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역주행’한 탈북 청년의 22일 간 사투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19년 5월 20일 해 질 무렵. 24세 청년 김강우는 뼛속까지 시린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김 씨가 물살을 가르며 향한 곳은 북한 양강도 혜산. 등에 멘 배낭에는 대한민국 여권이 들어 있었고, 허리에는 비닐에 꽁꽁 싼 아이폰을 묶었다.
강폭이 50m 정도 되는 압록강을 10여 분 만에 건너 맞은편 제방 앞에 도착했다. 제방 높이는 7m가 넘었지만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가 높다랗게 쌓여 있는 곳들을 딛고 제방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 촘촘하게 철조망이 쳐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분명 3년 전엔 없던 것인데….
그는 여기저기 긁히고 찢기며 철조망 위로 기어올랐다. 건너편 아래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철조망 전체가 용수철처럼 튕겼고, 그는 제방 아래로 다시 떨어졌다. 아픔을 견디며 신음을 삼키는데 제방 위에서 불쑥 총구가 나타났다.
“누구야. 이리 올라와.”
국경경비대원이었다. 총구가 겨누는 속에 올라갔더니 또래로 보이는 군인이 그의 몰골을 재빠르게 훑어봤다. 흠뻑 젖어 있으니 중국에서 헤엄쳐 왔음이 분명하다고 본 것 같았다.
그 군인은 제방 위로 올라온 그를 무릎 꿇리더니 소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머리와 가슴 등에 맞은 김 씨가 쓰러지자 군인은 그가 메고 온 배낭을 거꾸로 들고 털었다.
한국에서 가져 온 비상용 초코파이, 양말, 속옷 등이 먼저 떨어졌다. 가방 안쪽 비닐봉지에 싸서 숨겨 둔 여권과 지갑까지 떨어지자 김 씨의 머리는 아득해졌다. 군인이 여권을 확인하는 순간 총살 아니면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할 판이었다.
그때 멀리서 고함 같은 소리가 들렸다. 군인이 잠깐 뒤를 돌아보는 순간 김 씨는 달려들어 그의 두 다리를 힘껏 잡아챘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군인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격투가 벌어졌다. 군인 몸에 올라탄 김 씨는 한 손으론 그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론 주변을 더듬어 찾은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군인의 손힘이 풀렸다.
김 씨는 여권과 지갑만 챙긴 뒤 다른 물건들은 급히 배낭에 담아 압록강에 힘껏 내던졌다. 군인이 정신을 차리고 총을 쏠까 봐 탄창을 분리해 던져 버리곤 냅다 도망쳤다.
도망가는 길에 다른 경비병들도 만났지만, 그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챌 틈도 주지 않고 바람처럼 내달아 자신이 살던 동네로 향했다. 오후 6시 반에 압록강에 뛰어들었는데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정전으로 깜깜한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듯했다.
“제가 약속했잖아요. 3년 내에 자리 잡고 다시 데리러 온다고요. 우리 식구 다 같이 이 지옥을 벗어납시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 때문에 네가 목숨 걸고 강을 건너온 거냐?”
어머니는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삼켰다.

