 입었을 때와 운동복을 입고 체육관에 갔을 때 전혀 다른 기분이 드는 것처럼, 잔은 곧 와인이 걸치는 ‘옷’과 같아서 그 옷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준다고 강조합니다.




니체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와인 명가 미켈레 끼아를로(Michele Chiarlo)의 와인 네 종을 시음하며 자신이 만든 글라스에 따라 어떻게 맛과 향이 다르게 느껴지는지 직접 설명합니다. 미켈레 끼아를로는 한때 저렴하고 편하게 마시는 와인으로 여겨지던 바르베라(Barbera) 품종의 가능성을 재발견해 니짜(Nizza)를 이탈리아 정부의 최고 등급인 DOCG로 끌어올리는 데 앞장선 곳입니다. 미켈레 끼아를로는 금양인터내셔날에서 수입합니다.

코르테제(Cortese) 100% 화이트 와인입니다. 코르테제는 종종 ‘화이트 네비올로’로 불릴 만큼 우아한 산도와 미네랄리티를 지닌 품종으로, 특히 피에몬테 가비 지역의 이회토(석회질 점토) 토양에서 나는 포도가 가장 개성 있는 스타일을 만들어 냅니다.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과 황금빛 사과, 시트러스, 갓 구운 빵 껍질 뉘앙스가 우아하게 피어오릅니다. 입에서는 신선한 산도와 짜임새 있는 구조감이 느껴지고 짭짤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병입 전 3~4개월간 효모 앙금과 숙성해 복합미를 끌어올립니다. 사시미와 궁합이 좋습니다. 코르테제 특유의 산뜻한 산도가 생선살의 감칠맛을 깔끔하게 받쳐줍니다. 소고기 카르파치오, 봉골레 파스타, 구운 생선 요리와도 잘 어울립니다.
인텐스 글라스는 직관적인 향이 더 또렷하게 느껴지고 밸런스드에서는 복합미가 더 잘 느껴집니다. 니체는 가비 레 마르네처럼 섬세하고 복합적인 화이트는, 산도 자체를 날카롭게 세우는 좁은 글라스보다 볼이 넓어 공기와의 접촉이 충분한 밸런스드 글라스에서 그 복합적인 향이 한층 잘 피어오른다고 설명합니다.

레이블을 디자인한 화가 잔카를로 페라리스(Giancarlo Ferraris)가 라 코르트(La Court) 포도밭 언덕에 늘어선 사이프러스(치프레시·Cipressi) 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와인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르베라 100%로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10~12일간 부드럽게 침용하고, 이후 대형 오크통에서 12개월, 병입 후에도 최소 18개월을 더 숙성합니다.
잘 익은 체리와 라즈베리에 달콤한 담배 뉘앙스까지 더해진 맑고 우아한 향이 인상적입니다. 입에서는 풀바디에 가까운 짜임새와 조화로운 밸런스가 느껴지고, 짭짤하고 둥근 여운으로 마무리됩니다. 2018년 유명 매체 와인 인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가 발표한 ‘올해의 와인(1위)’으로 선정돼 니짜를 세계 와인 지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탈리아 유명 와인 매체 감베로 로쏘(Gambero Rosso)의 최고 등급인 트레 비키에리(Tre Bicchieri)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만 공급하는 엔트리 바롤로입니다. 네비올로 100%이며 이회토와 모래, 석회질이 섞인 복합적인 토양에서 자란 포도가 와인의 뼈대를 만듭니다. 딸기, 라즈베리, 신선한 체리, 카시스 같은 붉고 검은 과실향이 먼저 다가오고, 그 뒤로 베이킹 스파이스와 호두, 삼나무, 가죽, 타르의 뉘앙스가 겹겹이 쌓입니다. 입에서는 미디엄 정도의 탄닌임에도 마지막 피니시까지 입안을 팽팽하게 조이는 파워풀한 구조감이 느껴지고, 검붉은 과실 풍미와 오크에서 우러나온 부케가 어우러지며 복합미를 완성합니다.

밸런스드 글라스에서 이 와인의 진가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말린 장미꽃과 플로럴한 아로마가 가장 화사하게 표현되는데, 볼이 넓은 밸런스드가 네비올로 특유의 섬세하고 복합적인 부케를 산소와 충분히 접촉시켜줍니다.

‘모스카토 고향’으로 불리는 카넬리(Canelli)에서도 올드 바인으로만 만듭니다. 카넬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에몬테 와인 언덕의 핵심 산지입니다. 밀폐된 압력 탱크(오토클레이브)에서 저온 발효를 거쳐 알코올 도수 5%에서 발효를 멈춥니다. 이 과정에서 발효 중 발생한 이산화탄소 일부가 와인 속에 자연스럽게 갇히면서 은은하고 가벼운 스파클링을 만들어냅니다. 골드빛이 감도는 밀짚색에 복숭아와 살구, 세이지, 머스크 향이 화사하고 생기 있게 피어오릅니다. 입에서는 크리미하고 긴 여운과 함께 균형 잡힌 단맛과 짭짤한 감칠맛, 그리고 놀라운 신선함이 어우러집니다. 과일을 곁들인 디저트는 물론 파네토네, 신선한 과일, 매콤한 아시안 요리, 고르곤졸라 치즈, 셔벗 등 폭넓은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립니다.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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