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술 없인 첨단 반도체 못 만든다

박지민 기자 2026. 7. 2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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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소부장 업체 3곳의 경쟁력
독일 디칭겐 트럼프 본사 클린룸에서 엔지니어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 들어가는 레이저 모듈을 점검하고 있다. 네덜란드 ASML은 첨단 칩 제조에 필수적인 EUV 장비를 독점하고 있는데, 트럼프는 ASML에 이 레이저 장비를 독점 공급한다. /트럼프

지난 15일(현지 시각)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 인근 디칭겐에 있는 레이저 기업 트럼프(TRUMPF)의 클린룸. 사람 키만 한 금속 프레임 안에 형형색색의 전선들이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혔다. 회로 선폭 5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용 레이저 모듈이다. 이 모듈에서 생성된 레이저는 4단계를 거쳐 30kW(킬로와트)의 초고출력으로 증폭되고, 노광 장비 안에서 미세한 주석 방울을 때려 EUV를 만든다. 이 빛이 반도체 웨이퍼 위에 초미세 회로를 새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이 이런 식으로 최첨단 반도체를 만든다. 트럼프는 ASML에 이 레이저 장비를 독점 공급한다.

디칭겐에서 75㎞ 떨어진 소도시 오버코헨에는 자이스(ZEISS)가 있다. EUV를 모아 웨이퍼까지 전달하는 초정밀 반사 광학계(거울)를 생산한다. 이후 머크(Merck)가 공급하는 각종 화학 소재가 반도체 공장(팹)의 복잡한 공정에 투입되며 최종 반도체 제품이 된다. 독일 기업 세 곳의 기술이 맞물려 첨단 반도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벤자민 하인 머크 일렉트로닉스 최고경영자(CEO). /박지민 기자

독일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머크와 트럼프, 자이스가 지난 14~16일 아시아 언론에 연구실과 제조 클린룸을 공개했다. 첨단 칩 설계는 미국이, 생산은 한국과 대만이 주도하지만 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레이저·광학·소재 기술은 독일이 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벤자민 하인 머크 일렉트로닉스 최고경영자(CEO)는 “반도체 제조의 약 80%가 아시아에서 이뤄지지만, 완제품 뒤에는 독일과 유럽 기업들이 제공하는 수많은 ‘비밀 소스’가 있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첨단 반도체 뒤 독일 생태계

독일 반도체 생태계의 특징은 기존 제조업에서 수십~수백 년간 축적한 기술을 반도체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1668년 의약·화학 기업으로 출발한 머크는 정밀화학 역량을 반도체 소재 전반으로 넓혔다. 1846년 현미경 사업으로 시작한 자이스는 광학 기술을 EUV용 초정밀 거울로 발전시켰다. 1923년 공작기계 업체로 출범한 트럼프도 금속 가공에서 축적한 레이저와 전력 제어 기술을 EUV 광원 분야로 확장했다.

독일 자이스의 EUV(극자외선) 장비용 거울. /자이스

세 기업은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을 장악하고 있다. 트럼프의 초고출력 레이저와 자이스의 초정밀 광학계가 없으면 EUV 노광 장비를 만들 수 없고, 머크의 특수 가스와 식각·세정 소재 역시 하나만 부족해도 반도체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출 수 있다. 베르톨트 슈미트 트럼프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최고의 기술을 제공하면 대체 불가능한 공급업체로서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유지된다”고 했다.

베르톨트 슈미트 트럼프 최고기술책임자(CTO). /트럼프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세계 반도체 업계가 전례 없는 증설에 나서면서, 독일 ​소부장 생산 현장도 분주해졌다. 소재와 장비 역시 수요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회사 경영진은 최근 800조원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협력 논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크 로문트 자이스 SMT(반도체 부문) CEO는 “올해 반도체 시장은 1조달러(약 1470조원)를 넘기고, 2030년까지는 2배 이상 커질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 인재 기업이 키운다

독일 반도체 생태계가 장기간 경쟁력을 유지한 배경에는 학교 교육과 기업 실무를 결합한 실용적 교육 제도가 있다. 트럼프는 매년 약 150명의 학생에게 기계·전자 기술을 가르친다. 자이스도 정밀 광학 분야를 중심으로 수백 명을 상시 교육하고, 머크는 다름슈타트공대와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일찌감치 선발해 자사 기술에 맞게 키우는 것이다.

프랑크 로문트 자이스 SMT(반도체 부문) 최고경영자(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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