● 보위부와의 숨바꼭질
그때만 해도 김 씨는 앞으로 22일 동안 북한에서 사투를 벌이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 계획대로면 그 사흘 뒤 집으로 오겠다고 약속한 탈북 브로커와 함께 압록강을 다시 넘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꼬여 버렸다. 하긴 그가 목숨 걸고 압록강을 넘은 것도 일이 꼬여서였다.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한 김 씨는 탈북 비용을 벌자마자 부모를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중국 지린성 장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브로커 안내로 북중 국경을 넘은 부모를 만나 제3국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혜산 집으로 간다던 브로커는 핑계를 대며 하루이틀 시간을 끌었다. 마침내 브로커가 어머니와 통화가 됐지만, 이번엔 어머니가 무서워서 강을 건너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김 씨의 중국 체류 비자 만기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과 북한 사이 통화는 북한 보위부 감청 때문에 3분 이상을 넘길 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통화 중 뚝뚝 끊겼다. 김 씨는 자신이 직접 북에 가서 설득해야 부모님이 탈북할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두 번 압록강을 건넌 것도 아니어서 몰래 강 건너 집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올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에 발각되면서 일이 커진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 온 괴한에게 경비병이 공격을 받자, 당국은 그 다음 날인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열흘 동안 국경 특별 경비 주간을 선포했다. 그와 가족을 탈북시켜 주기로 한 브로커도 어쩔 수 없이 6월 3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김 씨는 혹시나 있을 가택 수색을 피해 산에 올랐다. 산중턱 뙈기밭 원두막에 숨어 지내며 숨막히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부모님이 교대로 밭일하는 척 올라와 먹을 것을 주었다. 그렇게 브로커와 다시 만나기로 한 날까지 버텼는데, 이번엔 국경을 넘게 해 주기로 한 군인이 상급 부대 검열 때문에 근무시간이 바뀌었다며 9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초조해진 김 씨는 다른 선을 찾았다. 다른 브로커는 그달 4일 밤에 국경을 넘게 해 주는 조건으로 300만 원을 요구했다. 김 씨는 한국에서 탈북 비용으로 번 돈을 이미 브로커들에게 다 쓴 상태였다. 김 씨는 한국의 친한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전화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전화가 터지는 산까지 그가 갈 수 없어 어머니에게 대신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화근이 됐다. 어머니는 “정말 강우 어머니가 맞느냐. 강우가 진짜 북한으로 넘어갔느냐”며 의심하는 그 형을 설득하느라 통화시간이 13분이나 넘었다. 보위부 도청이 발달한 혜산에서 13분 통화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게까지 했건만 끝내 돈은 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 통화를 감청한 보위부는 한국에 간 김강우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며칠 뒤 김 씨 집 맞은편 집에 잠복조가 파견됐다. 김 씨 가족 셋이 탈북하는 순간 덮쳐 체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김 씨는 9일로 약속을 잡은 브로커를 만나러 산을 내려왔다. 어두운 밤 그의 부모도 배낭을 메고 약속된 장소에 나타났다. 하지만 브로커는 국경을 넘겨 주기로 한 경비병 근무 일정이 또 바뀌었다며 날짜를 다시 잡자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셋이 함께 집으로 오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너는 다른 길로 빙 돌아서 와라.”
김 씨가 먼 길로 돌아서 오는데 멀리 보이는 집 쪽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지더니 전짓불이 사방으로 번뜩였다. 맞은편 집에 있던 감시조가 천만다행으로 부모가 몰래 집을 빠나갈 때는 보지 못했다가 배낭을 메고 돌아오는 것을 보곤 탈북하러 가는 것이라 착각해 덮친 것이다.
김 씨 모습이 보이지 않자 보위부는 동네에 수색대를 풀었다. 그들이 비춰대는 손전등 빛에 자신의 모습이 포착되자 김 씨는 죽기 살기로 산으로 도망쳤다. 수색대는 그를 놓쳤다.

● 보위부에 끌려간 부모
산중턱에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산 아래쪽을 살펴봤다. 횃불과 손전등을 든 무리가 산 아래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때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보위원들이 김 씨 들으라고 그의 부모를 끌고 와선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조선에서 아들이 건너온 걸 다 알고 왔다. 어디에 숨었냐?”
보위원들의 날선 고함과 부모의 비명이 산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어머니가 구둣발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은 김 씨는 산비탈을 다시 내려갔다. 돌이라도 들고 가서 보위원들과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이었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우리 친아들 강우는 남조선에 간 이후로 여기에 온 적이 없습니다. 아까 도망간 사내는 우리 아들이 아닙니다.”
“이 쌍년이 어디서 보위부 지도원 동무들 앞에서 끝까지 새빨간 거짓말이냐!”
피를 토하는 듯한 어머니 목소리에 김 씨는 제정신이 들었다. 절대로 내려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자식을 지키려는 거룩한 용기였다.
‘나까지 체포되면 우리 가족은 빼도 박도 못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겠구나. 나라도 살아야 부모를 구할 수 있다.’
김 씨는 주저앉아 피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폭행해도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보위부는 부모를 차에 태우고 철수했다.
