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암투·찐득한 치정·미스터리… 퀴어 문학 대표 작가 “이번엔 장르소설”

소설가 박상영(38)이 개선장군처럼 조선일보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적(敵)을 물리친 기세등등한 디바의 기운을 뿜어냈다. 무엇과 싸워 이긴 것일까. 올해 등단 10년 차인 박상영은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작품을 써보자. 내 영토를 확장하고 제일 먼 곳에 깃발을 꽂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과 싸운 것이었다. ‘한국 퀴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는 그가 4년 만에 독자를 찾아오면서 장르 소설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래빗홀)를 들고 왔다.
소설은 주인공 하나가 엄마로부터 “세일백화점 윤동주 회장을 찾아가라”는 유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요코하마에서 작은 도시락집을 하던 엄마의 과거를 추적하고, 그녀가 40년 전 한국 굴지의 기업 세일그룹이 주최한 미인 대회 우승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 후 부를 쌓아올린 세일그룹 내부에서 어떤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지, 엄마와 세일그룹은 어떤 관계였는지 숨 가쁘게 좇아간다. 찐득한 치정도 곁들인다.
‘마담 보바리’를 쓴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를 특히 좋아해 불문과에 진학했고, 졸업 논문은 마그리트 뒤라스로 썼다.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하면서는 아니 에르노에 빠졌다. 그의 대표작 ‘대도시의 사랑법’(2019)은 감각적인 필치로 대도시에 사는 청춘의 다채로운 사랑을 그려 국내외 문단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작심하고 재벌·치정·복수·미스터리 장르 소설을 펴낸 것은 사건이다. 작가는 “한 땀 한 땀 내가 쓴 것이 맞다”며 “어쩌면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80권을 섭렵한 내 취향의 본류로 돌아간 것”이라고 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자식’에 빗대곤 한다. 재벌물의 장르적 클리셰를 빌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박상영의 혼외자일까” 묻자 박상영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받아쳤다. 그는 “애를 먹인 건 맞다. 어려운 생산 과정을 거쳤다. 혼자 명품 입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소설들)과 사이가 나쁘진 않다”며 찡긋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장르를)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번 소설이 그 깨달음을 얻게 해줬고, 저를 자유롭게 해줬죠.”
박상영은 이번 소설의 취재를 위해 “EBS 역사 강의부터 시작해 재벌을 다룬 논문을 100편 가까이 읽었다”고 했다. 재벌들의 사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방송가 지인들을 동원해 ‘그들 사는 세상’ 이야기를 귀동냥했고, 누구인지 밝힐 순 없지만 “인물 취재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다방면의 취재 끝에 작가가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건 똑같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역사·정치·경제적인 선택들도 아주 사소하고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더라고요. 말 잘 듣는 애한테 유산을 물려준다거나….”
최근 몇 년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프랑스 메디치상 등 해외 유명 문학상 후보에 줄줄이 올랐다. 해외 북토크도 빗발쳤다. 그는 “2023년부터 2025년까지 기억이 없다. 문단의 블랙핑크처럼 살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숨 가쁘게 해외를 다닌 그가 포착한 현상은 “이제 한국 문학의 붐이 왔다”는 점이다. “얼른 (해외에) 책을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패기만만했다.

다음은 박상영 작가와의 일문일답.
-‘지푸라기…’를 쓰면서 염두에 둔 것은?
“나와 먼 여성 화자이고, 기성세대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어요. 제일 먼 곳에 깃발을 꽂고 싶다. 나 자신의 조 또는 습관으로부터 멀어지고픈 마음이 있었어요. 여성 주인공이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는 소설을 쓰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 먹는’ 이야기를 써보자. 사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여성이거든요. 우리가 ‘재벌물’이라고 하면 여성 캐릭터는 슬픈 여자 상속녀, 비서 정도로만 등장하잖아요. 아니면 “성북동입니다” 전화받으면서 차 따라주는 엄마…. 그렇게 쓰기 싫었어요. 그래서 비틀었죠.”
-가장 먼 곳으로 가는 와중에 나의 일부는 어떻게 소설에 녹아들었을까요?
“그게 처음에 힘들었어요. 너무 나랑 멀어서. 전쟁을 겪고, 폐허에서 고철 뜯어다 팔고, 쌀 팔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떼부자가 된 여성과 나의 접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깨달았어요. 이 사람은 나다. 윤동주는 나다. 어떤 내면의 결핍 때문에 굉장히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고, 성공에 대한 욕망, 인정에 대한 욕망, 혹은 나 자신으로서 오롯이 우뚝 서고 싶다는 욕망을 그 여자에게서 발견한 순간, 이 소설을 완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쓰다가 힘들어서 이거 내가 벌일 판이 아닌가 보다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동주 캐릭터와 내면이 맞닿는 순간 이 여자에게 개연성과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윤동주만큼 욕망이 득실거리는 분이셨어요?
“나 자신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저를 작가로 만든 거잖아요. 내 목소리를 세상에 내고 그걸로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가 없으면 작가 못 하거든요. 물론 동주는 이 큰 회사를 내가 가져야겠다는, 조금 다른 결의 욕망이지만….”

-‘한국 퀴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수식이 붙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너무 자랑스럽죠. 선구자라는 자부심이 있고요. 그런데 솔직히 처음 데뷔했을 땐 좀 부담스러웠어요. 왜냐하면 나는 그냥 작가이고 싶고, 소재에 갇히는 것 같고, 너무 한쪽으로만 소비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뭐라도 하나 있으면 그게 어딘가 싶고, 그리고 퀴어 문학을 써서 이렇게 큰 트렌드를 만든 흐름 중 한 명이었잖아요.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사실 좀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가 몇 년 전부터 이건 진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인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장르를) 넓힐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새로운 네임태그를 달아낼 것이란 자신감, 그리고 그 네임태그를 평생 갖고 살아도 자랑스럽게 여길 거라는 자신감이 다 있어요.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게 사실 ‘지푸라기…’의 완성이죠. 이걸 만약 제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자괴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젠 아닌 것 같아요. 충분히 노력하면 어떤 장르의 소설이든 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게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죠. 저를 자유롭게 해줬어요.”
-요즘 박상영 작가의 집필 루틴은?
“호텔 로비에서도 쓰고, 호텔 방에서도 쓰고, 침대에 누워서도 쓰고, 비행기에서 패드로도 쓰고…. 계속 썼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인생은 ‘실전 빵’이다. 나한테 리추얼(의식)은 사치다. 그냥 앉으면 쓴다. 그렇게 (루틴을) 바꿨어요. 어느 선배 작가님이 폴란드 바르샤바 도서전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상영 작가,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써야 할 거야. 하루에 두 시간이라도 무조건 글을 써. 어디서든. 안 그러면 작업 못 해.’ 그때 약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디서든 쓰자. 핑계 대지 말고 아무거나 두 시간만 쓰자….”
-데뷔 10년 차의 소회는?
“살아남았다. 진짜 매일, 진짜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런데 저는 하루도 시간을 안 돌리고 싶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더 잘할 자신은 없거든요. 매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참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일단은 계속 쓰고 싶어요. 다음에 쓰고 싶은 얘기가 줄을 서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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