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물의 높이를 재던 그 눈금은 어디 갔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하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에 해당하는 100년 전 지면에는 유독 수해 사진이 많았습니다. 1926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불안 공포 중에 지낸 한강 일대의 화보」라는 제목으로 여러 장이 실렸습니다. 그중 한 장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지금 한강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진 옆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漢江漸次减水(한강점차감수)」였습니다. 한강물이 점점 빠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 그날 지면을 채운 숫자들
기사 제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漢江漸次减水(한강점차감수) / 昨下午一時廿四尺半(작하오일시 이십사척반) / 水難後의沿江(수난후의 연강)
읽어보면 온통 숫자입니다.
18일 오후 2시까지 26척 4촌. 같은 날 오후 6시경 26척 8촌. 그리고 19일 오전 10시에 이르러 24척 8촌. 「용산 마포 피해」 기사에는 증수(물이 늘어난 것)가 27척에 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숫자가 오르내리는 사이에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동부이촌동(東部二村洞)의 26명과 중부이촌동의 12명은 그저께 십팔일 오후 영시 사십분에 노량진(鷺梁津) 방면으로, 동작리 80명은 이태원 방면으로 떠났습니다. 서부이촌동에서는 305호가 통째로 집을 비웠습니다. 마포 방면 피난민 23명은 마포공립보통학교에 수용되어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전차는 마포우편소부터 종점까지 끊겼고, 마포에서 동막리로 가는 관란교(觀瀾橋)가 잠겨 배로 사람을 옮겼습니다. 경상북도 경동선(慶東線)은 선로가 파괴돼 운전을 멈췄고, 개성에서는 다리 다섯 곳이 떠내려갔습니다. 경성과 춘천 사이 자동차가 끊기자, 우편물은 한강에 발동선을 띄워 보냈습니다.
기사가 인용한 한강 물의 높이는 사진 속 기둥을 통해 측정된 것일겁니다. 26척 4촌, 26척 8촌, 24척 8촌 — 누군가 그 눈금을 읽고 적었기에 남은 숫자들입니다.
● 세종 23년, 강에 자를 세우다
우리역사넷 자료에 따르면, 수표는 측우기와 같은 해인 1441년(세종 23)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청계천 마전교 서쪽과 한강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척(尺)·촌(寸)·푼(分) 눈금을 새겨 물의 높이를 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금을 읽는 일이 누군가의 직무였다는 점입니다. 한강의 수위는 나루터를 관리하던 도승(渡丞)이 재서 호조(戶曹)에 보고했고, 뒷날에는 수표지기(水標直)라는 자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읽는 일이 직무였으니, 제대로 읽지 않으면 벌을 받았습니다. 같은 자료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영조는 비가 왔는데도 수표를 신중히 살피지 않은 수표지기 문팔금(文八金)을 예조에서 각별히 죄를 묻도록 했습니다.
지금 전하는 수표는 1833년(순조 33)에 다시 세운 화강암 기둥으로 이 기둥에는 3척에 갈수(渴水), 6척에 평수(平水), 9척에 대수(大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물이 마른 상태, 보통 상태, 넘칠 위험이 있는 상태에 미리 이름을 붙여둔 것입니다.
다만 이 기둥은 청계천의 수표이고, 사진 속 한강 인도교 아래의 것은 근대에 세워진 관측 시설입니다. 같은 이름을 쓰지만 다른 물건입니다. 그래도 방식은 닮아 있습니다. 물의 높이를 눈금으로 바꿔 적고, 그 숫자를 사람이 읽는다는 것.
● 작년 여름의 38척
이 기둥이 왜 뉴스였는지 알려면 사진이 실리기 꼭 1년 전을 살펴야 합니다.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가 서울을 강타했습니다. 당시 한강의 최고 수위는 인도교 양수표를 기준으로 11.76m, 척으로 환산하면 38.82척이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만 4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1926년 여름의 26척 8촌은, 작년의 38척을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고 지켜 본 숫자였습니다.
● 같은 다리, 다른 시간
한강 인도교 옆에 있던 수표가 언제 사라졌는지 궁금해서 옛 사진들을 찾아봤습니다. 수표를 찍은 사진은 더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강 인도교’로 검색하다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장면들을 만났습니다. 이 다리는 100년 동안 계속 카메라 앞에 서 있었더군요.

아래 사진은 1965년 7월 16일. 최경덕 기자가 찍었습니다.

1972년 8월 21일 사진을 잘라보았습니다.「한강 위험 수위 돌파 — 462.4mm의 기록적인 집중폭우로 위험 수위를 넘긴 한강 인도교는 모든 차량이 금지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닷새치 품삯 1만 4천 원을 받겠다고 다리 위에 올라간 사람이 보입니다. 이 사람은 출동한 경찰의 설득에 50분 만에 다리에서 내려갔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1926년 사진에 분명히 서 있던 그 눈금 기둥 사진은 없지만 1972년 8월 21일자 지면에 의미있는 사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멀리 한강이 보이는 사무실 안에서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54년 전 여름, 위험 수위를 넘긴 다리 아래에서 물의 높이를 재던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남았습니다.
세종 때는 도승과 수표지기가 재서 호조에 올렸고, 영조 때는 문팔금이 이름을 남겼고, 1972년에는 안 중위가 인도교에서 물을 쟀습니다. 500년이 지나도록 강의 높이를 읽는 일에는 사람이 붙어 있었던 겁니다.
지금은 한강홍수통제소가 자동으로 관측합니다. 팔당댐과 소양강댐이 물을 나눠 받고, 위험 수위가 되면 휴대전화로 문자가 옵니다. 눈금을 맨눈으로 세면서 밤을 새우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도교 아래의 그 기둥은 언제, 어떻게 사라진 걸까요. 홍수에 떠내려갔는지, 다리를 고치면서 함께 철거됐는지, 아니면 자동 관측 장비로 조용히 교체된 것인지 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한강 수표가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댓글로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흑백사진들 속에서 무엇이 보이셨나요?
〈참고〉
1926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
우리역사넷, 「수표와 수표교(水標와 水標橋)」
서울특별시 미래한강본부, 『한강 이야기 총서 4』(2024)
동아일보 사진 아카이브(1930·1965·1968·1972·1976·1990)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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