조만간 증강된 수색조가 도착해 산을 포위하고, 날이 밝는 대로 산 위로 올라올 것이 분명하기에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능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어 부모를 꺼내 올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뇌물이면 안 되는 것 없는 북한인지라 중국 돈 몇만 위안을 찔러주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밤새 달려 날이 밝아 올 무렵 압록강변에 도착했다. 하지만 절망했다. 그새 국경 봉쇄령이 떨어져 군인들이 2인 1조로 강가를 순찰하고 있었다. 강을 건널 수도 없게 됐다.

● 막다른 길에서 만난 여인
더는 갈 곳이 없어졌다. 집으로도 중국으로도 갈 수 없었다. 산속에 숨는 것밖에 없었다. 먹을 것도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날은 6월 10일. 압록강을 건너온 지 21일째였다.
산속에 들어가 풀로 몸을 덮고 누웠다. 꼬박 24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이 됐다. 혈기 왕성한 나이인 데다 산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 보니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외진 산에서 굶어 죽는 건가. 그럴 순 없다. 오늘 밤은 총에 맞아도 좋으니 무조건 압록강을 넘어야겠다.’
그러나 뱃가죽이 등에 붙은 상태로 강을 건널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뭔가 먹어야 했다. 그가 아는 곳은 살던 동네뿐이었다.
대낮에 동네로 내려갔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썼지만 3주 동안 수염을 깎지 못해 누가 봐도 걸인 같은 몰골이었다. 그보다 더 수상한 것은 염색한 머리와 귓불을 뚫고 한 귀걸이였다. 압록강을 건널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기에 염색한 머리 그대로 중국에 왔던 것이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아버지 친구 집으로 갔다. 이 친구분은 과거 그의 집 신세를 많이 졌기에 고발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손님이 김 씨를 이상한 듯 훑어보자, 아버지 친구가 급히 설명했다.
“별 사람 아니오. 저 깊은 골짜기에 살다가 오랜만에 인사하러 온 먼 친척 조카요.”
그는 그 손님에게 정체가 들통날까 봐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다음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길을 빠르게 걷고 있는데 동사무소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여인은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그냥 도망친다면 신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씨는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저를 아십니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서 봤던 것 같긴 합니다.”
“야, 강우야.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있니?”
그제야 그 여인 이름이 생각났다. 몇 년 못 본 새 몰라보게 달라져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너 아랫동네(한국)에 갔다고 소문이 다 났어. 염색도 했구나. 거기는 어때? 영화에서 나오는 거랑 비슷해?”
그 여인이 그렇게 물어 오자 긴장이 풀렸다.
“응. 영화보다 더 좋아. 너도 가고 싶어?”
“아니. 난 여기서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야지.”
둘은 길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얘기를 했다. 그가 남에서 살다 왔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그 여인은 스스럼없이 사는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때 그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강우야. 뭘 하려고 위험하게 다시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 잘 보고 무사히 돌아가. 신고는 하지 않을게.”

●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헤어지고 다시 걷는데,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너, 강우구나. 위험하게 길에서 뭐 하냐. 얼른 우리 집에 가자.”
잘 아는 동네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 뒤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
“어쩌다 이 험한 곳에 다시 발을 디딘 거야. 들어보니 밥도 먹지 못했겠구나. 금방 밥 해 줄 테니 좀 누워 있어라.”
방에 누우니 며칠 동안의 피곤이 쏟아지며 잠이 들었다. 몇 시간 지나 눈을 떴다. 직장에서 돌아온 아주머니 남편도 방에 앉아 있었다.
“강우야. 거긴 어떻더냐? 몰래 보던 남조선 영화랑 똑같나? 부모님이 잡혀 가서 큰일이구나.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방법이 꼭 있을 거다.”
김 씨는 사흘 만에 처음 밥을 먹게 됐다. 이후 또 쓰러져 잤는데 깨고 보니 이튿날이었다. 부부는 한국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제가 무사히 건너가면 나중에 두 분도 한국으로 올 수 있게 길을 놔 드릴게요.”
아주머니 남편이 대답했다.
“에구, 우리가 무슨. 여보, 당신이라도 먼저 갈 수 있으면 가오.”
