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부르고 지금까지 나는 솔로… 늘 우정 택했으니까”[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1992년 나온 노래다. 사랑하는 여인의 감정이 내 맘 같지는 않다는 대목인데, 그렇다면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을까. 우정을 소개하는 인터뷰인 만큼 그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부른 가수 K2 김성면은 1초도 고민하지 않는다. 우정과 가깝게 살아온 덕분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잃어버린 너’ ‘그녀의 연인에게’ ‘유리의 성’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별 노래들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후회해요. 사랑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제가 아직 솔로랍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사랑을 택할지, 우정을 지킬지 고민하는 시기가 온다. 김성면은 의도하진 않았는데 운명적으로 사랑 대신 명곡을 얻고 사람과 통했다. 그런데 통하는 관계가 한쪽으로 편중돼 있다고. 웃으면 안 되는 데 웃긴다.
“요즘 숏폼 동영상 콘텐츠 플랫폼에서 라이브 방송(수, 금요일)을 하고 있어요. 실시간으로 200명 넘게 팬들이 들어온 적이 있는데 99%가 남자입니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전 ‘남자왕’이에요. 하하. ‘여자 사람 친구’도 없어요.”
연애는 평생 딱 3번 해 봤단다.
“두 번째 연애는 석촌호수 근처에 살았던 여성 분과 했는데 7년 만나고 헤어졌어요.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운이 나온 거예요.”
사랑이 끝난 후의 여운이 배어 있는 노래들은 오랜 시간을 견뎠다. 세대가 바뀌어도 라디오에서, 공연장에서 여전히 들린다. 노래방에서도 술 한잔 걸친 남자들이 그의 노래 번호를 누른다. 자신 있게 시작하곤 고음 처리를 안 하긴 하지만.
“제 노래는 다들 아는데, 정작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은 모르더라고요.”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이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내년이면 데뷔 35주년. 생각해 보면 그의 이름이 열렬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기억이 별로 없다. 알 듯, 모를 듯 사람들 마음에 노래가 연착륙 정도 한 것 같다. 6년 전, 한 길거리 노래방 행사에 참가자로 나섰는데, 관객들이 아예 몰라봤다. 섭섭하지 않느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 노래들이 아직 살아 있잖아요.”
서운함보다 감사함이 느껴졌다. 안도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이 한마디가 김성면이라는 사람을 설명한다.
히트곡 인기에 비하면 그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보통 가수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을 홍보했을 텐데, 김성면은 달랐다. 소속사 없이 활동하던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기도 미안했다. 세월 흘러가는 대로 노래를 나뒀는데, 노래가 계속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홀로 서기 대신 ‘남자왕’이 선택한 K2
자기 부탁은 참 못 하는 성격이다. 반대로 인연 있는 사람들 부탁은 잘 들어 주고 잘 챙긴다.
K2도 김성면이 의리를 지키려고 만든 밴드다. 밴드 피노키오 활동이 끝나갈 무렵 그는 솔로로 활동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가 제안한 조건도 좋았다. 그런데 피노키오에 늦게 합류했던 후배 기타리스트가 마음에 걸렸다.
“그 친구를 두고 혼자 나갈 수는 없었어요.”

고민 끝에 지은 밴드 이름도 영화 ‘K2’에서 영감을 얻었다. K2(해발 8611m)는 히말라야에서 에베레스트(8848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에베레스트는 올랐는데 K2는 번번이 실패해요. 친구가 ‘왜 그렇게 K2에 목숨을 거냐’고 묻죠.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지만 가장 오르기 힘든 산은 K2’라고 해요. 그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팬들에게 쉽게 소비되는 음악이 아니라 오래 남는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남들 다 하는 음악 말고 나만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K2 같은 음악의 봉우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힘들어도 끝까지 올라가는 산 같은 음악을 하겠다는 약속이었죠.”
그 약속은 후배에게는 의리였고, 팬들에게는 책임이었다. 지금도 K2를 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없다.
의리 이야기를 하자면 배우 겸 가수 손지창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김성면은 서울 여의도고교 3년 후배인 손지창의 대표곡 ‘사랑하고 있다는 걸’과 듀오 더블루(손지창 김민종)의 ‘친구를 위해’를 작곡했다. 서로 활동 분야가 달라지고 세월이 흘러도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10여 년 전 더블루 음악을 리메이크할 때도 손지창이 “형이 도와줘야죠”라며 찾아왔다고 한다. 김성면은 그 한마디를 오래 기억한다.
“고마웠어요. 시간이 지나도 찾아준다는 게.”
이때 우정의 본질을 깨달았다. 우정은 만나는 횟수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연락이 뜸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찾아와 주는 사람, 부담 없이 편하게 부탁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부탁을 받는 사람으로서 누군가 나를 그토록 깊이 믿고 편하게 의지한다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장에 가 보니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호일과 김도균이 기타를 메고 서 있었다. 최재훈은 드럼 스틱을 들고 앉아 있었다. 기라성 같은 선후배 뮤지션들이 제작진과 함께 김성면을 위해 비밀리에 밴드 무대를 차린 것이었다. 방송에서 밴드 라이브로 음악을 들려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진짜 울 뻔했어요. 제작진, 그리고 수십 년 함께 음악을 해 온 사람들이 말없이 김성면을 위해 만들어 준 무대잖아요.”
화려한 조명보다 그 존재들이 더 큰 선물이었다.
소유하지 않는 마음으로 지켜낸 사람, 그리고 노래
노래는 오래 사랑받았지만 삶이 늘 순탄했던 건 아니다. 사기를 몇 번 당해 파산 직전까지 몰렸을 때 급전이 필요해 경기 하남시 미사리 라이브카페에서 노래하던 시간도 있었다. 방송 출연 문턱도 왜 그리 높았던지.
“‘나는 가수다’도 출연이 예정돼 있었는데 순서가 계속 밀려 결국 못 나갔어요.”
사람에게, 세상에게 실망할 만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원망 섞인 말이 잘 안 나온다. 방송이 아닌 공연장에는 늘 같은 얼굴들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노래를 사랑해 온 팬들이었다. 무대 밖에서는 “김성면 노래가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친구, 고교 동문, 다른 기획사 관계자들, 동료 가수들이 있었다. 이들 덕분에 원망은 지우고 노래를 계속할 이유만 받아들였다.

