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더 작아서 까다로워요"…'희귀직업' 장인의 반전 일상 [권용훈의 직업불만족(族)]

“사람 귀가 다 비슷해 보이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오래 일하다 보면 귀 모양만 보고도 예전에 제가 설계했던 고객인지 알아볼 때가 있어요 (웃음).”
최동석 WSA코리아 수석연구원은 하루 종일 사람의 귀를 들여다본다. 실제 귀가 아니라 고객의 귓본을 스캔한 3차원(3D) 영상이다. 화면 속 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귓속형 보청기의 외형인 ‘쉘’을 설계한다. 그의 직업은 국내에서도 생소한 ‘보청기 모델러’다.
WSA코리아는 글로벌 청각 헬스케어 기업 WS오디올로지의 한국 법인이다. 시그니아와 와이덱스 등 보청기 브랜드를 운영한다. 일부 맞춤형 귓속형 보청기는 해외에서 완제품을 들여오는 대신 국내 모델러가 고객의 귀에 맞춰 직접 설계·제작한다.
보청기 모델러라고 하면 귓본을 그대로 복제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최 수석연구원은 “귀 모양을 그대로 만들면 오히려 아플 수 있다”고 했다. 귀 안쪽은 피부와 연골, 뼈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다.
사람마다 다른 귓속 구조 맞춰…보청기 설계
귓본의 굴곡을 그대로 살리면 단단한 골부를 눌러 통증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너무 많이 깎으면 보청기가 헐거워져 말을 하거나 음식을 씹을 때 밖으로 밀려 나온다. 모델러는 아플 만한 부분은 줄이고 보청기를 잡아줘야 할 곳은 남겨 실제로 착용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설계한다.
그는 “외이도가 곧고 굴곡이 적으면 보청기를 지탱해줄 부분이 없어 쉽게 밀려 나온다”며 “반대로 외이도가 지나치게 좁으면 전자부품을 배치할 공간이 부족해 설계가 까다롭다”고 말했다.
작은 쉘 안에는 마이크와 리시버, 배터리 등 여러 전자부품이 들어간다. 최 수석연구원은 이 작업을 ‘퍼즐 맞추기’에 빗댔다. 부품을 빈자리에 넣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게 거리를 둬야 하고, 소리가 이동하는 통로와 통풍구도 확보해야 한다. 부품 하나를 움직이면 다
른 부품의 위치와 보청기 두께까지 연쇄적으로 달라진다.

마이크·배터리 넣는 ‘귓속 테트리스’
제품이 작을수록 설계는 더 어려워진다. 소비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보청기를 선호하지만 모델러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셈이다. 특히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귓속이 작은 경우가 많아 초소형 제품을 설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착용감은 0.1~0.2㎜ 차이로 극명하게 갈린다. 너무 두껍게 만들면 귀가 아프고, 얇게 만들면 보청기가 빠진다. 귀에 꽉 밀착시키면 소리가 새며 발생하는 하울링은 줄지만 귀가 막힌 듯한 폐쇄감이 커진다. 느슨하게 하면 답답함은 줄어도 ‘삐’ 소리가 날 수 있다.
최 수석연구원은 “컴퓨터 화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여도 고객은 그 차이를 하루 종일 느낀다”며 “편한 보청기와 다시 만들어야 할 보청기가 0.1㎜에서 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AI 있어도 최종 판단은 사람 몫”
보청기 모델러가 되기 위한 별도의 국가자격증은 없다. 청각사나 청능사 자격, 3D 모델링이나 보청기 수리 경험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만 필수는 아니다. 전용 프로그램도 입사한 뒤 배울 수 있다. 그는 소프트웨어 실력보다 공간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과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과거에는 기술자가 귓본을 직접 깎아 보청기를 만들었다. 지금은 3D 스캐너와 설계 프로그램, 3D 프린터를 활용한다. 제작 속도와 정밀도는 높아졌지만 사람의 판단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스캔 화면에 잡힌 주름이 실제 귀의 굴곡인지, 귓본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인지부터 가려내야 한다. 가만히 있을 때 잘 맞는 제품이 말을 하거나 음식을 씹을 때도 빠지거나 아프지 않을지도 예상해야 한다. 자동 설계 기술이 기본 형태를 만들어주더라도 어느 부분을 줄이고 남길지는 결국 모델러의 판단이다.
최 수석연구원은 “기계는 입력된 귀 모양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지만, 그 제품을 착용했을 때 어디가 아프고 움직일 때 어떻게 밀려날지는 알기 어렵다”며 “화면을 보면서 실제 착용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직업불만족(族) 편집자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했지만 매일 퇴사를 고민하는 30대 청년,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제2의 삶을 개척한 40대 가장,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70대 청소 노동자까지. ‘직업불만족(族)’은 직업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깊은 위로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 모든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하단 구독 버튼을 눌러주시면 직접 보고 들은 현직자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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