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주보기]느림의 미학과 빠른 지능의 동행

기고 기자 2026. 7. 2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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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환 AI쓸모연구소장

지난주, AI의 프롬프트 창에 짧은 명령어 하나를 입력했다. 10초도 안 돼서 화면에는 제법 그럴듯한 칼럼 한 편이 작성되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논리는 빈틈없었다. 내가 직접 쓰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뭔가 빠진 게 있고, 왠지 생기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빈 화면을 노려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으려 애쓰던 그 긴장감도, 문장을 고쳐 쓰며 누리던 사소한 기쁨의 흔적도 없었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다가 마음에 드는 한 줄을 건졌을 때의 안도감, AI로는 그런 걸 경험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몇 초 만에 한강 작가의 문체를 닮은 긴 글을 써내고, 고흐풍의 그림과 K-POP 스타일의 음악까지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속도와 효율성 앞에서, 나는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걸 느낀다. 편리함을 얻는 대신 더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럴 때면 전북의 길을 걷는다. 전주천변 바람 쐬는 길을 걷다 보면, 완주의 어느 한옥 카페에 앉아 처마 끝 풍경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기엔 뭔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게 된다. 조급함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다. 느림과 기다림, 그 오래된 리듬이다.
전주 흑석골에서 장인의 수십, 수백 번에 이르는 고단한 손길을 거쳐 완성되는 한지는 비로소 천 년을 버텨내는 힘을 얻는다. 닥나무 껍질을 삶고 두드리고 뜨는 과정 하나하나에는 지름길이 없다. 한 장의 한지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그 시간을 요즘 사람들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순창의 장 담그는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바람과 미생물이 저희끼리 알아서 조화를 이룰 때까지, 사람은 그저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서두르는 손끝에서는 한지의 결도, 전통 장의 깊은 맛도 곱게 살아나지 않는다는 걸, 이곳 장인들은 오랜 세월 몸으로 익혀왔을 것이다. 그 더딘 축적과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전북이 오래도록 품어온 자산이 아닐까?
그렇다고 첨단기술이 주는 혜택을 외면하자는 말은 아니다. AI는 이미 공기처럼 우리 곁에 와 있고, 지역 문화 산업이나 창작 현장에서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쓸모를 넓혀 나갈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됐다. 다만 주객이 바뀌면 곤란하다. AI를 도구로 써서 상상력을 넓히는 건 좋지만, 그걸 부리는 사람 안에는 전북이 가르쳐준 느린 호흡이 여전히 살아있어야 한다. 도구가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그것을 언제 어떻게 쓸지 판단하는 몫은 결국 사람에게 남는다.
심리학자들은 빠르게 튀어나오는 직관적 판단과, 시간을 들여 곱씹는 숙고형 판단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온전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AI가 내놓는 답은 늘 전자에 가깝다. 그러나 빠른 판단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이 빨라질수록 사람의 생각은 오히려 더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기술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속도의 열기로 가득 찬 이 계절, 잠깐 화면을 끄고 우리 곁의 오래된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떨까. 한지 뜨는 발틀 소리, 장독대를 오가는 발걸음,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 소리. 그런 사소하고 더딘 것들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빠른 지능과 느린 정서가 만나는 그 어딘가에서, 우리 전북의 문화는 조금 더 깊고 풍요로워질 거라고, 나는 아직 믿고 싶다.

전성환 소장은 30년 이상의 홍보 마케팅 경력을 지닌 전문가로, 최근 생성형 AI의 실용적 활용법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3년여 동안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를 연구하며, 다양한 기관에서 AI 활용법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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