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지갑 생각해 고른 ‘샛노란 두 봉지’ 할머니에게 귀한 여름 선물[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한 무더기의 수박이 위태롭게 쌓여 있다. 삼단, 사단으로 올라간 탑이 제 무게를 겨우 버티는 모양새다. 누가 쌓았는지 몰라도 손이 야무진 건 아닌 모양이다. 지나가는 카트 바퀴 소리에도 조마조마하다. 맨 아래쪽 하나가 조금씩 밀려나온 것도 같다. 톡 건드리면 우르르 무너지는 상상을 한다. 굴러 떨어진 수박이 쩍 갈라지는 소리, 사방으로 흩어지는 붉은 과육, 그리고 계산대 앞에서 난처한 얼굴로 지갑을 여는 나. 깨지면 못해도 3만 원은 물어내야 하니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옮겨본다. 옆자리에는 황금색 종이에 싸인 복숭아가 기다리고 있다. 보들보들한 솜털을 보니 쿡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당연히 참아야 한다. 눌린 자리는 무르고, 무른 자리는 하루 만에 티가 난다. 한 상자에 10알, 한 알에 대충 3000원. 표고버섯 한 봉지 값이다. 손끝 하나로 표고버섯 한 봉지를 날릴 순 없는 노릇이다. 역시 호객행위는 내실이 없다.

이모가 챙겨준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모 손을 거치면 뭐든 더 맛있어졌던 경험이 무색하게, 딱 평범한 '집' 옥수수 맛이다. 앞니로 쏙쏙 뽑아서 어금니로 씹으니 거슬거슬 목에 걸리는 끝 맛이 아쉽다. 앞니에 쫀득하게 달라붙고 목구멍으로 숭덩 넘어가는 그 맛은 돈 주고 사 먹는 옥수수에만 있는 모양이다. 애매하게 맛본 맛이 자꾸 생각나 결국 옥수수를 사러 길을 나섰다.
거리 초입부터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찜통 옆을 지나기도 전에 구수한 냄새가 먼저 마중 나온다. 김이 서린 찜기 옆에 이미 쪄진 노란 알갱이가 보인다. 발걸음이 벌써 그쪽으로 기운다. 옥수수 다섯 개에 만 원. 제철 음식이 제일 비싼 요즘 물가로 치면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이다. 투명 비닐에 담긴 연노란 옥수수, 그 위에 허옇게 서린 김까지, 눈으로만 봐도 저건 틀림없이 쫀득한 맛이다. 봉지를 집는 손이 벌써 반쯤 마음을 정했다.
그런데 '당장'이라는 말이 목에 걸린다. 그렇지, 옥수수는 오늘 안에 먹어야 한다. 저 구수한 연노란색은 하룻밤만 지나면 누렇게 쉬어버릴 게 분명하다. 오늘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을 헤아려보니 많이 잡아야 두 개. 요즘 이가 성치 않은 할머니는 하나나 겨우 드실까 싶다. 둘이 먹을 걸 다섯 개 사면 두 개는 버리는 셈이지만 2000원도 그냥 날릴 순 없다. 갓 쪄낸 구황작물 냄새로 잠깐 푸근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숫자는 언제나 차갑다.

'복숭아 한 상자에 3만 원', '수박 한 통에 2만 8000원'
과일이 번거롭고 귀찮다고 해도 어깨 펴고 내밀 여름 선물로 이만한 게 없다. 무릇 입에 들어갈 것을 내미는 것만큼 정성을 표현할 것이 없지만 습한 장마철에는 그마저도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다른 계절에 근처 빵집에서 살 롤케이크나 호두과자 대신 조금 더 써서 과일을 사는 편이 낫다. 물론 카드 값이 공제된 내 통장에게는 그 조금 더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하다.

'속이 붉은 것들은 비싸다.'
오늘 조금 더 써서 어깨 펴고 대문을 들어가면 내일과 내일모레는 조금 더 움츠러들어야 한다. 조삼모사의 상황에서 안 그래도 말린 어깨 날마다 움츠러든 편이 낫겠다 싶어 구색을 포기하기로 한다. 귀한 포장의 것들 말고 얄궂은 플라스틱에 든 복숭아를 찾아보지만 한 알로 따지면 더 비싸게 받는다. 고약한 붉은 것들을 제쳐놓고 붉지 않은 과일을 찾아본다. 포장도, 매대 위치도 뒤로 밀린 구석 자리이지만 구색이 덜 갖추어있어도, 맛이 좋고 상태가 좋은 과일. 또 믿을 건 참외뿐이다. 한 봉지에 8000원, 가격도 좋고 크기도 적당하다. 사실 큰 게 좋겠지만 참외는 작을수록 달다고 하니 선물을 건네며 덧붙일 말도 준비되었다. 모든 면에서 제격인 참외만이 믿을 구석이다. 고마운 과일이다.
만족스러운 선물에 덩달아 신이 나 빨간 대문을 빠르게 지나서 집으로 들어간다. 할머니에게 참외 두 봉지 턱 하고 내미니 '아이고, 윤지가 월급 타서 이런 것도 사올 줄 안다'라며 손사래 반, 웃음 반으로 참외 봉지를 받아드신다. 값비싼 선물에도 시큰둥한 얼굴들은 여럿 봤어도, 고작 2만 원도 안 쓴 선물에 이렇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가 유일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가 성치않은 할머니는 참외를 다 드시든 못 드시든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건 참외가 아니라, 바쁜 와중에도 내가 걸음 해서 사 왔다는 사실 그 자체였을 테니까.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