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날리에서 믿을 건 두 다리뿐… 걷기는 생존이고, 종교이며, 정치다 [세상의 모든 이동]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여행작가 2026. 7. 24.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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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걷기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이다 보면 8부 능선도 지나게 되고 기어이 정상에 닿게 될 것이다. 

데날리로 들어가는 길은 하늘뿐이었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경비행기를 우리네 택시처럼 탔다. 창 아래로 원시림이 한참 흘러가더니 어느 순간 눈과 얼음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빙하 한가운데 우리를 부려놓고 금세 떠났다. 프로펠러 소리가 산 너머로 사라지자 거짓말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기계도 우리를 옮겨 주지 않는다. 모든 거리를 두 다리로 감당해야 한다. 보름을 버틸 식량과 연료, 텐트와 침낭을 썰매로 끌어야만 했다. 심지어 휴대용 변기까지. 대신 끌어줄 것이라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기계도 없었다.

데날리는 자기 몫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눈과 얼음의 비탈에서 요령 같은 건 통하지 않았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한 발. 다시 한 번 들이쉬고, 또 한 발. 그게 전부였다. 사방은 터무니없이 장대했고 너무 조용해서 귀가 먹먹했다. 눈밭에 부딪히는 햇살이 소리를 낼 것만 같았으니, 들리는 것이라곤 앞뒤로 늘어선 일행의 숨소리뿐이었다. 우리는 그 숨의 박자만큼만 전진했다.

길 위에서 죽은 새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원정 동안 마주친 처음이자 마지막 생명이었다. 인간이 흘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여기까지 따라왔겠지. 새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높이 오를수록 숨 쉴 공기가 줄어든다는 것을. 새는 날아서 올라왔고 우리는 걸어서 올라왔는데, 내려가지 못한 쪽은 새였다. 그때 알았다. 산에서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첨단 장비가 아니라 한 발씩 내딛는 오래된 동작뿐이라는 것을. 보름 동안 내가 한 일의 전부는, 결국 걷기였다. 산을 오를 때 인간은 가장 단순해진다. 그 단순함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준다.

알래스카에서는 경비행기가 택시처럼 이용되고 있었다.
보름 동안 대자연과 사투를 벌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이 가득 실린 썰매.

산을 오를 때 인간은 가장 단순해진다

탄자니아 라에톨리의 발자국 화석은 360만 년 전의 것이다. 화산이 가벼운 재를 흩뿌리고 그 재가 빗물에 굳기 직전, 한 가족이 그 위를 지나갔다. 두 어른과 한 아이. 셋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이 되기 전이다. 그러니 인간보다 걸음이 먼저였다. 비행기도 기차도, 세상의 모든 이동 수단을 인간이 만들었지만 도보만이 역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두 발로 서는 일은 사실 위험한 선택이었다. 네 발 짐승보다 느려졌고, 내장과 목을 적에게 드러내게 되었으며, 골반이 좁아져 출산이 어려워졌으니까. 그런데도 직립은 살아남았다. 두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자유로워진 손이 도구를 들었고, 도구가 뇌를 키웠다. 그리고 인간은 두 발로 걸어 지구 전체를 채웠다.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무리는 걸어서 아시아로, 유럽으로 퍼졌다. 빙하기에 바다가 낮아져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땅으로 이어졌을 때, 일군의 인간은 걸어서 아메리카로 들어갔다. 한 세대가 평생 몇십 킬로미터씩, 수천 년에 걸쳐. 지금 지구의 모든 인류는 누군가가 걸어서 도착한 자리에 산다.

인간의 몸은 걷기에 맞춰 진화했다. 발바닥의 아치는 충격을 흡수하고, 척추는 그 충격을 나누어 받는다. 무엇보다 인간은 온몸으로 땀을 흘려 체온을 식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단거리에서는 많은 동물보다 느리지만, 하루 종일 걷는 일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인간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능선을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것도 오랜 진화의 선물인 셈이다.

하루의 주행을 마치면 휴식을 잘 취하고 잘 먹어야 매일 같이 오를 수 있다.
눈으로 만든 식탁.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 근사한 식탁이다.

