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우나의 여성 ‘투명인간’
‘여성 천황’ 불가 배경엔 남성 중심의 일본 사회
WEF 성 격차 148개국 중 118위로 G7 최하위
의대 입시에서 여성 합격자 줄이려 점수 조작
자민당,여성들이 바라는 부부별성제에 부정적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30년 만의 일본 천황 교체를 지켜본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아들 나루히토(德仁)가 즉위,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렸습니다. 일본 사회 전체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기대감이 가득했습니다.
나루히토의 즉위 의식에서 눈길을 끈 것은 황위 계승 순서였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나루히토에겐 아들이 없습니다. 외동딸 아이코(愛子) 내친왕(內親王)이 있지만, 황실 전범은 황위를 남성 혈통만 계승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황위 계승 1순위는 나루히토의 동생인 후미히토(文仁) 황세제로 즉위 행사 때 마사코 황후 다음으로 입장했습니다. 그다음은 후미히토의 아들 히사히토(悠仁) 친왕입니다.
아이코는 국민적 인기가 높습니다. 일본 내 여론조사에서도 여성 천황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 정치권, 특히 자민당 보수파는 여성 천황의 허용에 극도로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과거 황족이었던 남성 후손을 황실에 복귀시키거나 입양시키는 황실전범 개정안이 통과됐는데, 이로 인한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국민 다수가 여성 천황에 호의적임에도 자민당이 남성 승계를 고집하는 것은 단순히 황실 제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일본은 선진국이자 경제 대국이지만 여성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권리에서는 다른 선진국에 뒤처져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6월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25)’에 따르면 일본은 조사 대상 148국 가운데 118위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G7 국가 중 최하위입니다. 교육과 건강 분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치와 경제 분야의 성 격차가 커 전체 순위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와 기업 임원·관리직 진출이 저조한 점이 일본 사회의 구조적 과제로 지적됐습니다. 이 때문에 여성 천황을 둘러싼 논쟁은 일본 사회의 보수성, 가족관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사우나에서 마주친 여성 청소원
일본 사회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일상에서 실감한 곳은 뜻밖에도 헬스장 사우나였습니다.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집 근처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면 이곳에 딸린 사우나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우나를 이용할 때마다 작은 바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욕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여성 청소원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데 중년의 여성 종업원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 때마다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외국인인 저에게는 몹시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997년 홋카이도의 유명한 온천 관광지인 노보리베쓰(登別)를 여행했을 때 남성 목욕탕에 중년 여성 청소원이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온천을 즐기던 중 여성이 청소 도구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1년 뒤 2018년 도쿄에 부임할 때는 이런 문화가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쿄의 헬스장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년의 외국인 남성이 일본 목욕탕에서 여성 종업원과 마주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대응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여성 종업원을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일본 남성들도 여성 청소원을 철저하게 ‘투명인간’처럼 대했습니다. 3년간 그곳을 이용했지만 남성 고객이 여성 종업원에게 말을 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여성 종업원도 남성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 묵묵히 청소만 했습니다. 서로를 투명 인간처럼 여기며 불편한 상황을 유지하는 듯했습니다.
홋카이도 온천에서도 같은 일 겪어
2020년 10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직후 일본 정부의 여행 진흥 정책인 ‘고 투 트래블(Go To Travel)’을 이용,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후라노(富良野)의 P 호텔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나왔을 때였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여성 종업원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중년 여성도 아니고 2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습니다. 당황했지만 도쿄에서 익힌 방법을 다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성을 ‘투명 인간’처럼 여기며 서둘러 옷을 입고 탈의실을 나왔습니다.
이후 도쿄에서 업무차 알게 된 여성 기자들과 여성 교수들에게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 여성 종업원이 남성의 알몸을 보게 되는 불편함이나 여성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수치심과 위험은 논의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일본 사회에서 이 같은 문화를 없애려는 움직임은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여성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대부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빙긋 웃거나 “외국인이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 일본 여성은 “여성이 남탕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여탕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몇 차례 일본인들과 대화를 나눈 뒤에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사회가 이를 성차별이나 인권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21년 마이니치신문의 요청으로 이런 경험을 기고했습니다. 여성 인권을 중시하는 진보 성향의 마이니치신문은 저의 지적을 1개 면에 걸쳐서 게재했습니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 따라 개명
일본 여성의 ‘낮은 지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부부의 성(姓) 문제입니다. 현행 일본 민법 제750조는 결혼할 경우 남편이나 아내 가운데 한쪽의 성을 선택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혼한 부부의 95%가 남편의 성을 선택합니다. 신부가 신랑의 성을 따라서 개명하는 것이 일반화돼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으로 바꾸게 됩니다.