아주머니 부부는 김 씨가 친척과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날 밤 찾아온 친척이 말했다.
“강우야. 네 부모는 보위부에서 풀려나 집에 와 있어. 너를 유인해 잡으려고 일부러 덫을 놓은 거니 절대 집에 오지 말아라. 얼른 강을 넘어가 부모를 어떻게 빼돌릴지만 생각해라.”
나중에 알았지만, 김 씨의 어머니는 혜산시 보위부장에게 끌려가 취조를 받을 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몇 년 전에 집 나간 아들이 어떤 사람을 통해 얼마 전 연락해 왔습니다. 압록강 건너편에서 아들이 간절히 찾는다고 하니 눈이 뒤집혀서 한번 보려고 나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압록강 가까이 가니 갑자기 정신이 들었죠. 내가 어찌 조국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집에 돌아오다 잡힌 겁니다.”
물론 보위부가 이 말을 믿었을 리 없지만, 강을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을 확실하게 본 것도 아니니 부모를 처벌하기 애매했을 터다. 보위부장은 이런 제안을 했다.
“아들이 찾는다고 연락하러 온 브로커가 다시 나타날 것이니 현장에서 잡게 해 주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
부모님 집에는 다시 보위부 감시조가 붙었다.
부모님이 집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김 씨는 다시 힘이 솟았다. 이제 할 일은 중국에 건너가 돈을 마련해 다른 브로커를 써서 부모님을 몰래 빼 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압록강으로 갔다. 경비는 여전히 삼엄했지만, 더 이상 북에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강을 건널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가 넘어온 곳으로 갔다. 제방이 높기는 하지만, 바로 옆에 길이 있어 행인인 척 접근해 몸을 던지면 바로 압록강이었다. 경비대에 발각된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총을 쏘기도 쉽지 않고, 몇 분만 열심히 헤엄치면 중국이었다.
제방 위에서 그는 “내 어머니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곤 아래로 몸을 던졌다. 무릎과 발목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체할 순 없었다. 이어 어두운 강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경비병들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 22일 만에 자유의 세상으로
중국에 도착한 그는 그때까지 허리에 묶어 뒀던 비닐봉지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켜니 신호가 잡혔다. 22일 만에 자유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장백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지금은 여권을 휴대한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택시를 타고 연길공항으로 갔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고 보안검색대를 네 번이나 통과해 탑승 게이트까지 왔는데 갑자기 제복 입은 남성 둘이 나타나 그의 탑승을 제지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이트 앞에서 돌아서는 그를 잡지도 않았다. 한 달짜리 관광비자가 만료됐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22일간 북한에 머무르다 보니 비자 유효기간을 열흘이나 넘겼다. 그는 연길 시내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갔다. 조선족 공안 두 명이 그를 조사했다.
“전산 기록을 보니 장백현으로 가는 공안 초소를 통과했던데, 위험한 국경에는 왜 갔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에서 숨어 지냈기에 주숙등기도 없습니까.”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은 호텔이나 여관에 묵을 때 주숙등기라는 것을 해야 한다. 일종의 숙박 등록이다. 그런데 김 씨 숙박 기록은 한 달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뭔가 합당한 설명을 해야 했다.
“저는 한국 고아원에서 자란 불쌍한 아이입니다. 최근에 제 생부가 연길에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왔는데, 아버지를 찾지도 못하고 돈도 떨어져 공원 벤치나 건물 계단에서 노숙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장백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갔다가 허탕만 치고 왔습니다. 제발 무사히 한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다행히 공안은 더 캐묻지 않고 오히려 모텔까지 잡아 줬다. 공안이 어떻게 했는지, 나오려면 일주일 걸린다던 임시 비자가 이튿날 바로 나왔다.
중국을 뜨기 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좋은 소식은 북한을 탈출하자마자 급히 찾은 새로운 브로커들이 삼엄한 보위부 감시를 뚫고 부모를 혜산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역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김 씨가 성공 보수로 수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기에 브로커들이 목숨을 걸고 빼돌린 것이다.
나쁜 소식은 그가 재입북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연길을 떠나기 전날 그에게 국정원 직원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김강우 씨. 당신이 북한에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한국에 들어와서 이야기나 한번 합시다.’

