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포럼] 민주주의의 꽃?

화려한 화초든 보잘것없는 들꽃이든 세상의 꽃치고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을 꽃이 어디 있을까? 꽃은 아름다움을 넘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수많은 꽃 중에는 민주주의 꽃도 있다. 그 꽃을 ‘선거’라고 한다. 왜냐하면 ‘민중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오늘날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간접민주주의의 절차적 수단인 선거를 통한 대표성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선거는 다수결, 평화적 정권교체, 권력분립, 대의제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을 실현하는 정수(精髓)이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그 꽃이 제대로 관리·운영되지 않아 시들고 잡초가 무성하다가 급기야 꺾여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직후 헌법상 독립기구로 태어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그동안 외부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초법적 권한과 상상초월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누려왔음이 최근 6.3지방선거로 여지없이 드러났다. 무능, 무책임 그리고 갑질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관료제조직에서 무능력이 드러나는 수준까지 승진하고 보직하는 경향으로 지적되는 ‘피터의 원리(Peter’s Principle)’조차 무색하게 만든 참담한 사례가 아닐지. 피로 얻은 정치적 민주화와 주권재민의 참정권을 보호해야 할 조직이 ‘방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같은 참담한 난장판이니 헌법기관인지 진정 의심스럽다.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으로 불거진 이번 사태에 대해 2030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체계 미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의 분노는 단순히 참정권 보장의 요구가 아니라 그동안의 불공정한 사회와 독점적 권력을 향해 있다. 선관위의 허울 좋은 ‘민주주의 꽃’이 국민을 기만하는 일그러진 조화(造花)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민주주의를 나무라 한다면, 뿌리는 시민사회의 일상적 자치와 연대이고, 줄기는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언론, 결사, 집회)이며, 그런 가운데서 선거는 ’꽃‘일 수 있다. 그러나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않는 유실수는 병든 나무다. 뿌리와 줄기가 썩어 있는데 몇 년에 한 번 화려한 꽃만 피운다고 해서 그 체제가 건강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음이다. 선거의 형식에만 맹목적이라면 그것은 이미 선거주의(electoralism)의 늪에 빠진 것이다.
국가가 자원과 권력에 의해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분석한 테리 칼(Terry L. Karl)은 선거가 지배계급의 권력세습이나 정당성 조작의 도구로 전락한 상태를 ‘선거주의의 함정’이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부실하고 불공정한 선거관리로 참정권이 침해되거나 박탈당한다면 헌법 제1조 제2항의 주권재민은 공염불이다. 장 자크 루소가 ‘ 사회계약론’ 에서 비판했듯 “민중이 자유로운 것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기간뿐”이라는데 그 자유와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한다면 노예나 다름없지 않은가.
기형적 시스템과 운영으로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중앙선관위를 대수술하지 않으면 꽃 타령은 고사하고 민주주의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반드시 특검을 통해 곪아 터진 중앙선관위의 갖가지 적폐를 명명백백하게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 국민주권정부라면 더욱 그러하다. 중앙선관위가 공정성, 중립성, 책임성을 지닌 조직으로 환골탈태하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만 부정선거 의혹도 불식시킬 뿐 아니라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일 수 있다.
Copyright © 강원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