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퇴직연금 새판 짠다…"국민연금이냐 민간이냐" 쟁점은?
국민연금 참여 여부 최대 변수
금융권 "공정경쟁 훼손 우려"
자본(硏 "핵심은 참여 주체보다 제도 설계"

국내 퇴직연금 시장이 적립금 500조원을 돌파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정부가 내달 초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방안을 발표할 예정인 가운데, 국민연금공단의 시장 참여 여부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민연금은 "수익률은 3배, 수수료는 3분의 1"을 내세우며 '메기 효과'를 자신하고 있지만, 금융권은 공공기관과 민간 금융사의 경쟁은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논의의 초점이 '국민연금 참여 여부'에만 맞춰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기금형 퇴직연금의 성패는 누가 운용하느냐보다 가입자 중심의 지배구조와 수탁자 책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말까지 제도 설계를 마무리한 뒤 내달 초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관련 법 개정안은 오는 9월 마련해 연내 입법을 추진하고, 이르면 내년 상반기 제도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기업과 가입자별로 흩어진 적립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모아 전문 운용조직이 통합 관리하는 방식이다.
가입자가 금융상품을 직접 선택하는 계약형 퇴직연금과 달리 장기 자산배분과 운용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구조다.
◆ 국민연금 "3배 수익률" 자신감…금융권은 공정경쟁 우려
국민연금공단은 기금형 퇴직연금에 참여할 경우 시장 경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최근 "국민연금이 참여하면 기존보다 3분의 1 수준의 수수료와 3배 이상의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18.8%의 운용수익률을 기록했고 비용 부담률은 0.089% 수준이다.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6.47%)과 총비용 부담률(0.336%)을 비교하면 각각 약 3배와 3분의 1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공단은 우선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참여해 민간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하지만 금융권은 단순 비교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국민연금은 정부 지급보증과 장기 운용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반면 계약형 퇴직연금은 위험자산 투자 한도 등 각종 규제를 받는다.
실제 실적배당형 DC 가입자의 지난해 수익률은 19.8%로 국민연금보다 높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
수수료 역시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영리 목적이 없고 국가가 구축한 인프라를 활용하는 만큼 민간 금융사와 동일한 경쟁 환경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시장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공공기관 근로자는 전체 가입자의 약 3% 수준이지만 적립금 규모는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약 7.5%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공공기관 참여가 시작되면 민간 기업으로 확대 요구가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참여 논란과 별개로 기금형 퇴직연금의 본질은 제도 설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이 지난해 말 기준 501.4조원으로 성장했지만 전체 적립금의 75.4%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며 "가입자가 평생 투자 결정을 반복해야 하는 현재 구조로는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제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연구원은 기금형 퇴직연금을 ▲공공형 ▲비영리 연합형 ▲금융기관 개방형 등으로 구분해 목적에 맞게 차등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공형은 중소·영세 사업장 근로자의 사각지대 해소에 집중하고, 연합형은 업종·지역별 규모의 경제를 활용하며, 개방형은 민간 금융기관의 전문성과 경쟁을 통해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획일적인 규제를 적용하기보다 가입자 최선의 이익, 수탁자 책임, 이해상충 방지, 투명한 공시 등 공통 원칙 아래 각 유형의 특성에 맞는 지배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 "성공 열쇠는 수탁자 책임과 디폴트 구조"
자본시장연구원은 기금형 퇴직연금이 성공하려면 운용 주체보다 지배구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는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해야 운용이 시작되는 '옵트인(Opt-in)' 방식이다. 가입자가 선택을 미루면 자산이 사실상 방치되는 문제가 반복된다.
연구원은 별도 선택을 하지 않아도 전문가가 자동으로 장기 분산투자를 수행하고 가입자는 원할 경우 언제든 다른 기금으로 이동할 수 있는 '옵트아웃(Opt-out)'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수탁법인의 독립성 확보, 이해상충 관리, 성과 및 비용 공시 강화, 저성과 기금 퇴출과 가입자의 기금 이동권 보장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기금형이라는 형식만 도입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며 "가입자 최선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수탁자 책임과 목적별 차등 설계가 함께 작동할 때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보장의 실질적인 두 번째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