● 24세 국가보안법 사범
2019년 6월 15일 마침내 김 씨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씻고 침대맡에 앉았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말 길게 하지 마. 지금 시간이 없어. 어머니가 옆에 있으니 필요한 말만 해.”
이어 “강우야, 들리니”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휴대전화로 전해졌다. 옆에서 “위치 말하지 말고, 이름도 부르지 마”라는 브로커 말소리가 들렸다.
“우린 잘 있다. 꼭 다시 만나자.”
그는 쭈그리고 앉아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오전 5시.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갑자기 남자 여러 명이 문을 따고 들이닥쳤다. 한 남자가 그의 얼굴에 종이 두 장을 내밀며 “당신 집과 몸을 수색하는 영장이다. 즉시 집행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김 씨의 노트북을 열고 암호를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로그인까지 했다. 다른 한 명은 김 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또 다른 사람은 방에 있는 책들과 일기장을 뒤졌다. 쌀자루까지 다 수색한 뒤 그들은 김 씨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김강우 씨. 국가보안법상 잠입 및 탈출 위반 혐의로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김 씨는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이 아직 압록강을 넘어오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체포될 순 없었다. 부모님을 한국행 브로커에게 인계한 뒤에 체포돼야 했다.
“저는 북에 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갔다 왔는데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가 끝까지 버티자 조사관이 폐쇄회로(CC) 카메라가 없는 밖으로 그를 불러냈다.
“우린 물증이 충분합니다. 계속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3~4개월은 구속돼 있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협조해 주신다면 불구속으로 수사받게 힘써 보겠습니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자수할 테니 제발 3개월만 불구속 수사를 받게 해 주십시오. 부모님을 탈출시킨 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 법정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
2020년 6월, 김 씨는 누런 미결수복을 입고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법정에 들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방청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년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 얼굴이었다.
그가 경찰서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조사를 받을 때, 부모님은 무사히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 탈출을 위해 김 씨는 4000만 원 넘게 썼다. 그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김 씨는 모자란 돈을 꼭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장기라도 팔아 돈을 만들고 싶던 때였다.
그때 신용을 올리면 2400만 원을 대출해 준다는 ‘은행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 은행 직원은 “당신 계좌에 1500만 원을 보내줄 테니 그것을 인출해, 당신을 찾아가는 은행 직원에게 다시 전달하면 신용이 올라간다”고 제안했다.
한국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그때는 보이스피싱에 위험이 지금 만큼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의 계좌가 대포통장으로 이용됐다며 거래 정지가 됐다. 신용카드도 쓸 수 없고 통장에 남은 약간의 돈마저 꺼낼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 사건 피의자 조사만으로도 벅찬데, 대포통장 관련 조사까지 받아야 하는 신용불량자 처지가 됐다.
그때 보이스피싱범들이 다시 전화해 왔다. 김 씨는 자신의 딱한 사정을 잘 전달하면 그들이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보일 줄 알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보이스피싱범은 “들어보니 사정이 딱한데, 한 가지 일만 더 해 주면 계좌도 풀어 주고 사기 친 일당도 직접 만나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반 정신이 나간 상태였던 김 씨는 그들이 알려준 주소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들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졸지에 보이스피싱 송금책이 된 것이다. 그가 경찰서에 잡혀 왔을 때 보이스피싱범들이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다. 경찰이 대신 받자 그들이 물었다.
“김강우란 사람 진짜 잡혔어요?”
김 씨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 와중에 국가보안법 조사도 계속 받았다. 부모는 중국을 횡단해 한국으로 무사히 왔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중국 당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경 봉쇄로 한국 입국이 막힐 뻔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은 지 10개월여 만에 모든 재판 절차가 끝났다. 보이스피싱 사건은 초범인 점 등 정상을 참작해 집행유예 6개월과 보호관찰 2년, 사회봉사 80시간 판결을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도 정상이 참작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20년 9월 12일 마침내 교도소 정문으로 걸어 나오던 밤, 밖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그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새 어머니 몸에선 특유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 된 것이다. 새아버지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묵직하게 안아줬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새아버지 덕분이었다.