인간의 몸은 걷기에 맞춰 진화했다

산을 오르는 일은 평지를 걷는 것과 좀 다르다. 평지를 걷는 것은 대개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다. 산을 오르는 것은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희박한 공기와 세찬 바람, 그리고 스스로 채워야 할 거대한 적막뿐. 가게도 집도 일자리도 없다. 그저 다시 내려와야 할 자리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수만 년 동안 산을 올랐다. 가장 높은 곳에 신이 산다고 믿었기에. 그래서 산을 오르는 일은 곧 기도였다. 시나이산, 올림포스, 카일라스, 후지산.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굳이 자기 두 발로 올라가거나, 그 둘레를 며칠씩 걸었다. 케이블카도 헬리콥터도 없던 시절, 신에게 가까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한 걸음씩 자기 다리로 오르는 것뿐이었다. 정상이 신성한 것은 그곳이 높아서가 아니라, 두 발로만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라에톨리 발지국 화석.

신은 오래전 산을 떠났지만…

신은 오래전에 산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산을 오른다. 때로는 며칠씩 능선을 걷고, 때로는 몇 주씩 산맥을 횡단한다.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걷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19세기부터 100년 동안 기차와 자동차, 비행기가 잇달아 등장했다.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걷지 않고도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시 배낭을 메고 길 위로 나섰다. 일부러 가장 힘들고 멀고 높은 곳을 찾아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개혁 이후 거의 잊혔다가, 지금은 매년 50만 명 넘게 걷는다. 안나푸르나와 킬리만자로에는 매년 수만 명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걷는다. 제주 올레가 생기고, 주말마다 백두대간 능선이 사람으로 붐빈다.

우리는 걷기 위해 차를 몰아 산에 가고, 걷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걷기는 여가가 됐고, 명상이 됐고, 자기계발이 됐다. 하지만 같은 두 발이라고 다 같은 도보는 아니다. 히말라야 등지로 트레킹을 떠난 사람이 가볍게 걷는 동안, 그의 짐은 다른 사람의 등에 실려 먼저 산을 오른다. 우리가 걷기를 명상이라 부르며 오를 때, 누군가는 자기 몫의 짐에 더해 남의 짐까지 지고 산을 오르는 것이다.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무리도, 오늘 국경을 넘는 난민도, 이 주말에 산을 오르는 우리도 두 발을 번갈아 앞으로 내미는 같은 동작을 한다. 그러나 어떤 걸음은 선택이자 취향이고 어떤 걸음은 강요이자 발버둥이다. 때때로 걷기는 격렬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간디는 1930년 봄, 영국의 소금 독점법에 저항하기 위해 바닷가까지 386km를 걸어갔다. 그가 해변의 소금 한 줌을 집어들며 부당한 법에 불복종을 선언하자, 그 걸음을 따른 6만 명이 체포됐다. 마틴 루터 킹은 1965년, 흑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며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걸었고, 그해 미국의 투표권법은 결국 통과되었다. 무기 하나 없이 오직 두 발로 나아가는 걸음은 그 자체로 권력에 저항하는 가장 정직하고 거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권력은 늘 걷기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통행금지, 행진 불허. 자유로운 도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유였다.

데날리의 캠프4는 '데날리 시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도시처럼 군락을 이룬 텐트들.

360만 년 전 탄자니아 가족의 발자국, 우리 몸에 각인돼 있다

라에톨리의 발자국은 360만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방향으로 남아 있다.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셋이 같이 걷고 있었다는 사실만 남았다. 데날리를 내려와 마지막 빙하를 건널 때,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보름 동안 우리가 오르내린 길이 거기 있었다. 아니, 있어야 했다. 눈보라가 한 차례 지나간 설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끈했고, 우리가 남긴 발자국은 다 지워지고 없었다. 경비행기에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보름이 걸렸던 거리를 비행기는 단숨에 거슬러 갔다. 창에 이마를 붙이고 아래를 다시 살폈지만 우리가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흔적은커녕 여태 아무도 걷지 않은 산 같았다. 라에톨리의 가족은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화산재와 빗물이 빚어낸 기적 같은 우연이 아니었다면, 그날의 걸음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겠지. 대부분의 발자국은 결국 지워지고 말지만, 걸은 몸은 남는다. 발바닥의 아치와 곧게 선 척추, 하루를 걸어도 견디는 다리. 360만 년의 걸음이 우리 몸 안에 고스란히 중첩되어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발자국은 탄자니아의 화산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속에도 있다. 우리는 그 발걸음으로, 오늘도 다음 한 발을 내딛는다.

데날리에선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각자의 짐을 끌어야 한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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