“곡은 정말 쉽게 나와요. 그런데 가사를 쓸 때는 진짜 생각을 많이 하죠.”
김성면은 멜로디와 의미 없는 소리만 담긴 ‘녹음 가이드’를 받으면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다. 그러면서 이야기 소재와 주제를 찾았다.
‘그녀의 연인에게’도 그렇게 태어났다. 처음 가이드에서 들린 소리는 “아…”였다. 계속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그 ‘아’ 소리가 “알고 있나요”라는 문장으로 들렸다. 그 물음을 시작으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이별의 아픔을 녹여 냈고, 떠나는 이의 새로운 연인을 향해 ‘꼭 하나만 바래요’라며 진심 어린 부탁을 채워 넣었다.
“가사는 노래의 정체성을 만드는 거예요.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이름을 얻기 전에는 그저 들꽃일 뿐이잖아요. 멜로디도 그래요. 가사가 붙기 전에는 아직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에요. 가사가 붙는 순간 비로소 사랑이 되고, 이별이 되고, 한 사람의 이야기가 돼요.”

‘나는 사랑해서 안고 있었지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내 품이 아니라 자기 자리였구나.’
그 깨달음은 그대로 노래가 됐다. 김성면은 이 노래를 만들며 사람과의 관계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사랑도 우정도 결국 내 곁에 무조건 붙잡아 두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봐요. 진짜 관계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믿어 주는 거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35년째 ‘록 전설’의 직진
그는 사람 덕분에 노래를 지켜온 것 같았다. 그가 말한 우정도 단순히 사랑 대신 친구를 택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람을 오래 믿고, 함께한 시간을 쉽게 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기다려 준 이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색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가장 존경하는 가수를 묻자 망설임 없이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조용필 선배님이죠. 한 시대만을 대표한 가수가 아니라 여러 시대를 노래한 분이잖아요.”
조용필을 향한 존경심 역시 자신만의 음악적 길을 묵묵히 걷겠다는 다짐과 닮아 있었다.

노래를 위한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이달에는 ‘사랑과 우정 사이’를 새롭게 발표하고, 다음 달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과 그녀의 연인에게를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녹음은 마쳤다. 가을에는 신곡을 발표하고, 데뷔 35주년인 내년에 낼 한정판 LP도 준비하고 있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자세히 들어보면 1절은 피노키오 시절 창법이고 2절부터는 점점 K2 창법으로 바뀝니다. 일부러 그렇게 불렀어요.”
과거의 김성면을 지우지 않으면서 현재의 김성면을 이어 붙였다. 팬들이 기억하는 목소리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간을 더하려는 선택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문득 생각했다. ‘노래가 가수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가요계의 오랜 통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김성면을 만나니 그 문장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노래가 가수를 앞선 것이 아니었다. 가수의 삶과 마음의 결이 노래를 넘어서 있었다. 그가 품은 ‘사람의 온도’가 비로소 그 노래를 수십 년 동안 살아 숨 쉬게 한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들은 사랑과 우정 사이는 완전히 달랐다. 슬픈 이별 노래가 더 이상 아니었다. ‘그저 내 곁의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 내고 싶었을 뿐’이라는 덤덤한 고백 같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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