● 16세에 찾아온 비극
김 씨가 1995년 혜산에서 태어났을 때 친부는 건설사업소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김 씨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한글과 숫자를 스스로 깨친 신동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혜산시 경연에 나가도 3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다.
그렇게 쭉 학교를 다녔다면 평양 중앙대학은 어렵지 않게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모질게도 그가 바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4세 때인 2009년 말 북한은 급작스럽게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가구당 구권 10만 원을 신권 1000원으로 바꿔 줬는데, 신권 1000원으론 쌀 몇kg만 살 수 있었다. 구권 10만 원 이상 돈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됐다.
김 씨 집은 졸지에 거지가 됐다. 아니, 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거지가 됐다. 특히 밀수로 많은 돈을 벌던 혜산 사람들이 받았던 충격은 타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 혜산 사람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아이들은 김일성 초상화가 박힌 구권 5000원 지폐를 학교에 갖고 와 난로 불쏘시개로 쓰거나 딱지를 만들어 놀았다.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은 사라졌고 증오만 남았다.
김 씨가 재입북해 고향 마을을 돌아다녔을 때 아무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던 것도 더 이상 충성심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땐 재빠르게 탈북해 한국에 간 사람들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가난은 김 씨를 더 이상 공부에만 매달리는 소년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화폐개혁 이후 동네 아이들은 밤마다 중국 밀수 행렬에 뛰어들어 짐을 나르고, 낮에는 학교에 와서 낮잠을 잤다. 당시 물가 기준으로 폐철 40kg을 중국까지 날라 주면 10위안을 받았는데, 이는 쌀 4kg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중학교 4학 때인 2010년, 김 씨도 처음 짐꾼 행렬을 따라 나섰다. 어린 나이에 무려 폐철 58kg이 든 자루를 어깨에 메고 밤에 강을 넘었다. 떠내려 가지 않기 위해 여럿이 서로서로 앞사람 어깨에 팔을 올린 채 한 줄로 움직였다. 강 중간에 가면 수심이 키를 넘는 곳이 있었는데, 그때도 침착하게 숨을 참으며 앞선 사람 어깨를 잡고 몇 걸음 더 걸으면 얼굴이 강물 밖으로 나왔다.
너무 힘들어 수백 번 후회하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58kg을 메고 간 대가로 14위안을 받았을 때는 ‘이 돈이면 우리 식구 일주일은 식량 걱정하지 않겠구나’ 싶어 콧노래가 나왔다.
어깨에 피멍이 들어 돌아오는 아들을 더 이상 보기 힘들었는지, 2011년 8월 아버지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날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으로 떠나는 아버지 일행과 마주쳤다.
“강우야. 엄마 말 잘 듣고, 집 잘 지키고 있어라.”
하지만 어린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친부는 강을 넘자마자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그해 10월 말 동네 분주소(파출소) 보안원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강우 아비가 중국 갔다가 잡혀 와서 청진집결소에 있는데, 출장 여비와 차비를 주면 내가 가서 데려오겠소.”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보안원에게 주었다.
그 다음 달 어느 날 김 씨가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대문을 들어서며 울부짖었다.
“강우야. 아버지가 열차에서 숨을 거두셨단다.”
북송된 친부는 보위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혜산에서 파견 나간 보안원은 겨우 친부를 기차에 태웠지만, 그해 11월 22일 새벽 친부는 열차에서 숨을 거뒀다. 북한에는 ‘시신은 열차에 태우고 갈 수 없다’는 법이 있다. 보안원은 다음 역에 시신을 내려놓고는 혼자 혜산으로 돌아와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철도역에 친부 시신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김 씨는 삼촌 두 명과 함께 아버지 시신이 있는 역으로 가기로 했다. 기차나 차를 타고 갈 돈도 없어 엄동설한에 꼬박 3일 동안 기찻길을 따라 걸어갔다.
마침내 도착한 작은 역 화물창고 바닥에서 아버지 시신을 봤을 때, 꽁꽁 언 땅을 파고 시신을 관도 없이 묻었을 때, 다시 3일 동안 모진 추위 속에서 집으로 걸어 돌아왔을 때, 김 씨의 유년 시절은 끝났다.

