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표현의 자유’는 해방의 언어가 아니다

극우가 격정적이라면 가해자는 대개 극도로 분노 상태에 있다.
이는 개인 문제를 넘어선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은 자신의 가해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사회의 일상을 구성한다.
혐오 가해자는 당당하지만, 피해자는 용서하기를 강요받으며 고립된다
최근 강의에서 내가 “우익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한 청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민사회라는 말은 진보적인 경우에만 쓰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 질문이 나를 포함, 지금 한국 사회를 사는 많은 이들의 혼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오랜 군사 정권 시절이나 보수 정권이 집권할 때 시민들이 저항의 구호로 사용했던 “표현·집회·출판의 자유”가 이제는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열렬히 주장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은 예전의 비판적 시민사회 못지않게 지속적이고 헌신적이다. 이들은 보수 정권에서는 “관변단체”로 간주되었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는 저항 세력이다. 물론 우익과 보수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문제는 이들 중 기존 보수 세력보다 더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을 활용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항이나 자유는 무조건 긍정적인 가치가 아니다. “~에 대한 저항인가” “~으로부터의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이런 질문 없이, 누가 주장하든 그 주장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동음(同音)만 반복될 뿐 발화자의 위치성은 좀처럼 문제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수강생의 질문에는, 그들은 시민이 아니고 그들을 시민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지금 한국의 보수 세력은 숭미, 혐중 외에는 입장이 없다. 음모론과 반대를 위한 반대가 그들의 입장이다. 지난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보수의 대표를 자처하며 2위를 차지한 조전혁 후보의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는 충격적이기보다 의아했다. 거리마다 나부낀 현수막에는 한결같이 “퀴어 동성애 교육 추방”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혐오 발화 여부를 ‘떠나’ 과연 이 구호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거용 구호는 쉽고 정확해야 한다. 그의 선거운동 세력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진보 진영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짐작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혐오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영어에서 자유는 ‘freedom’과 ‘liberation’으로 구별한다. 전자는 자유로움이고 후자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표현의 자유는 ‘freedom of speech’로 해방의 의미가 없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일종의 희언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말이라는 의미다. 언어 행위 자체의 특성상, 표현의 자유는 불가능한 실천이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근대의 보편적 인권 개념의 핵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의 세계에는 중립이 없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파성을 가진다. 이것이 표현의 자유 패러다임의 근본적 모순이다. 즉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피억압자나 역사적 고통의 경험자에게 폭력으로 작동하기 쉽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를 비하하는 말, 4·3이나 5·18 피해자를 상대로 한 표현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고 ‘자유로움’의 틀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기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행위? 이는 표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모순이다. 자기만의 언어가 없거나 발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는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평생 노력해서 획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사명이자 의무이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장애인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주의자가 되는가. 피억압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다.
결국 표현의 자유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소용이 없다.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약자에게 폭력이고,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때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자기 삶의 경험이 기존의 언어와 일치하는가(강자), 그러지 않는가(약자)로 한다. 강자는 표현의 자유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
스타벅스 사태나 서울 배재고 일부 학생들의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것이다.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유하려는 극우 세력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은 혐오 발화고, 네가 하는 말은 표현의 자유냐?”라고 항변할 수 있다.
더구나 당대는 SNS라는 혐오 행위의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하게 마련된 상태다. 온라인의 익명성과 집단성은 ‘평균적 혐오’를 넘어서 창의력이 더해진다. 표현의 자유는 무한히 팽창하고 제재 없이 오용되고 있다. 더구나 많은 경우 표현의 자유는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잘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몇날 며칠씩 모여 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누가 ‘약자’인가라는 논쟁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의미가 있다. 문제는 사람마다 누가 약자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여성 우위, 남성 차별 시대”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약자 코스프레가 생존의 기술이 되거나 가장 약한 사람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에코 페미니스트 그레타 가드는 자신의 책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에서 억압자(주체)가 피억압자(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주인이 타자의 봉사를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하는 후경화(backgrounding), 둘째, 주인이 타자와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반대로 공통점을 극소화하는 과잉분리(hyperseparation) 단계, 셋째, 주인의 특성이 표준이 되어 타자를 측정하는 병합(incorporation) 단계, 넷째, 타자가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는 존재 목적이 없도록 형성되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단계, 끝으로 지배받는 타자가 아무 차이 없이 단일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고정관념화(stereotyping) 단계가 그것이다.
<사기(史記)>의 사마천에게, 말은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책임이나 임무에 준하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장난이었어요” “농담도 못하나?” 같은 말은 난센스다. 표현의 자유는 어려운 실천이고 그래야 한다.
스타벅스의 5·18 광주 사태 “탱크데이” 기념 캠페인, 이러한 기업의 행위를 따라 하는 일부 고등학생들의 야구 경기 응원… 스타벅스의 잘못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를 야당 당대표가 “커피 한 잔의 자유”를 달라며 조롱하는 상황… 소통은 어렵고 사회적 갈등은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혐오 발화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가 개입하거나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들은 반성하기보다 반발한다. 그래서 가해자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공적인 정치 세력이 버젓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막을 대안은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극우가 격정적이라면 가해자는 대개 극도로 분노 상태에 있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은 자신의 가해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가해자들과 상담한 적이 있는데, 특히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들의 핵심적인 인식은 분노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걸렸다” “‘꽃뱀’에게 걸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경찰 조서를 보면 명백한 거짓말이다. 치명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성폭력인 경우에도 이렇게 말한다.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편들의 고뇌(?)도 비슷하다. 이들은 가정폭력방지법이 “아내를 교육시키고 가정을 바로잡을 기회를 박탈하는 가정파괴법”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사회의 일상을 구성한다. 혐오 발화를 행하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심지어 가해자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사회의 걱정이 동반되지만, 피해자는 용서하기를 강요받으며 고립된다. 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의 스타벅스 매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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