결혼한 여성은 운전면허증과 여권, 예금통장, 신용카드, 각종 자격증과 직장 기록의 이름을 모두 변경해야 합니다. 연구자나 전문직 종사자는 결혼 전 이름으로 쌓아온 경력과 실적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이혼하거나 재혼하면 다시 이름을 바꿔야 하는 문제도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결혼 후에도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선택적 부부별성제(別姓)’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찬성하는 의견이 반대 의견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과 중년 이하 세대에서 찬성률이 높습니다. 2024년 7월 NHK의 조사에 따르면,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59%, 반대는 24%였습니다. 다른 언론 매체의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추세가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치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본 정치를 좌우하는 자민당은 신중론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성씨 문제는 일본의 가족 제도와 깊이 관련돼 있다. 국민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사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15년과 2021년 부부동성(同姓)제를 합헌으로 판단했습니다. 가족의 성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제도가 국민에게 불편을 주더라도 오랫동안 사회에 정착했다는 사실 자체를 존속의 근거로 인정한 것입니다.
일본의 부부 동성제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 아닙니다. 메이지 정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족 제도를 정비하며 법제화한 것입니다. 한때 서구 국가에서도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개인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국가는 부부가 각자의 성을 사용하거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습니다. 일본은 다릅니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 일본 특유의 관성이 작동했습니다. 메이지 시대의 가족관이 21세기까지 법률과 관습 속에 남았습니다. 여성이 결혼 후 자신의 이름을 유지하고 싶다는 요구조차 가족 제도를 흔드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성의 개인적 권리보다 가족의 외형적 통일성이 우선시되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일본의 첫 여성 총리이면서도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추진하지 않고, 결혼 전 옛 성의 사회적 사용 확대 및 병기 법제화를 추진할 뿐입니다.

점수를 깎아 여성 지원자를 떨어뜨린 의대
일본의 남성 위주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 가운데 하나가 도쿄의과대 입시 부정 사건입니다. 요미우리신문은 2018년 8월 도쿄의과대가 2011년부터 8년 동안 여성 수험생들의 점수를 일률적으로 감점, 여성 합격자 수를 억제해 왔다고 보도했습니다.
도쿄의과대는 2010년 입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69명으로 전체 합격자 181명의 38%를 차지하자 이듬해부터 여성 수험생의 점수를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합격자가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학교 차원의 조치였습니다. 대학은 배점이 큰 1차 시험에서 여성 수험생들의 점수를 조작했습니다. 2018년 입시에서는 남성 1596명과 여성 1018명이 응시했습니다. 점수 조정을 거친 뒤 남성은 303명, 여성은 148명이 1차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최종 합격자는 남성 141명, 여성 30명이었습니다. 남성의 최종 합격률은 약 8.8%였지만 여성은 약 2.9%에 그쳤습니다. 대학 측이 여성의 입학을 제한한 이유는 노골적이었습니다. 여성 의사는 결혼하거나 출산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 계열 병원의 인력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발전과 병원 운영을 위해 여성 합격자를 줄이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논리였습니다. 여성이 장차 일을 그만둘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만으로 입학시험 점수를 깎았습니다. 여성을 독립된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 언젠가는 결혼과 출산으로 조직을 떠날 존재로 본 것입니다.
사건이 드러난 뒤 대학은 외부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경영진은 물러났습니다. 부당하게 탈락한 여성 지원자에게 사과하고 일부에게 추가 합격이나 입학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손해배상과 보상 절차도 이어졌습니다. 여성 지원자에 대한 일률적 감점 행위 자체를 놓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규모 형사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한국이었다면 심각한 입시 부정과 성차별 사건으로 규정돼 여성단체들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정치권과 언론이 장기간 책임을 추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방식의 사회적 폭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본과 한국이 얼마나 다른 사회인지, 일본 사회에 여성 차별이 어떻게 구조화돼 있는지를 부임 초기에 깊이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이힐을 벗어던진 ‘KuToo 운동’
일본에서 성차별을 문제 삼으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019년 일본에서는 직장 여성에게 하이힐과 펌프스 착용을 사실상 강요하는 관행에 반대하는 ‘Ku Too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어로 구두를 뜻하는 ‘구쓰(靴)’와 고통을 뜻하는 ‘구쓰우(苦痛)’에 세계적인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MeToo)’를 결합한 이름이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배우이자 작가인 이시카와 유미(石川優実)였습니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당시 5~7㎝ 굽의 검은색 펌프스를 의무적으로 신어야 했습니다. 장시간 서서 일한 탓에 발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남성 동료들은 편안한 구두를 신고 일했습니다. 여성에게만 높은 굽의 신발을 요구하는 것은 성차별이며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한 그는 소셜미디어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공감하는 여성들이 빠르게 모였고, 청원 사이트에는 수만 명의 서명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여성에게 하이힐이나 펌프스 착용을 강요하는 기업 관행을 금지해 달라는 건의서를 후생노동성에 제출했습니다.
지진과 화재가 빈번한 재해 대국 일본에서 움직이기 어려운 하이힐을 상시 착용하게 하는 것은 안전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KuToo 운동은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관행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기업의 복장 규정은 일부 완화됐지만 여성에게 단정함과 여성성을 요구하는 직장 문화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한국에서 미투 폭로가 정치·사회 구조를 뒤흔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일본 사회의 반응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일본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제도를 바꾸는 행동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를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는 문화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듯 합니다. 이런 제도와 관행은 일본이 WEF 성 격차 지수에서 148개국 가운데 118위에 머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 사회에서 남성 위주의 관행과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당분간 여성 천황은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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