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 팔아서 젊은 산악인들 돕는 게 꿈" [화제인물 정택준 vip참치 대표]

◆ 서울 4대문 안, 그것도 임대료가 비싸고 경쟁이 치열한 오피스 상권에서만 16개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이 지역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서울 4대문 안은 대한민국의 경제와 정치가 움직이는 심장부입니다. 그만큼 고객들의 입맛이 까다롭고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죠. 저는 이 치열한 전장戰場에서 정면승부를 겨루고 싶었습니다. 냉정하지만 가장 정직한 시장이 바로 이곳 서울 중심가이니까요. 창업 초기부터 제 장사의 철칙은 고객의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신뢰를 쌓는 것이었습니다."
◆ 외식업계, 특히 일식 분야는 유행을 심하게 타고 불황의 직격탄을 맞기 쉬운 업종인데, 서울 중심가의 명물이 된 'VIP참치'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원래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참치는 해동 기술과 칼맛, 그리고 부위별 신선도 관리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다루기 무척 까다로운 식재료입니다. 하지만 타협 없는 정공법으로 승부하면 반드시 손님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먹지 못할 음식은 손님상에 내지 않는다'는 뚝심으로 최고급 참치만 고집한 결과, 창업 16년 만에 연 매출 200억 원 규모의 16개 직영 매장을 일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게는 참치 매장 하나 개업하는 것이 히말라야 원정대 등정보다 훨씬 수월했습니다."

25세 우이동 청년, 빙벽을 타고 알프스를 넘다
◆ 주변에서 정 대표님을 두고 '불도저 같은 뚝심의 사나이', '악바리'라고 부릅니다. 언제부터 산에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스물다섯 살, 일반 화장품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치열하게 일하던 와중에 몸과 마음에 극심한 피로가 찾아왔죠. 사방이 꽉 막힌 도심 빌딩 숲에서 매일 경쟁하며 살다 보니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때 무작정 배낭 하나 메고 집 근처 산을 찾았습니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너무 좋아 아예 산 밑 우이동으로 이사를 갈 만큼 산에 미쳐 지냈죠. 취미로 시작해 암벽과 빙벽 등반을 본격적으로 배웠고, 수락산과 불암산을 종주하는 초창기 산악마라톤 대회나 설악산 국제 챌린지 대회에도 출전하며 산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습니다. 제 단단한 장딴지와 허벅지는 그때 흘린 정직한 땀방울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 고산高山에서 얻은 깨달음
◆ 2010년 참치 전문점을 오픈하자마자 에베레스트로 떠나셨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요?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참치 전문점을 열어놓고, 딱 열흘 만에 가람산악회 소속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네팔로 떠났습니다.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으니, 당시 직원들은 '사장님이 참치집 주인인지 산악인인지 헷갈린다'며 '미쳤다'고 난리 났었죠.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쉽게 품을 허락하지 않더군요.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던 중 급성 A형 간염에 걸려 카트만두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고, 결국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15일간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회복하고 몸이 조금 추스려지자마자 다시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아내는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놓았더니 다시 카트만두로 갔다'며 저를 진짜 미친 사람 취급하더군요. 비록 고산병과 간염으로 정상은 밟지 못했지만, 동료들의 등정 성공 소식을 카트만두에서 무전으로 들었을 때의 벅찬 기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알프스 마터호른(4,478m) 정상에도 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아무런 정보 없이 마주한 마터호른의 거대한 침봉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페르산장(3,260m)에서 새벽에 산을 올려다보는데 겁이 덜컥 나더군요. 하산할 때는 로프도 없이 1,300m를 기어 내려오는 '클라이밍다운'을 감행했습니다. 탈진해서 내려왔을 땐 얼굴이 퉁퉁 부있었죠. 대학 산악부 출신도 아닌 아마추어들이 모여 만든 '7급 산악회'라는 원정대를 급조해 이뤄낸, 무모하고도 짜릿한 성공이었습니다."

