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간 만에 3000만 원 털렸습니다"… 피싱 경험 책으로 낸 출판사 대표
팀미션 시작 후 선입금 유도·단체방 압박
"잃은 돈 아까워 말고 곧바로 빠져나와야"

피싱 범죄는 딴 세상 얘기인 줄 알았다. 뻔한 수작에 걸려드는 건 탐욕스럽거나 어리석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직접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몽땅 날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12일 서울 노원구 한 공유오피스에서 만난 '피싱 피해자' 김수량(49)씨는 "스스로 나 자신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여겼다"며 "사기는 누구나 당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수량씨는 잘나가는 웹소설 출판사 대표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출판계 입문 전 홍보 분야에서 15년간 일하며 자타 공인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그랬던 수량씨가 신종 '팀미션(공동구매) 피싱'에 속아 3,000만 원을 잃는 데 고작 7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량씨는 자신의 경험을 낱낱이 기록한 책 '인생에 한번은 사기를 당한다'를 최근 출간했다. 온라인 범죄 조직이 어떻게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행동을 조종하는지, 악랄한 피싱의 덫에서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생생한 증언을 담았다.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지난해 10월 18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수량씨 개인 블로그에 부업 제안 댓글이 달렸다. 무심코 클릭했다가 댓글을 쓴 A와 채팅으로 이어졌다. A가 이끄는 대로 쇼핑몰 홈페이지에 접속해 간단한 상품 후기 네 건을 작성했더니 4만 원이 들어왔다. "'왜 이런 부업을 이제야 알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 4만 원이면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버는 거잖아요."
달콤한 돈맛을 보자, 일말의 의심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차근차근 부업 참여 방법을 알려주고 결과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A에게 믿음이 갔다. 수량씨는 "모든 사기의 시작은 실제 수익을 먼저 맛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팀미션을 제안받았다. A는 "지금 회원 협동 미션을 진행 중인데, 한 분이 급한 일이 생겨 자리가 비었다"고 했다. 운 좋게 생긴 기회라는 듯 조바심을 자극했다. 수량씨는 또 낚였다. 그렇게 들어간 오픈채팅방에는 매니저를 포함해 민영수·이시연·신희선(가명) 등 4명이 있었다. 진짜 지옥문이 열렸다는 걸 그땐 깨닫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1대 1 채팅방을 통해 미션을 전달받아 3만 원 안팎 물품을 결제해 현금으로 환급받았다. 그러나 팀미션은 팀원 전원이 공동구매 미션을 완료해야 모두가 정산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더 큰 수익을 얻으려면 먼저 개인 돈으로 상품을 결제해야 했고, 몇만 원이던 금액은 금세 수십만 원대로 불어났다.
식기세척기 등 50만 원대 상품을 구매하는 단계에 이르자 수량씨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참여자 세 명이 이미 결제를 마친 상태였다. 수량씨는 자신 때문에 미션이 지연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짓눌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모두 역할극이었어요. 회사에서 업무를 나누듯, 누군가는 친절한 담당자 역할을 하고, 누군가는 먼저 돈을 버는 회원 역할을 하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이미 입금한 1,200만 원이 발목을 잡았다. 수량씨는 마지막 5단계 미션인 300만 원대 맥북 구매까지 마쳤다. 이제까지 입금한 돈과 수당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매니저는 "환급을 받으려면 가상계좌를 먼저 개설해야 한다"며 800만 원을 요구했다.
어떻게든 원금만 찾자는 생각에 돈을 송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API(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는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 인식 오류가 발생했다", "입금자명을 잘못 적었다"며 다시 800만 원가량을 입금해야 한다는 안내가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전문용어까지 나오자 수량씨는 오히려 자신의 실수라고 믿게 됐다.

수량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남동생에게 돈을 빌렸다. 여기에 법인 통장에 남아 있던 돈까지 싹싹 긁어모아 재차 800만 원을 또 보냈다. 매니저는 이번에도 오입금을 이유로 900만 원 추가 입금을 압박했다. 그제야 수량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로만 들었던 피싱 사기였다.
3,000만 원이었던 통장 잔고는 7시간 만에 0원이 됐다. 수량씨는 서울 도봉경찰서에 신고하고, 송금 내역과 채팅방 대화, 물품 구매 과정 등을 꼼꼼히 진술했다. 사건은 서울경찰청 피싱사기수사대로 이첩됐지만 현재까지 수사 중이라는 답변 외에 별다른 진척이 없다.

수량씨 혼자만 겪은 일은 아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피싱 피해 건수는 2023년 1만8,902건, 2024년 2만839건, 지난해 2만3,360건에 달한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7,033건, 피해액 3,277억 원이 발생했다. 팀미션 피싱만 따로 파악해 보니 지난해 피해 건수는 4,413건, 피해액은 1,396억 원으로 집계됐다.
수량씨는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왜 그 순간 멈추지 못했을까"라는 자책에도 시달렸다. 그래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돈을 잃은 사실보다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지가 더 중요하다며 자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당시 자료를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분노와 허탈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량씨는 자신처럼 고통을 겪고 있을 또 다른 피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쉽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 내 돈을 먼저 넣으라는 요구, 단체방에서 계속 조급하게 만드는 분위기 중 하나라도 보이면 바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미 돈을 넣었더라도 아까워하지 말고 당장 멈추세요. 그 돈을 되찾으려다 더 큰 돈을 잃게 됩니다. 저처럼요."
나민서 기자 ia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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