● 후회하지 않는 선택
2년 뒤 김 씨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다들 군대에 갔지만, 김 씨는 반동분자 아들이란 이유로 군에도 가지 못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중국에 몰래 넘어가 들쭉이나 잣을 따기도 했고, 산판에 올라가 통나무도 끌었다.
때론 총을 쏘며 달려드는 공안을 피해 산을 헤매기도 하면서 처절하게 돈을 벌었다. 당시 장백엔 김 씨처럼 돈을 벌려고 몰래 강을 넘어온 사람이 골짜기마다 수십 명씩 있었다. 수시로 잡혀 북송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김 씨는 ‘언젠가는 저 사람들처럼 나도 북송돼 아버지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어머니와 재혼해서 함께 살게 된 새아버지는 러시아에서 10년 동안 벌목공으로 일했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이 겪은 바깥세상을 김 씨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강우야. 너처럼 전교 1등 하는 똑똑한 애들이 왜 희망 없는 이 땅에서 인생을 썩히고 있느냐. 아랫동네 한국이란 나라에 가면 너 같은 인재들은 국가에서 공짜로 돈을 주면서까지 대학 공부를 시켜준단 말이다.”
돈을 벌려고 중국을 몰래 왕래하는 과정에서 김 씨는 한국으로 가는 북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 내겐 미래가 없습니다. 결혼해 산다고 해도 자식들을 저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3년만 기다려 주시면 꼭 한국에 무사히 도착해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2016년 5월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김 씨는 집을 나섰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해 10월 마침내 한국에 안착했다. 이듬해 2월 하나원을 나온 그는 대안학교에 적을 두고 부모님 모시고 올 돈을 벌기 시작했다.
외진 지방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했고, 휴대전화를 팔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 마침내 부모님을 모셔 올 2400만 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연길행 비행기에 오른 날은 2019년 5월 11일. 비행기에 탈 때,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무척이나 뿌듯했다.
스스로 위험한 중국으로 향한 이유는 함께 일하던 한 탈북 친구 때문이었다. 그 친구 부모는 아들의 설득으로 한국에 오다 체포돼 북송됐다. 부모가 북송된 것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한 친구는 죄책감 때문에 삶의 의미도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김 씨는 결심했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어머니와 할 것이다. 일이 잘못돼도 내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구하리라.’
그 이후 일어난 일은 완벽하던 탈출 계획과는 전혀 달랐지만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김 씨는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2019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래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는 다시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 길은 끝나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그는 계좌도 사용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수감된 1년 동안 밀려 있던 집세와 관리비, 카드 연체금은 추심업체로 넘어가 있었다. 거기에 브로커에게 갚아야 할 빚까지 더해져 당장 수천만 원을 벌어야 했다.
김 씨는 에어컨 설치 회사에 들어가 죽기 살기로 일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마음 깊숙이 묻어 두었던 꿈이 살아났다.
그는 공부하고 싶어서 한국에 왔다. 북에선 아버지 때문에 대학은커녕 군에도 갈 수 없었지만, 한국에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밤을 새워 영어와 수학 등을 파고들었고, 2023년 3월 국민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21세에 대학에 가고 싶어 집을 나섰던 청년은 28세에 비로소 캠퍼스에 섰다. 간절했던 염원을 학업에 쏟아부었다. 정치외교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법학, 사회학, 행정학 등 다양한 수업을 청강했고 교직 과정까지 이수하고 있다.
학업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겪은 삶을 책으로 남기기 위해 글을 썼다. 자신이 겪은 고통의 시간을 단지 상처로만 남겨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밤이 너무 길고 마음이 너무 무거워 한 발도 떼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괜찮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숨이 되고, 내일의 숨이 다시 이어져 삶이 된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이 밤만 지나면’ ‘어머니를 위해서’ 같은 작고 소박한 하루하루 약속을 지켜 내며 살다 보면 내 안의 두려움이 한 겹씩 벗겨진다.”
그렇게 쓴 글은 지난달 ‘나의 지옥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 씨는 책을 이렇게 맺었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안전한 곳에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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