◆ 이후에도 수많은 고산 원정을 이끄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무엇입니까?
"지난 2022년 단장을 맡았던 네팔 히말라야의 힘룽히말(7,126m) 원정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서울시산악연맹이 파견한 15명의 대규모 원정대였는데,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폭설 때문에 대원들이 4,100m 지점에서 일주일 넘게 발이 묶여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습니다. 다행히 탈진과 동상으로 헬기 후송되는 우여곡절 끝에, 김미곤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이 정상 등정에 성공해 주었습니다.
7,000m가 넘어가면 인간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밤에 빙하 위 텐트에 누워 빙하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 후회가 밀려옵니다. '내가 다시 여기에 오면 성姓을 고산高山의 고高씨로 바꾼다'고 수없이 맹세하면서도 내려오면 또 가게 되더군요. 히말라야는 마약과 같아서 끊을 수 없습니다."
경영과 등반, '정상'을 향한 닮은꼴 여정
◆ 말씀을 듣고 보니 산을 오르는 과정과 기업을 경영하는 과정이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정확합니다. 산을 오를 때 험한 바위가 나타났다고 우회하기 시작하면 결국 정상에 못 오릅니다. 고비가 오면 뚝심 있게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죠. 다만, 정상만 보고 무작정 뛰어가면 초입에 지쳐 쓰러집니다. 페이스를 조절하고, 날씨 변화를 읽고, 대원들의 상태를 살펴야 하죠. 사업도 똑같습니다. 무리하게 매장 수만 늘리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마음을 살피고 시장의 흐름을 보며 내실을 다져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 최근 우리나라 산악인들 사이에 정통 '알피니즘Alpinism'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별한 비즈니스를 시작하셨다고요?
"예전에는 정통 알피니즘으로 무장한 전문 산악인들이 전국적인 연맹을 이끌었는데, 현재는 구청 중심의 생활체육 인사들이 3분의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산을 정복하는 알피니즘이 아니라 동네 둘레길을 걷는 수준으로 연맹의 색깔이 퇴색되는 게 참 아쉬웠습니다. 진짜 거벽을 타고 히말라야를 가야 알피니즘의 맥이 사는데, 그러려면 결국 자금이 필요합니다. 후배들이 원정 갈 때마다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듯 후원금을 받는 안타까운 현실을 꼭 바꾸고 싶었습니다. 내가 가진 참치 비즈니스 능력으로 산악인들을 위한 자생적인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주고 싶었죠.
그래서 얼마 전 종로에 산악인들을 위한 참치집인 '인수봉 참치'를 오픈했습니다. 이 매장의 수익금은 100% 대한민국 산악계를 위해서만 씁니다. 저는 단돈 1만 원도 가져가지 않고, 현재 서울시산악연맹 이사 출신 후배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죠. 최근 충무로에 개업한 매장 역시 수익을 전혀 가져가지 않습니다.
젊은 대원들이 등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속된 말로 후원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구걸'하러 다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악인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아요. 이런 베이스캠프 매장을 핵심 상권에 2~3개만 더 안착시키면, 매달 1,000만 원 이상의 순이익이 고스란히 후배들의 해외 원정 기금과 장학금으로 쓰이게 됩니다. 후배들이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등반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영원한 현역 산악인으로 남을 마지노선, 70세
◆ 정 대표님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업가로서는 5년 안에 회사 매출을 1,000억 원대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매년 1,000만~2,000만 원 정도를 지원하지만, 매출 1,000억 원이 넘어가면 매년 1억, 2억 원씩 산악인들을 위해 기부할 수 있을 겁니다. 엄홍길 대장 형님처럼 큰 품으로 산악인들을 포용하는 일은 엄 대장께서 잘하시니, 저는 제 방식대로 산악인들에게 실질적이고 안정적인 재정적 도움을 주는 버팀목이 되려고 합니다.
산악인으로서의 목표는 거창한 기록을 세우는 것보다, 70세까지는 젊은 후배들과 함께 매년 원정대를 꾸려 떠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체력적인 한계로 5,000m 전후 베이스캠프에 머물며 후배들을 지원하는 역할에 만족하려고 하지만, 내 발로 거친 산을 직접 걸으며 자연이 주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 '영원한 현역 산악인'으로 남는 것이 제 마지막 꿈입니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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